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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 흘렀지만 방 곳곳엔 성호의 손때가 묻어 있었다. 성호가 쓰던 책과 가방, 교복은 물론이고 엄마에게 선물하려고 직접 만든 머리핀, 손수 그린 만화책, 열심히 치던 피아노, 군것질하는 날까지 꼼꼼히 기록해 둔 겨울방학 계획표, 그리고 책상 한구속에 꾹꾹 눌러쓴 낙서까지.
엄마 소영씨는 아들의 흔적을 그대로 두었다. 벽에는 함께 찍은 사진과 아들을 떠올리며 만든 꽃누르미 작품(압화)을 여럿 걸어뒀다. "세월호 참사를 겪은 후 저는 꽃누르미 활동을, 남편은 목공을 하고 있는데 성호도 손으로 뭔가 만드는 걸 잘하고 좋아했어요"라고 말하는 엄마의 얼굴에 연한 미소가 서렸다. 10년 전 엄마는 세월호 참사로 아들을 잃었다.
"그날 이후 성호 방을 사용하지 않으면 성호의 흔적이 없어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지금은 마음이 가장 편안해지는 공간이죠. 여기에 들어오면 성호랑 같이 있는 느낌이예요. 저도 모르게 항상 이곳에 성호가 있다고 생각해 그런 것 같아요. 이곳에서 공부도 하고, 불면증이 있을 때 가끔 여기서 자면 잘 자곤 해요.
1주기, 2주기, 3주기... 그리고 10주기. 저는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아요. 늘 4월 16일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요. 그날이 반복되는 느낌이에요. 성호도 늘 열여덟살 그때 그 모습으로 생각나고 지금 (살아 있다면) 시간이 흘러 나이를 먹었을 모습도 상상할 수 없어요. 매년 4월 15일까진 괜찮다가 16일만 되면 성호가 없다는 게 실감이 나요." - 엄소영(고 최성호 학생 어머니)씨
엄마는 다시 한 번 잔인한 4월을 마주한다. 그 사이 발생했던 또 다른 참사들도 떠올린다. "참담하지만 할 수 있는 게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뿐"이라는 그는 "시민들의 기억이 계속 연결될 것이라 믿는다"라고 말했다.
봄 햇살을 닮은 학생들 웃음소리 사이로 세월호 참사의 흔적들이 눈에 띄었다. 단원고등학교로 향하는 평범했던 등굣길은 참사 후 '소중한 생명길 : 학교 가는 길'이란 이름을 얻게 됐다.
10주기를 앞두고 2024년 3월 18일 찾은 학교 입구 교명 표지판엔 누군가 그린 노란 리본이 자리하고 있었다. 분리수거장과 본관 복도에는 노란 리본을 단 채 환하게 웃고 있는, 그리고 어깨동무를 한 학생들의 모습이 벽화로 새겨져 있었다.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문구가 붙은 도서관에선 '세월호 특별서가'가 눈에 띄었다. 학교 내 개방형 공간인 시나브로(사회적 협동조합) 2층의 나무엔 세월호 유가족부터 마을주민까지 다양한 이들이 남긴 추모 메시지로 가득했다.
"권순범, 단원고에 왔어. 보고 있니? 보고 싶다."
"동수야, 엄마 학교에 왔다. 너의 이쁜 기억, 추억 잘 보고 간직하고 갈게. 사랑한다."
"단원고만큼은 세월호를 꼭 기억해 주길."
점심시간이 되자 여느 고등학교처럼 누군 서로 팔짱을 낀 채 웃음꽃 가득한 수다를 떨었고, 누군 교복 조끼를 벗어 던진 채 공을 차기 시작했다. 그러한 풍경 뒤로 고래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단원고 희생자 261명을 등에 지고 하늘로 오르는 노란 고래였다. 이곳에서 10년 전 숨진 이들과 같은 교복을 입은 두 학생을 만났다. 학생회장·부회장을 맡고 있는 탁지훈·문형찬 학생이었다. 이들은 입을 모아 "단원고 학생이 된 지금, 세월호 참사가 오랫동안 잊히지 않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국가가 안전을 위해 힘써줬으면 합니다. 그리고 10년간 싸워온 유가족 분들에게 존경을 표하고 싶습니다. 올해 10주기인 만큼 저 또한 단원고 학생으로서 더 기억하고 추모하겠습니다." - 탁지훈 학생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학교가 학생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곳이 됐으면 합니다." - 문형찬 학생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거였다. 참사 후 3년 가까이 바닷속에 있어야 했던 세월호는 참사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근혜가 탄핵된 후 바뀐 정부에서 곧장 뭍 위로 올라왔다.
