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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3국으로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특산물은 뭐니뭐니해도 호박이다. 삶아먹거나 전을 부쳐 먹는 그런 호박이 아니라, 나무의 송진이 수 천만년의 세월을 거쳐 돌이 되어 굳어진 것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강도와 질 면에서 보석과는 다르지만, 그와 비슷한 정도로 쳐주는 그런 광석이다.

갑작스런 지각변동으로 인해 나무들이 땅 속으로 꺼져들어갈 때 미쳐 빠져나오지 못한 가엾은 벌레와 거미들이 예전 모습 그대로 송진 속에서 굳어져서 발견되기도 한다. 쥬라기 공원이라는 영화에서 난데없는 커다란 공룡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한 것도 바로 이 호박 속에 들어있던 모기이다.

유럽 전반적으로 우리나라보다야 호박이 더 흔한 탓인지, 꼭 발트3국이 아니더라도 호박으로 만든 공예품을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칼리닌그라드 등 발트3국이 접한 해안가에서 전세계 70% 이상의 호박이 채취되므로, 이 지역이 호박의 원산지라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 이유로 가격면에서도 다른 나라들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그러나 그 발트3국에서 그 저렴한 가격의 호박을 선뜻 구입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이유는, 그 디자인과 수공상태 때문이다. 일단 한국인들이 흔히 기대하는 정교하고 화려한 디자인의 호박제품은 정작 구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호박이 전통적으로 많이 나는 곳이므로 부유한 이들만이 쓰는 장식품이 아니라, 민중들이 전통의상에 쓰던 장식품의 하나로 사용되어왔기 때문에 상당히 투박하고 '서민적'인 냄새가 나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외국인들의 입맛에 맞추어 화려하게 만들어진 호박제품을 판매하는 곳이 적지 않게 생기고 있지만, 가격면에서 보면 그 역시 만만치 않다.

이 발트지역에 호박이 유독 많이 발견되는 이유는 과거 몇 백만년 이 지역이 전부 울창한 숲지대였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사실을 알고 보면 다른 이유가 숨어있다.

옛날 옛적, 바다 밑 호박으로 만들어진 궁전에 유라톄(Jurate)라는 여신이 살고 있었다. 그의 일생은 정말 행복 그 자체였으며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하루는 유라톄가 물결을 만들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카스티티스(Kastytis)라는 젊은 어부가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는 것을 보았다. 유라톄는 그를 보기 위해 그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갔고, 그 인간의 아들인 아름다운 어부를 보고 한눈에 사랑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신 중의 신인 페르쿠나스(Perkunas)는 그 유라톄가 인간의 아들과 사랑에 빠진 것을 못내 못마땅해 했다. 그래서 그는 하늘에서 벼락을 던져 유라톄의 궁전을 산산조각 내버리고 말았다.

아직도 밤이면 바닷가에서 그 아픔에 울부짖고 있는 유라톄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리고 파도의 물결은 유라톄가 살던 궁전의 조각들을 해변가로 계속 날라다 주고 있다. (리투아니아에서 내려오는 전설 중 하나)

발트해안의 호박들은 파도가 우리에게 날라다 주는 유라톄가 살던 궁전의 조각들이라는 말이다. 그 유라톄 궁전의 조각들은 발트인들의 민속문화 속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요소로서 민속의상, 공예품, 예술작품 등에 남아 내려오고 있다.

그 호박만큼 그들의 문화 속에서 살아숨쉬고 내려오는 것으로는, 바로 유라톄의 전설 같은 전통신앙과 신화이다. 지구상 어디에서곤 자신들의 전통신앙의 영향이 남아있지 않은 나라는 전혀 없다. 기독교는 물론이거니와 불교를 근간으로 문화적 바탕을 이룬 민족들도 자신의 전통신앙의 여러 요소를 종합하여 독특한 형태의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우리나라의 불교도 정통불교의 모습 외에 전통적인 샤머니즘의 모습을 많이 차용했고, 기독교 역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신봉하는 기복신앙, 물질만능주의, 양적팽창우선주의 등 한국의 토양에서 자라나는 여러 가지 요소들과 섞여서 발전하고 있지 있지 않은가. 하긴 우리나라의 기독교문화는 우리의 모습을 철저히 무시한채 미국과 유럽의 모습만 답습하는 것 같은 느낌이 있긴 하다.

유럽의 경우, 알바니아 등 남부 유럽의 회교국들을 제외하고는 전부 기독교적 문화배경 위해서 역사를 일구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각국의 독특한 문화적 배경 위에서 여러 전통적 요소를 차용했다 하더라도, 유럽 문화의 근간은 기독교이다. 그러나 발트3국을 다녀온 사람들, 그리고 관광지만이 아니라 그들의 문화와 생활환경을 좀 깊게 느끼고 온 사람들은 그들의 문화적 배경 속에는 기독교 외에 뭔가 다른 것이 숨어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이전에 몇 번 이야기한 바 있지만, 발트3국에 있어서 기독교는 침략자들이 가지고 온 외국의 정치적 권력, 즉 이데올로기였기 때문에 기독교를 받아들이는데 상당히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 후 공식적으로 리투아니아는 로마카톨릭,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는 루터교로, 다시 말해 기독교화하는데는 성공했지만, 그들의 정신 속에는 아직도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전 그 당시의 신들과 신앙이 많이 남아있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신'에 대한 관점이다. 기독교를 바탕으로 문화를 이룩한 유럽문화에서 '신'이란 바로 기독교의 유일신을 의미하는 것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누가 폴란드의 거리에서 '아이구, 하느님'이라는 말을 했을 경우, 그것은 바로 기독교의 유일신을 말하는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요즘 들어 일부러 '주여' 하고 말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지만 말이다.

