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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칼로유스 츄를료니스
ⓒ 서진석
리투아니아의 제2의 도시 카우나스에 있는 여러 박물관 중에서 특별히 유명한 것은 뭐니뭐니 해도 악마박물관을 들 수 있다. 한 조각가가 평생을 걸려 수집한 여러 나라의 악마조각들이 모여 있는 이곳은 카우나스에 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번은 들러야하는 장소이다.

그 박물관 맞은 편에 있는 또 하나의 박물관은 바로 츄를료니스 국립박물관이다. 리투아니아의 예술사에 큰 획을 그은 장본인인 미칼로유스 츄를료니스(Mikalojus Ciurlionis)의 회화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곳이다.

한국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사람이니만큼, 우연히 그 박물관을 보았다 하더라도 별 관심 없이 지나치거나, 심지어 그 박물관 근처에는 가지도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츄를료니스의 작품들은 옆 나라 일본에서도 몇 차례 전시회가 열렸을 정도로 국제적인 명성을 자랑하고 있다.

츄를료니스 국립박물관에 전시된 신비주의적인 색채가 강한 그의 그림 속에서 리투아니아의 전통신앙과 그들의 감성, 또 그들의 세계관을 살짝 엿볼 수 있다. 츄를료니스의 작품은 수채화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현재 보관상태가 좋지않아 해외 반송을 삼가고 있어 이곳이 아니면 그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곳이 거의 없다.

츄를료니스를 리투아니아의 화가 정도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의 작품을 전부 감상하고 출구로 나오는 길에 있는 작은 음악실에서는 항상 잔잔한 교향곡이 연주된다. 주로 연주되는 것이 츄를료니스가 작곡한 환상곡인 '바다'나 '숲에서' 같은 관현악곡이다. 리투아니아 사람들에게 츄를료니스는 화가보다 작곡가로 더 알려져 있다. 리투아니아를 대표하는 음악 콩쿨 중에서 그의 이름을 딴 츄를료니스 콩쿨이 있다.

사실 카우나스는 그의 고향이 아니다. 그는 1875년 벨라루시 국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바례나(Varena)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는 리투아니아가 제정 러시아의 공화국으로 존재할 때였고, 리투아니아는 빌뉴스 공화국과 카우나스 공화국 그렇게 둘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의 고향은 카우나스 공화국에 속해 있었다.

츄를료니스의 아버지 콘스탄티나스 츄를료니스는 폴란드 혈통의 음악가로 그 당시에 상당히 알려진 교회 오르간 연주자였다. 그런 음악적 분위기 속에서 츄를료니스는 오르간과 피아노를 가까이 하면서 음악에 대한 관심을 키우게 된다. 츄를료니스가 작곡한 곡 중 상당수가 오르간을 위한 곡이 많은 것이 이런 이유 때문일 수도 있다.

▲ 희생
ⓒ 서진석
츄를료니스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바례나에서 멀지 않은 드루스키닌케이(Druskininkai)라는 도시이다.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버스를 타고 리투아니아로 오는 길에 운전기사의 기분에 따라서 잠시 쉬어갈 수도, 아니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작은 마을이지만, 동유럽 인근국가에서는 유명한 요양원이 많고 아름다운 호수가 자리잡은 호반의 도시로 유명하며, 무엇보다 츄를료니스가 어린 시절을 보낸 지역으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한번 가보면 아무 염려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을만큼 평화로운 곳이다. 도시의 매연도 없고, 신경질나게 하는 소음도 없다. 이런 장점으로 인해 이 도시는 휴식의 메카로 명성을 얻고 있으며, 동유럽의 유명한 문화인들이 여름을 보내던 곳이다. 보기와는 다르게 문화의 도시로서 한몫을 하고 있는 셈이다. 드루스키닌케이에는 츄를료니스가 살던 집이 잘 보전되어 있어, 폴란드에 있는 쇼팽 생가와 비교될 만큼 아름다운 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세계의 여러 천재들이 그러했듯 츄를료니스 역시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대한 비상한 관심과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세 살 때 한번 들은 곡을 다시 연주하고, 일곱 살 때는 그냥 눈으로 보고 악보를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츄를료니스는 그의 아버지 때문에 집에서는 항상 폴란드어로 이야기를 해야 했다. 그 당시는 리투아이나어는 농민들이나 쓰는 저속한 언어로 취급되어, 리투아니아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일부러 폴란드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1863년 리투아니아 전역에서 발생한 반 러시아 봉기에 대한 조치로 리투아니아어 출판금지령이 내려진 상태라서 리투아니아어를 접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츄를료니스의 아버지는 심지어 리투아니아어를 문화어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을 얕잡아보기까지 했다는데 그런 아버지 때문인지 츄를료니스는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폴란드에서 보낸다. 리투아니아 플룽계(Plunge)에 있는 음악학교에서 잠시 공부를 한 바 있지만, 그 학교의 운영을 책임지고 있던 폴란드 출신인 미하우 오긴스키 백작의 후원으로 바르샤바의 음악원에서 수학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바르샤바 음악원에서 합창과 교향악이 융합된 그의 최초의 작품 De Profundis를 발표한다. 누구나 그러하듯 젊은 시절의 첫 사랑의 아픔을 그곳에서 체험한 후, 그는 바르샤바 생활의 종지부를 찍고자 했다. 그 당시에 완성된 그의 작품은 '숲에서'라는 관현악곡으로 리투아니아 현대음악의 커튼을 여는 작품으로 비평가들은 평하고 있다.

