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28일 서울의 한 영화관에 걸린 '암살자(들)' 홍보물
연합뉴스
영화 <암살자(들)> 관련 정치권 공방이 더욱 가열되는 양상입니다. 연일 새로운 뉴스가 나옵니다. 영화 무대 인사 축소나 행사 취소는 물론이고, 출연 배우 집앞에 찾아가 집회를 열겠다는 사람도 등장했습니다.
지난 9월 23일 개봉한 영화는 1974년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육영수 여사가 피격당한 사건을 소재로 합니다. 암살범으로 지목된 문태광(박정민)의 배후에 중앙정보부가 개입했을 가능성을 경찰과 기자의 시선으로 따라갑니다. 권력기관의 개입 가능성을 극적 가설로 다룬 작품입니다.
극영화로서 이같은 구성은 할리우드나 유럽에서도 익숙한 변주에 해당합니다. 자주 언급되는 영화가 올리버 스톤 감독의 <JFK>(1992) 등입니다. 존 F 케네디나 링컨 대통령, 워터게이트 사건 등 굵직한 미국 현대사가 영화적 상상력과 만나 극화된 사례가 여럿입니다.
물론 문제작일수록 논란이 됐던 것도 사실입니다. <암살자(들)> 경우엔 역사 왜곡 논란으로 불붙었는데요. 보수야권 및 일부 인사들이 연출자인 허진호 감독 등을 고발하거나 국정감사에 소환하겠다는 등 강공을 펼치고 있습니다.
아무도 확인하지 않은 인용 보도
이 가운데 조선일보 등 보수성향 언론들의 행보가 흥미롭습니다. 조선일보는 영화 개봉 직후 10일간 관련 기사만 20여 건(계열사 제외)을 쏟아 냈습니다.
현재까지 조선일보가 낸 기사를 보면 허진호 감독의 해명성 인터뷰, 정치권의 역사 왜곡 주장을 뒷받침하는 검증 보도, 영화 관련 고발 및 행사 취소 소식 등입니다. 특히 9월 28일자 '
[단독] '암살자(들)' 허진호 감독 "박정희 대통령의 피격 자작극? 합리적으로 불가능한 주장"' 기사를 보면 허 감독은 인터뷰 내내 "박 대통령이 육 여사 피격을 지시했다는 내용은 영화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취지로 답했습니다.
허 감독에게 한 질문 자체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기자는 "2002년 5월 박근혜 당시 의원이 방북했을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하급자들이 관련된 것이라며 사실상 사과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 부분은 왜 다루지 않았나"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허 감독은 "박 의원이 측근을 통해 '1·21 청와대 습격 사건(소위 김신조 사건)에 대한 사과를 받기는 했으나 어머니 사건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없다'고 부인한 기록이 나온다"고 답했는데요.
하지만 이 질문 자체는 사실 확인이 필요한 내용을 전제로 삼고 있습니다. 보수진영이 "북에서 육 여사 피격 사건기획을 인정하고 사과한 걸 영화가 부정하고 있다"는 논리를 뒷받침하는 기사들을 살펴보겠습니다.
2002년 9월 13일 연합뉴스 기사 '
김 국방위원장, 박정희 前대통령 암살 기도 사과'는 일본 지지통신이 베이징 소식통이라고만 할 뿐 출처나 근거를 명확히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보도에 대해 박근혜 측은 다음날인 9월 14일 한국일보를 통해 "1·21 청와대 습격 사건에 대한 사과를 받기는 했으나 어머니 (육영수 여사) 사건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없다"며 "회동 내용 공개 문제에 대해 정부 당국과 상의한 바도 없다"고 부인한 바 있습니다(관련기사 :
'김정일, 74년 박정희 암살기도 사과/日언론 5월 박근혜 방북때' )
기사 하나를 더 살펴보겠습니다. 2002년 5월 6일자 연합뉴스 기사 '
박근혜 위원장 방북기- 2'를 보면 당시 박근혜는 "일부에서 '아웅산 테러, 문세광 사건 등에 대해 북한의 사과를 받지 않고 김 위원장 말만 듣고 왔다'고 하는 말도 들린다. 그러나 나의 방북은 사과받으러 간 것이 아니다"라고 쓴 바 있습니다. 조선일보나 보수진영의 주장과는 사뭇 다른 대목입니다.
