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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전통신앙 모습이 가장 잘 나타나있는 것은 바로 그 나라의 축제와 명절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나라의 전통명절은 그 민족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축적한 문화와 역사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현재에까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전 모습을 잃고 싶지 않은 것이 인간의 본능인지, 어느 나라건 간에 그런 명절은 소중히 여기고 있고, 또 그 가운데서 자신들의 원래의 모습을 찾아보고자 그날만큼은 심각한 고민을 해보곤 한다.

유럽인들이 지키고 있는 명절 중에서 대단한 것을 들자면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정도를 들 수 있다. 기독교 문화에서 역사를 이룩한 국가들답게 기독교와의 많은 연관성을 부여받아 발전하고 있지만, 사실 깊숙이 들여다보면 기독교와는 관계 없는 이교도 문화에 뿌리는 두고 있는 축제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동유럽과 북유럽에서 6월23일 하지축제를 즐기는 나라가 많이 있다. 일단 우리보다 위도가 약간 높은, 폴란드로부터 시작해서 북유럽에 이르기까지 지켜지는 축제인 이 날은, 일년 중 가장 해가 긴 날을 기리며 여러 가지 꽃과 식물로 장식하면서 한여름밤을 보내는 방식으로 명절을 즐기는 것은 큰 차이가 없다.

각 나라의 언어적 환경에 따라 불리는 발음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우리말로 구태여 번역하자면 ‘성 요한의 날’로 불리고 있다. 여름과 겨울에 해가 떠있는 시간이 큰 차이를 보이는 북유럽쪽으로 갈수록 이 축제를 즐기는 기간이 길고 폴란드 이남으로 갈수록 이 축제에 대한 관심이 점점 줄어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폴란드의 경우, 이 축제는 그냥 폴란드 문화를 소개하는 책자에 사진이나 나올 정도로 흉내만 내는 식으로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 오고 있을 뿐이지만, 발트3국으로 올라가면 이 성 요한의 날의 축제는 국가적 행사와 연결된다.

리투아니아는 이 날이 공식휴일은 아니고, 단지 전통명절로만 지켜지고 있을 뿐이며, 남부 빌뉴스보다 바다와 가까운 네링가 반도 지역에서 더 활발하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반면 더 북쪽으로 위치한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에서는 공식공휴일로 지정되어 이틀에서 일주일 정도 꽤 긴 시간동안 여름 중 해가 가장 긴 날을 즐기면서 지낸다. 그리고 비교적 기독교 이전 발트인들의 종교와 민속신앙의 모습을 가장 잘 갖추고 있는 행사로 알려져 있다.

라트비아는 6월 23일부터 24일까지 공식적인 공휴일로서 라트비아 전체가 본 축제와 관련된 행사로 북적거린다. 23일은 리고(Ligo)의 날, 다음날은 24일은 성 요한의 날(Janu svetki)로 불리는데, ‘리고’라는 말은 그 축제기간 중 불리는 라트비아 민요의 후렴구에 자주 등장하는 여흥구이다.

에스토니아 역시 그 양일간 공식적인 휴일로 지키고 있지만, 성 요한의 날(Jaanipaev)은 6월24일 하루만 지키고 있다. 6월23일은 공교롭게도 1919년 1차 대전 중에 있었던 에스토니아 독립 전쟁기념일이다. 이번 지면을 통해서는 라트비아에서 지켜지고 있는 성 요한의 날 모습을 소개하고자 한다.

시굴다에 사는 울디스(Uldis)네 집은 6월23일 저녁이 되면 앞마당과 집 전체를 화관(花冠)과 여름에 나는 들풀들로 장식을 하느라 바쁘다. 사람들이 그날 식물들은 특히 ‘’야니의 풀”로 불리며, ‘아이들도(!)’ 맥주를 마실 수 있는 특혜가 주어졌다고 한다.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울디스 어머니는 맥주를 못 마시게 하시니까.

명절이니만큼 집안 곳곳 깨끗이 청소를 하는 것은 두말한 나위가 없다. 울디스네 식구들은 집안에 있는 것들 중 식탁과 의자를 빼고는 전부 밖으로 꺼낸다. 아저씨와 형들은 숲에서 가지고 온 떡갈나무나 자작나무 가지들로 정원과 집들을 장식하며, 그 ‘야니의 풀’들로 가구와 집안 내부를 장식한다.

특히 악한 기운을 몰아내기 위해서 대문 장식에는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다. 악마들이 특히 저녁에 마굿간이나 외양간에 들어가 몰래 우유를 짜가거나, 가축들을 가져가는 수가 있다는 말을 할머니로부터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울디스네 가족들은 현관과 대문에 좀더 관심을 기울여서 예쁘게 장식을 한다. 모든 준비가 끝나면 그 후에는 좋은 옷으로 갈아입고 음식을 차린다.

각 마을에서 그 축제를 주관하는 사람은 야니스(Janis)라고 불린다. 그 야니스는 축제 기간 내내 화관과 떡갈나무 가지로 장식을 하고 다닌다. 성 요한의 날 전날 모으는 그 야니의 풀들은 신비한 힘이 깃들여져 있어서 사람이나 가축의 질병을 치료하는 능력이 있다고 한다.