녹슨 세월호는 지금도 목포신항만에 누워있다. 세월호가 인영되고 목포 시민들은 '목포4.16공감단'을 만들었다. 참사 10주기를 앞둔 2024년 3월 12일 김영미 목포4.16공감단장을 만났다. 김 단장은 "세월호"라는 단어만 말해도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김 단장을 비롯한 단원들은 세월호 인양 전후로 긴 기간 동안 유가족·미수습자 가족을 도왔다. 단원들은 인파로 인해 텐트 밖으로 나오지 못한 그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했고, 이불을 가져다줬다. 또 노란 리본을 만들어 방문객에게 전하기도 했다.
지금도 단원들은 명절이 되면 세월호 앞에서 희생자들을 위해 차례상을 차린다. 또 매달 셋째 주 토요일에도 이곳을 찾아 노란 리본을 만들고 방문객에게 차를 내어준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 빨리 갔는지도 모르겠어요. 저희는 지금도 세월호 유가족들과 소통하며 안부를 물어요. 그런데 최근엔 몸이 아픈 유가족이 많아서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진상규명 되는 그날까지 세월호 어머니, 아버지들과 함께 할 거예요." - 단원 김애숙씨
목포신항만을 둘러싼 펜스엔 노란 리본이 가득하다. 녹슨 세월호처럼 그 노란 리본들도 빛이 바랬지만, 거센 바람 속에서 굳건히 버티고 있다.
대학로 예술인들은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마로니에 촛불'을 만들었다. 참사 당일 알음알음 슬픔을 공유하던 그들은 일주일 뒤 모여 참사를 기억하기 위해 꾸준히 모이기로 다짐했다.
마로니에 촛불은 매주 토요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 있는 마로니에 공연에 모여 추모 문화제를 열어 참사를 연극으로, 노래로 표현하고 알렸다. 최근부턴 길을 지나는 시민들에게 노란 리본을 나누고 있다.
참사 10주기를 앞두고 2024년 3월 23일 찾은 마로니에 공원엔 어김없이 이들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오후 7시가 되자 익숙하게 테이블을 펼치고 노란 리본과 배지를 줄지어 놓았다. 2년 전 이태원 참사 이후부턴 보라색 리본도 함께 나누고 있다. 활동가들이 "다음 달이면 세월호 10주기가 됩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이자, 여러 시민이 발걸음을 멈추고 리본을 집어 갔다. 누구 하나 부탁하지 않았지만 천 원짜리, 만 원짜리 지폐를 두고 가는 시민도 있었다. 마로니에 촛불은 그 후원금으로 다시 리본을 만들고 문화제를 준비한다.
"세월호 참사를 목도한 많은 시민들이 아팠을 겁니다. 통증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겠죠. 그렇지만 유가족이든, 시민이든, 누가 됐든 우리는 사회에 '왜 그랬냐'고 질문해야 합니다. 질문하는 걸 그만두면 사회가 더 안 좋아질 테니까요. 지난 10년간 변하지 않은 듯하지만 우리가 던지는 질문들은 그전보다 더 구체화 됐다고 생각해요. 저희는 세월호 유가족 분들이 '이제는 그만해도 되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할 때까지 함께 활동할 겁니다."
