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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8.01 20:03최종 업데이트 02.08.02 08:26

<장편연재소설>무대일가 32회

이런 아들을 보다못한 여자가 아들을 진정시킬 의도로 원불교 부속 중학교에 입학을 시킨 일이 있다. 하지만 새로 산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간 아들은 갈기갈기 찢긴 교복에 피를 묻혀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한 팔을 쓰지 못하는 여자는 참을 수 없이 화가 나서 외쳤다.

"이 오살을 헐 놈아, 이 혹쟁이 도승아!"
이렇게 외치던 그녀는 자식을 향해 욕을 퍼붓고 있을 뿐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그런 씨를 뿌린 혹쟁이를 저주하고 있었다. 그녀는 부자가 대를 물려가며 악물을 떨고 있다는 생각이 불시에 들었을 것이다. 아들은 이 욕을 그 자리에 서서 듣고 있지 않았다. 집안의 장독을 부수고 그릇을 집어던졌다.

"왜 내게 혹쟁이의 도승이라는 말을 해!"
그것을 보며 여자는 그래도 그 말은 듣기 싫은가 보다 생각했다.
몇 년 뒤였다. 한 팔을 쓰지 못하는 여자에게 뜻하지 않은 행복이 찾아왔다. 얼굴이 얽은 큰며느리를 보아 내내 마음이 개운치 않았는데 바로 그 며느리가 그녀를 지극 정성으로 보살펴 주었다.
"얼마나 힘들고 어렵게 살아오셨을까, 그러고도 두 아들과 딸을 키우셨다니,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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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즈음 며느리가 한번씩 무심코 내뱉던 말들이었다. 한 팔을 쓰지 못하는 여자는 행복에 불안해하면서도 내내 그런 시간이 지속되기를 소원했다. 얼마 동안은 그녀의 바람 대로였다. 큰아들이 운수회사에 다니며 짐을 나르는 동안 며느리는 억척스럽게 보험 일을 해 나갔다. 그리고 주말이면 꼭 그녀를 만나기 위해 갓난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며느리는 작은아들에게 취직도 시켜주었다. 그것도 시시한 회사가 아니고 전문대학을 나온 자들이나 들어가는 그런 국영회사였다. 그러면서 큰아들 내외는 동네의 큰집을 사서 한 팔을 쓰지 못하는 여자와 동생들이 살도록 해 주었다.

그런데 그 구조의 어딘가가 잘못되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이사를 잘못한 것일까. 아들 내외가 내내 행복하기를 바랐고, 그와 더불어 며느리의 극진한 봉양이 오래오래 계속되기를 기대했던 여자는 놀라운 사건을 전해 들었고, 그 때까지 며느리로부터 받은 환대는 본래 자신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것을 잠시 빌려온 것임을 깨달았다. 놀라운 사건이란 다른 것이 아니었다. 바로 그녀가 믿고 의지하려던 큰며느리가 보험을 하던 중 알게 된 중늙은이와 함께 달아나 버린 사건이었다. 그 후 그녀는 잠깐동안이지만 작은며느리에게서 큰며느리 모습을 보려고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작은아들 결혼식을 치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기대를 한 자신을 책망할 수밖에 없었다. 오빠와 함께 고아처럼 자란 둘째며느리는 본인이 곧잘 하는 말처럼, 제 살기에도 바쁜 여자였다.

환상에서 깨어나자, 동섭은 평평한 계단 위에 두었던 한 점 파문이 일지 않은 양동이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위의 것은 평생 부모 피를 빨아먹으며 살아야 하는, 한 팔을 쓰지 못하는 부엉댁의 불행한 일대기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대로 구박을 받기도 하고 환대를 받기도 하며 살아왔다.

동섭은 처갓집으로 돌아왔다. 고랑에 사는 서지영이 마당에 서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이 마을의 어느 농부보다 일찍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대영면 일대의 독자들에게 신문을 배달해주는 것이 서지영의 직업이다. 서지영은 전주댁의 아재뻘이 되는 사람으로 동섭의 처갓집 일에 주제 넘는 관여를 해왔다.

"신문을 돌리러 가지 않소?"
"오늘은 신문이 없는 날이요."
그는 신문을 구독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희멀건 얼굴에 난 짙은 수염 때문에 작은 체구의 서지영은 야성적으로 보인다. 그는 이 사람에 눌려 여태까지 처갓집 일에 의식적으로 관심을 배제하고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가 두려워했던 것은 처갓집 일에 관여해서 재산이라도 챙기려 든다는 말을 동네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듣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원하는 바가 결코 아니었다.

덧붙이는 글 | 작가의 말 : 시조 시인 진병주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그는 그다지 이름이 알려지지도, 서른 잔치는 끝났다, 를 쓴 최영미 시인처럼 베스트셀러 시인이 되지도 못했다. 그는 전북일보 기자 생활을 했고, 전주 해성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고문을 가르쳤다. 그는 신경질적이고 학생을 편애했다. 그리고 작가가 문단에 단편소설을 하나 내밀고 연락을 했을 때 암으로 세상을 떠서 만날 수 없었다. 죽은 후 그는 어디에 가 있을까? 하늘 위에, 아니면 그 외 다른 곳에 있을까? 지금 이 순간 엄밀히 말한다면 그는 내 내면 깊숙한 곳에 있다. 그는 내게 영혼의 상태로 감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내게 양가야! 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도 영혼이 없다고, 죽으면 끝이라고 믿는 한국인은 많다. 과학이나 유물론이 아니라 현세적인 유교적 사고 때문이다. 유교는 영혼의 불멸 따위를 인정하지 않고,자손들이 4대 봉사를 한 후면 어디론가 행방불명 되어버린다. 유교는 신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가르치지 않았고, 천당이나 지옥 같은 사후 세계도 마련해 놓지 않았다. 그 때문에, 결론적으로 현세적으로 출세하고, 이름을 날리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여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목표로 삼는 사람들을 양산해 냈다.(어떤 죄의식도 없이) …나는 신의 이름을 붙이지 않지만 신이 내 안에 또는 자연에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진병주 시조 시인의 영혼도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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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문학세계》에 「매직을 훔친 아이」가, 《문학과 창작》에 「리오그란데를 찾아서」가 당선되면서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소설집으로 「장례식에의 초대」, 「로터리에 앉아 있던 새」 해양문고 「우리 바다가 품은 온갖 이야기」, 에세이 <지금은 별을 보며 한걸음 내디딜 때>가 있다. 현재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양산에 거주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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