성 요한의 날 빠질 수 없는 것은 바로 모닥불이다. 그 모닥불은 밤중에 날아드는 모기를 쫓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건강과 풍년을 기원하고 악마를 쫓는다는 의미로서 언덕 가장 높은 곳에 23일 저녁에 점화되어, 다음 날 해가 뜨는 시간까지 성 요한의 날 밤을 밝히게 된다.

시굴다에는 언덕이 많아서 꼭대기에 불을 지피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다른 도시에 사는 친구들은 마을에 적당한 언덕이 없어서 높은 장대 위에 타르를 채워놓고 불을 밝힌다. 이 날 밤에는 여러 신들이 밤에 나와 돌아다니기 때문에, 사람의 운명을 결정해 주는 라이마(Laima) 같은 신들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이날 불리는 민요도 아주 많다. 이 날을 기념하여 불리는 노래 중 울디스가 알고 있는 노래만도 전부 60에서 70가지 정도가 있지만, 지역에 따라 가사가 많이 차이가 있으므로, 전체를 따져보면 수백 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이전에 말한 바대로 이날 불리는 노래들은 전부 ligo(라트비아어로 하면 ‘리구오’로 들린다)라는 여흥구가 붙는다.

할머니께서는 그 말은 별 의미는 없지만 굳이 말하자면 ‘즐겁다’라는 뜻이라고 하신다. 리고 리고 하면서 부르는 이 노래로부터 축제의 첫째날인 ‘리고의 날(Ligo Svetki)’의 명칭이 나온 것 같다.

발트인들에게 떡갈나무는 영혼과 사람이 만나는 장소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나무로, 신성시 되는 존재이다. 울디스가 알고 있는 라트비아의 전설이나 민담에도 떡갈나무가 참 자주 나온다.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 발트민족의 제사장들은 이 떡갈나무 앞에서 제사를 지내는 일도 있었다고 들은 적도 있다. 지금은 그런 모습을 전혀 볼 수가 없다. 그냥 책에서 보고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다.

이 성 요한의 날을 가장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해가 진 후 그날 하루만 꽃이 핀다는 ‘파파르데(paparde)’라고 불리는 식물의 꽃을 찾아 숲으로 나서는 것이다. 울디스가 알기로 이 것은 고사리 비슷한 식물이다.

고사리류 식물은 꽃이 피지 않지만, 아버지가 해주신 말씀에 의하면 이 꽃은 눈부시게 흰 빛깔을 띠고 있다고 한다. 성 요한의 날 밤 누구건 이 꽃을 찾는 사람은 그 해 내내 건강과 행복을 누릴 수 있고, 동물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이 생긴다는 말도 들었다. 울디스가 들은 전설에는 이 꽃을 찾은 사람이 정말 있긴 있다.

동네 형들과 아저씨들은 맥주를 거나하게 마시고 정신이 알딸딸해지면, 불꽃 뛰어넘기를 시작한다. 이것은 이전에 제사장들이 제사 중 모닥불을 뛰어넘곤 하던 전통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는데, 요즘은 그런 전통보다 술김에 하는 일로 바뀌었다고 들었다. 참 위험해 보이긴 하지만, 불꽃을 뛰어넘는 모습이 참 멋있다.

울디스가 이야기해 준 식으로 밤새 피지도 않는 꽃을 찾아다니고 술을 마시고 모닥불을 뛰어넘고 하는 일을 해야하므로 축제가 이틀동안 이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전반적으로 3월 들어 출생율이 상당히 올라간다는 통계도 그리 놀라운 사실만은 아니다.

성 요한의 날이 아니더라도 발트인들에게 부활절과 성탄절 역시 큰 의미를 가진다. 그들에게 부활절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그 사실을 기리는 날이 아니라, 겨울이 지나고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을 기념하는 축제의 기간이라고 말한다. 그 해 농사를 시작하는 기간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명절이라고 할 수 있다.

가을을 맞아 즐기는 명절로는 미켈리(Mikeli)의 날이 있는데, 이 날은 추수가 끝난 추분에 지내는 명절이다. 이 날의 특별한 행사로는 ‘유미스(Jumis)’ 만들기라는 것이 있는데, 유미스는 토양의 비옥함과 풍년을 좌우하는 신의 이름이기도 하고, 한 줄기에서 자라는 두 이삭을 의미하는 단어이기도 하며, 라트비아 농촌가옥 지붕에 주로 사용하는 장식의 이름이기도 하다.

추수가 끝나고 나면 유미스로 사용될 곡식들은 자르지 않고 이삭들을 묶어서 돌을 달아서 땅으로 처지도록 해놓는다. 그리고는 그 이삭들을 문질러낸 다음 밭 여기저기에 뿌리는데, 그 해 추수의 기운과 그 정신이 다시 땅 속으로 들어가 씨를 새로이 뿌릴 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의미가 있다.

발트3국 역시 크리스마스를 지키지만, 예수의 탄생을 기리는 날 이전에, 태양신의 탄생과 관련된 날로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부활절과 성탄절에 종교적인 의미를 상당히 부여하여 지내는 옆 나라 폴란드와 비교해 보면, 발트인들의 부활절과 성탄절은 기독교보다는 이교도적인 냄새가 더 강하게 나는 명절이다. 유럽문화의 근간을 이룬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인물인 예수의 탄생과 부활의 정확한 일자는 지금까지 아무것도 확실히 알려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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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석 기자는 십수년간 발트3국과 동유럽에 거주하며 소련 독립 이후 동유럽의 약소국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라트비아 리가에 위치한 라트비아 국립대학교 방문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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