- 안계섭 마로니에 촛불 활동가(민중가수)
진도 끝자락에 있는 팽목항(현 진도항)은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맹골수도와 가장 가까운 항구다. 참사 당시 이곳은 한시라도 빨리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려는 이들로 가득했다. 얼마 후엔 꺼진 생명이라도 하루빨리 만나고 싶은 장소가 됐고, 더 시간이 지나선 기다림이 일상이 된 공간이 되고 말았다.
진도항으로 이름이 바뀐 이곳에서 '팽목기억관'은 세월호 참사의 기억을 단단히 붙들고 있다. 참사 10주기를 앞둔 2024년 3월 13일, 컨테이너박스로 된 기억관 미닫이문을 열자 향냄새 사이로 희생자들의 사진이 보였다. 방명록엔 전국에서 온 추모객의 메시지가 빼곡히 담겨 있었다.
몇 해 전부터 단원고 희생자 부모들은 매주 두 명씩 짝을 지어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이곳을 지킨다. 이날 민지 아빠 김내근씨와 은지 아빠 한홍덕씨를 만났다. 두 아버지는 "아이들을 맞이했던 중요한 공간을 지키기 위해, 진도군에 참사를 기억할 수 있는 공간 마련을 요구하기 위해 팽목에 있다"고 했다. 누군가 찾아와 참사에 관해 물으면 커피나 과일, 식사를 내어주며 참사에 대해 설명해 주는 게 이들에게 일상이 됐다.
"벌써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어요. 저희가 가는 길을 지지하고 동참해 주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지만, 일상을 살아가면서 세월호 참사와 멀어지신 분들도 꽤 많죠. 그런 분들에게 '지금도 세월호 가족들이 이렇게 싸우고 있다'는 소식을 알리고, 또 그분들이 저희 소식을 들으며 다시 한번 참사를 생각할 수 있길 바라요." - 김내근(고 김민지 학생 아버지)
"팽목항을 지키다 보면 가끔씩 '세월호 참사 아직도 안 끝났나요?'라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계셔요. 그런 분들에게 '아직 안 끝났다'고 설명해드리면 '아직 침몰 원인도 모르는 거네요', '수고하십니다'라는 격려와 응원이 돌아오기도 해요. 그럴 때마다 정말 고마워요." - 한홍덕(고 한은지 학생 아버지)
양승진, 박육근, 유니나, 전수영, 김초원, 이해봉, 이지혜, 김응현, 최혜정, 고창석. 대전 현충원에 안장된 순직교사 10명이다. "2014년 4월 16일 전남 진도 순직"이라고 적힌 모든 묘비 묘비엔 "세월호 침몰시 안산 단원고 2학년 제자들을 구하던 중 순직"이란 글귀가 담겨 있다. (순직 인정된 단원고 교사는 모두 11명인데, 고 남윤철 교사는 가족의 뜻에 따라 충북 청주 가족묘지에 안장)
고 김관홍 잠수사는 벽제중앙추모공원에 안치돼 있다. 유골함 주변엔 가족과 환하게 웃고 있는 그의 사진, 노란 리본, 그리고 '김관홍법(4·16 세월호 참사 피해구제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 개정안)' 전문을 축소한 모형이 자리잡고 있었다.
2024년 3월 17일, 동료 황병주 잠수사가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앞두고 이곳을 찾았다. 김 잠수사와 함께 바닷속 세월호를 수없이 드나들었던 그는 손수 준비한 꽃을 고인에게 건네며 눈물을 흘렸다.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1차 청문회 증인으로 나서 적극 발언하는 등 진상규명에 힘썼던 김 잠수사는 트라우마와 후유증에 시달리다 2016년 6월 17일 세상을 등졌다. 황 잠수사 역시 생전 김 잠수사가 마주했던 고통을 여전히 겪는 중이다. 3월 12일 <오마이뉴스>와 통화한 김상우 잠수사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잠수사 일을 아예 그만뒀다.
그럼에도 살아남은 두 사람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에 대해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고 있다. 또한 많은 이들의 기억이 이어지길 원한다.