그 후 라이프치히로 옮겨 음악공부를 계속했는데, 바르샤바에서 지낸 시간과 비교해 라이프치히에서의 생활은 더 힘들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라이프치히 수학 시절 초기 츄를료니스의 교수였던 살로몬 야다손(Salomon Jadassohn) 사후, 새로 만나게 된 카를 라이네케(Carl Reinecke) 교수는 현재까지 내려오던 전통적인 음악양식을 지나치게 고집하는 나머지 츄를료니스와 심각한 갈등에 빠진다. 츄를료니스 자신도 전통적 음악양식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실험적인 정신의 폭넓은 시도를 보장하는 음악환경을 더욱더 중요시 여겼기 때문이다.

▲ 적막
ⓒ 서진석
엎친데 덮친격으로 그때까지 츄를료니스의 수학을 후원해주던 오긴스키스 백작이 죽고나자 심각한 재정문제에 봉착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바르샤바에서 인맥을 맺었던 음악가 에우게니우스 모랍스키(Eugeniusz Morawski)가 그의 후원자로 나서는데, 공교롭게도 그는 츄를료니스가 첫사랑의 아픔을 경험했던 여인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어찌 되었건 그의 도움으로 그는 라이프치히에서 공부를 무사히 마치고 드루스키닌테이로 돌아오지만, 다시 바르샤바로 가는 여정을 택한다.

바르샤바에서 그는 개인음악교수로 일하면서 생활비를 조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츄를료니스가 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그가 음악을 공부하면서 특별한 계기가 있어서 그림에 손을 대거나 그래서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플룽계에서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 회화에 대한 동경심을 가지고 있었고, 라이프치히에 있는 동안 그림을 그리는 일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비롯한 주변의 많은 만류와 충고가 있었지만, 그림 그리는 일은 그만 두지 못하고 1903년 그의 첫번째 회화인 '숲의 음악'을 완성한다. 그의 회화의 이미지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은 니체나 인도 철학, 타고르 등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회화작품 속에 자신의 음악적 감성을 불어넣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현재 그의 회화작품은 음악적 요소와 회화적 요소를 혼합한 신비적인 작품으로서 많은 평가를 받고 있다.

1864년에 러시아 정부에 의해 내려진 리투아니아어 출판금지령이 1904년 마침내 폐지되자 츄를료니스는 리투아니아의 문화중흥 자체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폴란드의 문화적 환경에서 평생을 보낸 아버지의 반대가 물론 심했다. 그러나 리투아니아의 심장과도 같은 빌뉴스로 거처를 옮겨 요나스 바사나비츄스(Jonas Basanavicius) 같은 리투아니아 문화운동의 선구자들과 더불어 리투아니아 문화의 중흥기를 일구어보고자 노력한다.

그의 작품은 아니지만, 1906년에는 리투아니아 최초의 오페라인 '비루톄'가 무대에 오른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1907년 막이 오른 것이 최초의 리투아니아 예술전시회였고 대성공을 이뤘다. 12명의 예술가들이 그 전시회에 참여했고, 츄를료니스 자신은 33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그 해 봄 리투아니아 순수예술인 연합회가 조직되었고, 츄를료니스는 그곳의 부회장직을 맡는다. 그때부터 츄를료니스의 인기가 상승하여, 그가 가는 곳마다 그를 보고자 하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 즈음 리투아니아에서 작가로 이름을 날리던 소피아 키만타이톄(Sofija Kymantaite)는 츄를료니스의 신비주의적인 분위기에 매료되고, 마침내 두 사람은 연인 사이로 이어졌다. 츄를료니스가 기획한 제2차 리투아니아 예술전시회는 심한 혹평에 부딪쳐 실패로 끝난다.