물론 2020년 9월 25일자 연합뉴스의 '
김정은 "대단히 미안" 대남 공개사과…북 최고지도자로선 파격적' 제목의 기사를 보면 문세광 사건에 대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과한 것처럼 돼 있긴 합니다. 하지만 해당 기사를 작성한 기자에게 확인결과, 앞서 언급한 2002년 9월 13일 연합뉴스 특파원이 쓴 기사를 참고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조선일보는 허 감독과의 인터뷰에서 "'암살자(들)'이 북한의 1990년대 선전 영화 판권을 사서 리메이크했다는 주장이 있다"고도 했습니다. 누가 어떤 근거로 제시했는지 설명은 없었습니다. 말미엔 "박 대통령이 육 여사 피격을 지시했다는 의혹 제기가 영화적으로 가능하다면,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권양숙 여사가 사주했다는 극단적 주장도 영화로 만들 수 있는 것이냐는 주장까지 있다"고도 되묻습니다. 이 역시 무리한 일각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끌어온 수준입니다.

▲'건국전쟁2' 영화의 김덕영 감독이 지난 2025년 10월 7일 서울 롯데시네마 영등포점 한 카페에서 영화관람에 나선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와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쯤에서 <건국전쟁>과 비교해볼 만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과오를 건너뛰었다는 점 등에서 역사왜곡 비판을 받은 해당 영화, 그리고 김덕영 감독을 다룬 인터뷰에서 영화가 "이승만의 진짜 모습을 보여준다"고 소개했습니다. 감독의 역사 해석을 검증하기에 앞서 영화의 관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셈(관련기사:
"이승만 죽이기는 北의 공작…이제 '진짜 이승만'을 마주하세요"
)입니다.
<암살자(들)> 감독에게 역사 왜곡과 음모론의 책임을 집중적으로 물었던 태도와 비교되는 대목입니다. 전자가 극영화고 후자는 사실관계가 철저해야 하는 다큐멘터리임에도 온도 차가 너무도 큰 셈입니다.
46페이지 분량의 문건, '문세광' 이름 나오지 않아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1985년 발간한 'Inter-Korean Proposals and Dialogue: An Analytical Chronology' (남북 간 제안과 대화: 분석 연감) 문건 일부. 해당 문서는 온라인에 공개돼 있다.
CIA 보고서 일부 캡처
데일리안은 지난 9월 30일 '
[단독] CIA 내부 문건에도 육영수 시해범은 북한 공작원'이라는 기사를 냈습니다. 국민의힘 배현진 의원이 입수했다는 CIA 정보실(Directorate of Intelligence) 내부 문건을 들며 "1974년 8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 공작원(North Korean agent)의 암살 시도를 간발의 차로 피했으나, 육영수 여사가 목숨을 잃었다는 내용이 있다"고 보도했는데요.
이 내용은 1985년 작성된 'Inter-Korean Proposals and Dialogue: An Analytical Chronology' 문건에 나옵니다. 누구나 열람할 수 있도록 공개된 46 페이지 분량의 이 문건을 살피면 "북한 공작원"이라는 표현과 별개로 '문세광'이란 이름이나 판단의 근거, 수사 과정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내용 또한 남북 간 이어진 제안을 간단하게 연도별로 정리한 수준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지난 8월 11일 공개한 '1974년도 주한 미국대사관 작성 비밀문서'에 특기할 내용이 있었습니다. 참고로 이 문서들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1974년도 주한미국대사관 생산 비밀문서 51개, 문서철 1200여 건으로 현재 온라인에 공개돼 있습니다.
이 문서를 보면 1974년 8월 15일 사건 5일 후인 20일경 미국 대사관이 본국에 "문세광이 북한 또는 조총련의 지시를 받았다고 자백했다는 한국 정부 발표에 대해 독자적으로 확인한 바가 없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미 대사관은 "이 자백을 한국 정부가 국내적으로는 정책을 정당화하는 선전에, 대외적으로는 북한 정권의 배신을 입증하는 증거에 쓸 것"이라 내다봤습니다.
이런 정황을 종합하면 배현진 의원이 공개한 CIA 문서만으로 문세광 사건을 미국이 독자적으로 조사해 북한이 벌인 것으로 결론 내렸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연감이라는 형식의 특성상 당시 한국정부 발표를 인용한 수준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지 않을까요.
쏟아지는 이런 기사에 여러 갈등 징후가 포착됩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배우 이민호의 행사 및 <암살자(들)> 상영 행사를 취소한다고 공지했습니다. 일부 정치인과 시민단체는 행사를 하지 말라며 압력을 가하거나 비난하고 있습니다. 한국영화제작가협회는 "작품에 대한 평가의 범위를 넘어 개인에 대한 공격이나 근거가 확인되지 않은 정보의 확산으로 이어지는 것은 한국 영화의 건강한 제작 환경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성명까지 낸 상황입니다.
이런 대혼란의 책임은 과연 누가 져야 하는 것일까요. 영화를 비판하는 언론이라면 그 비판의 근거에도 같은 검증 기준을 적용해야 합니다. 확인되지 않은 전언을 확정된 사실로 옮기는 보도가 이어질 때, 그 책임을 감독과 배우에게만 물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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