"세월호 참사 이야기를 끄집어낼 때면 매번 힘들죠. (언론과 인터뷰를 한) 어떤 날은 (일을 미처 끝마치지 못하고) 일찍 들어가야 했어요. 그렇다고 이야길 안 할 순 없습니다. 제 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진실이 감춰지는 걸 느꼈습니다. 우리가 계속 관심을 갖고 절대로 잊지 않아야 앞으로 조금이나마 참사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 황병주 잠수사
"세월호 참사는 교통사고가 아닙니다. 현재 조타수 운전 미숙이나 (선체 불법) 증축 등은 밝혀졌지만 정확한 침몰 원인은 모르는 상황입니다. 결국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고 (정부가) 꼬리만 자르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한 결과 이태원 참사까지 벌어진 것 아닙니까. 참사는 여야를 따질 사안이 아닙니다. 모두가 국민 안전을 위해 노력하면 되는 일입니다. 국민들께서도 잘못된 걸 바로잡을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합니다." - 김상우 잠수사
"일반 시민들은 세월호 유가족 하면 단원고 유가족을 떠올려요. '나머지 유가족은 누가 있어?' 이런 분위기죠. (10년이 지난) 지금 진정성을 갖고 활동하는 분들이 남아 계셔요. 그 중 한 어머니는 일반인 유가족에 대해 알고 난 이후 추모관에 오셔서 저희와 많이 협업했어요. 처음 만났을 때 아이였던 자녀가 지금은 군대에 갈 정도로 컸더라고요."
진태호 세월호 일반인 유가족협의회 위원장
2024년 3월 15일 오후 1시 30분께 꽃샘추위를 뚫고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알리는 노란물결이 안산 하늘공원 묘역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잊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함께 하겠습니다"라고 적힌 노란 조끼, 모자, 스카프, 그리고 우산이 가득한 행렬이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뿐만 아니라, 10대 청소년, 2030 청년, 중장년층 등이 한 데 섞여 있던 이들은 "(정부는) 화랑유원지에 즉각 4.16 생명 안전공원을 건립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중 한 명이었던 유가족 김정해(고 안주현 학생 어머니)씨는 하늘공원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아이들이 많이 있는 곳"이라고 이 장소를 소개했다. 이곳엔 304명의 세월호 참사 희생자 중 단원고 학생 100여 명이 안치돼 있다. 김씨는 "아이들이 보고 싶을 때 와서 그나마 슬픔과 그리움을 녹여내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김씨는 지난 10년의 세월을 떠올리며 "국회부터 광화문까지 곳곳에서 노숙 농성을 하며 (유가족들끼리) '많게는 집이 10개나 있다'고 얘기도 할 정도였다"고 떠올렸다.
"10년 정도 싸웠으면 됐다고 얘기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편견을 버려줬으면 좋겠어요. 저희가 왜 촛불을 들었을까요. 광장에 모인 국민들이 원했던 건 세월호를 계기로 세상이 바뀌는 것이었습니다. 광주(5.18민주화운동)도 30년 이상 걸린 것처럼 우리도 그 이상 간다는 굳은 각오를 다졌어요. 앞으로 마주할 10년의 시간, 그 이상의 시간을 소중히 여겨 함께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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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안산 단원구에 있는 명성교회 별관에는 특별한 옥상정원이 있다. 이곳에서는 매일 오후 4시 16분마다 세월호 참사 추모곡 <천개의 바람이 되어>가 흘러나온다. 명성교회는 세월호 참사 당시 단원고 희생 학생 일부가 다녔던 교회다.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들을 추모하는 교인·시민들은 단원고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이곳에서 잠시 추모의 마음을 전하고 간다.
'나의 사진 앞에서 울지 마요 / 나는 그곳에 없어요 / 나는 잠들어 있지 않아요 / 제발 날 위해 울지 말아요 / 나는 천개의 바람 / 천개의 바람이 되었죠 / 저 넓은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날고 있죠' - <천개의 바람이 되어> 中
취재 : 소중한 김화빈 박수림 복건우
사진 : 이정민 / 연합뉴스 X Adobe Firefly
기사 제목은 세월호 참사를 상징하는 노란리본을 모티프로 디자인된 사월십육일체로 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