▲ 진실
ⓒ 서진석
그 후 빌뉴스의 예술환경에 염증을 느끼고, 상트 페테르스부르크, 미국, 아프리카 등을 여행하지만, 끝내 빌뉴스로 돌아오고 만다. 상트 페테르스부르크에서 그는 재정적 문제가 심각하여 거의 포기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나, 우연한 기회에 그의 그림과 음악이 러시아 무대에서 연주되어 러시아에서 명성을 얻는 기회가 되었다.

소피아와의 결혼 이후, 츄를료니스는 아내로부터 리투아니아어를 집중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하며, 사진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계속되는 재정문제와 과로로 츄를료니스는 심각한 우울증에 빠진다. 끝내 드루스키닌케이로 돌아와 요양치료를 받지만, 그의 증세는 갈수록 악화되어만 간다.

비로소 그때에서야 츄를료니스의 명성이 인정을 받기 시작하는데, 러시아 예술가들의 후원으로 츄를료니스의 아내 소피아는 남편의 병간호를 위한 돈을 받게 되고, 빌뉴스와 상트 페테르스부르그에서 츄를료니스 작품의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그 후 잠시 호전되던 기미를 보이던 츄를료니스는 1911년 4월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1910년 5월 그의 딸 다누톄가 태어났지만, 츄를료니스는 죽을 때까지 딸의 얼굴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왜 하나 같이 위인들은 이렇게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야만 했는지…. 츄를료니스는 현재 빌뉴스의 라소스(Rasos)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얼마 전 영국출신의 한 저명한 영화감독이 츄를료니스와 소피아의 사랑이야기를 내용으로 다룬 영화제작계획을 발표하여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의 작품은 특별히 한 미술사조에 포함되지 않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그의 작품에 드러나있는 특성은 신비주의라고 이야기하곤 한다(나는 미술에 특별한 지식이 없어서 이러쿵 저러쿵 말한 자격이 안 된다).

위에서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음악적 분위기를 수채화를 표현한 그의
수채화를 보면 누구라도 신비롭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흔히들 츄를료니스의 음악을 들으면서 그의 미술작품을 감상하면 훨씬 이해가 쉽다고 말을 한다. 예술사적 차원에서 보더라도 음악과 회화에 동시에 종사하면서 두 분야에서 모두 예술적인 가치를 평가 받는 사람은 찾기가 쉽지 않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그림을 그려 전시회를 자주 갖는 가수가 한 명 있다고는 하지만….

놀랍게도 츄를료니스는 문학에도 손을 대보고자 시도를 한 흔적이 있다. 현재까지 그가 쓴 수필과 시 몇 점이 남아 있는데, 이 역시 그냥 취미생활로 한 수준은 아닌 것으로 평가받는다. 하긴 리투아니아의 예술적 환경이 인근국가들에 비해 상당히 열악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서 근대 이후 자신의 예술에 힘을 쏟을 시대, 리투아니아는 자신의 문화적 존립과 독립 그 자체에 혼신을 기울여야 했으므로, 순수예술의 발전을 기대하기엔 상당히 환경이 어려웠다고 볼 수도 있다. 게다가 그 당시 리투아니아가 처해 있던 리투아니아어 출판금지령으로 인해 문학을 비롯한 다른 순수예술분야는 거의 나갈 길이 없던 상황이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알아두어야 할 것은 그런 힘든 상황에서도 당시 리투아니아 사람들의 문자해독율이 전 인구의 70%을 넘어섰다고 하니, 서구의 순수예술이 발전할 당시 리투아니아인들은 자신들만이 풀어야할 또 다른 숙제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

그 리투아니아어 출판금지령이 해제되고 난 후 리투아니아 문화발전의 나침반이 필요한 시기에, 적절하게 리투아니아의 음악과 미술계를 주름잡은 츄를료니스는, 리투아니아 예술계에서 넘보지 못할 기둥으로 우뚝 서있다.

한국 서울에서 츄를료니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날이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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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석 기자는 십수년간 발트3국과 동유럽에 거주하며 소련 독립 이후 동유럽의 약소국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라트비아 리가에 위치한 라트비아 국립대학교 방문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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