이런 상황은 발트3국에서도 비슷하다. 발트3국의 거리에서 들리는 '아이구, 하느님'하는 말 속의 신은 꼭 기독교의 유일신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란 이야기이다. 다시 말하지만 발트3국의 공식적인 종교는 루터교와 로마 카톨릭이다. 그럼, 그들의 염두에 두고 있는 다른 신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가장 전통신앙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은 발트인들의 전설, 동화, 그들의 노래와 전통장신구 등이다. 발트인들의 가옥과 지붕 등에서 얼핏 얼핏 보이는 문양들은, 전부 기독교가 아닌 전통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상징들이다. 본인은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수도나 대도시가 아닌 시골이나 중소도시에 있는 성당을 방문했을 경우, 찬송가를 부르는 모습이나 예배의 모습이 상당히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이전에 모습을 닮았다고 한다.

그들의 문화적 배경 중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발트 신화 속에 나오는 신들은 그리스 신화와 많이 닮았다. 신들마다 그 역할이 정해져 있고, 그 지위도 차이가 있어서, 나르부타스(Narbutas)라는 리투아니아 출신의 민속학자는 그 서열을 그리스 로마 신화와 연결지어 분석하려 했다가 학계의 호된 비판을 당한 적이 있다. 어쨋든 그는 아직도 발트민속연구분야에서 상당히 쳐주는 학자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와 좀 다른 점은 신화 속에서 여성의 비중이 상당하다는 것이다.

보통 태양은 남성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지만,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에서는 그 태양이 '여성'으로 간주되고 있다. 물론 리투아니아어, 라트비아어에는 우리나라에는 없는 남성명사, 여성명사의 구분이 있고, 태양을 의미하는 단어가 특별히 여성명사이긴 하지만, 그 이전에 현지인들에게 태양은 어머니로 불린다.

농업을 중시하는 그들의 풍속에서 농작물의 성장과 수확에 영향을 미치는 자연은 바로 어머니와 같으므로, 그들의 민요나 전설 속에서 태양은 종종 어머니와 같은 모습으로 묘사되곤 한다. 그러므로 그 식물의 성장과 자연의 법칙에 관련된 신들이 많다.

일단 '신'이라고 불리는 존재는 기독교의 유일신이 아니라, 이 세상을 창조한 그 초자연적인 힘을 일컫는 것이다. 세계를 다스리고 운명을 지배하는 하늘과 땅의 지배자이다.

그 신이라는 존재 밑으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신은 바로, 유라톄의 궁전을 부순 그 페르쿠나스이다. 그 페르쿠나스는 천둥과 번개를 주관하는 신으로, 리투아니아에서는 perkunas(페르쿠나스), 라트비아에서는 perkons(페르콘스)로 불린다. 농업에서 비의 존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 천둥의 신은 사람들에 벌을 내리고 심판하는 존재로서 민화와 속담에서 자주 회자되고 있다.

빌뉴스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대성당광장, 그곳에 베이직으로 빛나는 으리으리한 성당이 있는 자리는 이교도 시절 그 페르쿠나스에게 제사를 지내던 자리라고 하는데, 그 뒤편으로 자리잡은 게디미나스 언덕에서는 그 당시 이교도시절의 제사를 재현하는 행사가 자주 열린다.

천둥의 신 외에도 불을 주관하는 가비야(Gabija), 출생과 죽음을 주관하는 라이메, 혹은 라이마(Laime, Laima)와 죽음을 주관하는 길티녜(Giltine) 등도 자주 등장한다. 라이몌라는 여신이 리투아니아인들의 정신문화 속에서 차지하는 영향은 이전기사에서 한번 소개한바 있다.
그 외에도 바람의 신, 수확의 신, 자유의 신, 그리고 다양한 마녀 등등 발트3국은 신들의 나라라도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다양한 신이 살아있는 곳이다.

이곳에 주로 예를 든 신들의 이름은 리투아니아에서 온 것들이 많지만, 라트비아에서도 그 공통점을 많이 발견할 수 있으며, 에스토니아에서도 그 이름은 많이 달라졌지만 신들의 모습은 다른 지역과 상당히 비슷하다.

샤머니즘, 토테미즘, 자연숭배 그런 것들은 인간이 사는 곳이면 전부 만날 수 있는 현상이건만 무엇이 그리도 재밌다고 이런데 기사로 쓰노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인간의 기본적인 공포와 기쁨, 감정을 가장 먼저 체험한 장본인들이 원시인들이라면, 우리가 슬픔과 기쁨을 표현하는 본능적인 방법과 그것에 관련된 문화적 요소들 역시 수만 년전의 원시인들의 체험한 것과 일맥상통할 수도 있다.

그런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고 솔직한 원시적인 신앙의 모습을 부정하고 '우린 그런 거 모르오' 하고 고개를 내두르는 사람들하고, '우린 이런 원시적인 문화가 아직도 우리의 모습 속에 살아숨쉬고 있다오' 하고 솔직히 고백하는 사람들 중에서 누가 더 정직하다고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종교적 배경이 다르고, 신봉하는 종교가 다를지언정 속을 들여다 보면, 전부다 그 나물에 그 밥을 먹는 사람들 아닌가.

앞으로 발트인들이 솔직히 고백하는 그들의 문화 속의 전통신앙의 모습을 잠시 엿보여 주고자 한다.

덧붙이는 글 | 올해 5월을 기해 리투아니아에서 무비자로 체류할 수 있는 기간이 3개월로 연장된 것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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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석 기자는 십수년간 발트3국과 동유럽에 거주하며 소련 독립 이후 동유럽의 약소국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라트비아 리가에 위치한 라트비아 국립대학교 방문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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