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블린 드 모건 <절망의 감옥 속 희망> 1887년
퍼블릭 도메인
절망의 감옥에서 몸부림치는 한 여인이 있다. 현실의 감옥이라기보다는 마음속 감옥이리라. 밖을 향한 문과 창은 철망으로 막혀있다. 칙칙한 감옥처럼 검은 옷을 입고 자신을 격리한 상황이다. 뒤로는 후광이 선명한 희망의 여신이 램프를 들고 그녀에게 다가선다. 비록 작은 등불이지만 희망의 싹을 찾는 데서 절망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문이 열린다는 점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녀는 머리를 숙이고 자기 안의 절망에 잠긴다.
화가는 절망이 있는 곳에는 아무리 작아도 희망의 근거가 있기 마련임을 알려준다. 문제는 절망에 빠진 사람이 스스로 만든 감옥 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절망의 원흉은 벗어날 길이 없어 보이는 견고한 감옥이 아니다. 절망에 갇혀 살거나 참혹한 결말로 향하는 경향은 희망을 찾으려 하지 않는 데서 온다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듯하다.
하지만 오랜 기간 절망에 고통을 받아본 사람들은 안다. 때로는 희망이 더 큰 절망을 부른다는 점을 말이다. 흔히 '희망 고문'이라고 한다. 단지 은유나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다. 실제로 희망이 고통을 더 쥐어짜는 고문 역할을 해서 절망의 수렁을 더 깊게 만들기도 한다.
감당이 어려운 육체적·정신적 고통이 반복되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가 절망의 늪에서 벗어나는 탈출구가 되기도 한다. 한국 작가 남유하의 기록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에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행위 자체가 어떻게 희망의 근거일 수 있는지가 실려있다.
암 투병 중인 엄마가 온몸에 전이된 후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다가, 스위스 의료 기관의 도움으로 이른바 '존엄사'에 이르는 과정을 섬세하게 기록한 내용이다. 안락사라고도 불리는데, 정확히는 의료 기관을 도움을 받아 스스로 약물이나 주사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조력 자살'로 규정된다. 스위스에서 죽음 처방을 받기 전날 엄마와 다음의 대화를 나눈다.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 아침에 눈을 뜬 엄마가 말했다. 하루라도 빨리 고통을 끝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단 한 문장으로 표현된. (…) 엄마는 숨이 끊어지기까지 몇 분이나 걸리냐고 물었다. 이 질문은 의사에게도 했었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2분에서 5분 정도 걸려요. "너무 길다." 엄마의 작은 한숨. 엄마는 단 몇 초라도 고통을 연장하기 싫었을 것이다.'
엄마에게 생명을 거두는 행위는 끝없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간절한 소망이었다. 기자가 엄마에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라는 속담을 거론하며 왜 죽음을 선택했는지를 물었다. 이에 "매에는 장사가 없다는 속담도 있죠. 누구도 죽고 싶은 사람은 없어요. 다만 두드려 패는 듯한, 온몸을 난도질하는 듯한 통증을 끝낼 방법이 죽음밖에 없으니까"라고 대답한다.
당사자에게는 온몸을 난도질하는 듯한 통증이란 게 과장이 아니다.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출구가 없는 절망이 반복되는 사람이 겪는 고통은 자기 살이 찢겨나가는 듯한 수위에 이른다. 얼마나 자기 죽음이 간절한 탈출구였으면 하루라도 더 당겼으면 하고, 심지어 죽음을 기다리는 단 몇 분조차도 길게 느껴졌을까.
열아홉 살에 교통사고로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온몸이 마비되어 몇 년을 살아가던 프랑스 청년 뱅상 욍베르도 <나는 죽을 권리를 소망한다>에서 비슷한 경험을 전한다.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다가 엄마에게 죽음은 추악한 게 아니고 자신에게는 문제의 해결이기에, "엄마가 제가 죽는 걸 도와주지 않는다면 저 혼자서라도 해야 해요"라며 설득한다.
담당 의사에게도 영원히 깨어나지 않도록 약을 처방해 달라고 부탁하지만, 프랑스에서는 금지되어 있다며 거부한다. 당시 프랑스 대통령 시라크에게 "또렷한 의식을 지닌 환자라면 누구나 자기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고 생존 또는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라며 간절한 호소를 담은 편지를 보낸다. 그러나 대통령에게 그러한 권한이 없다는 답을 듣는다.
조력 자살의 법적 허용이 국민적 쟁점이 됐고, 한 가수는 <뱅상>이라는 제목으로, '법을 바꿔요. 나와 내 모든 형제를 위해 법을 바꿔요'라는 가사가 담긴 노래를 지었다. 뱅상은 삶은 아름답기에 지켜야 한다는 사람들을 향해 "내 죽음 역시 아름답지 않나요?"라고 부르짖는다.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자, 어머니의 도움으로 링거에 다량의 신경안정제를 투입하여 죽음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그녀는 오랜 기간 경찰의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한국은 남유하의 엄마처럼, 아픈 몸을 이끌고 스위스까지 가야만 조력 자살할 수 있는 법체계 아래 있다. 스위스·네덜란드·벨기에·스위스·룩셈부르크·콜롬비아·캐나다 등의 나라와 미국의 몇몇 주에서 존엄사를 허용한다.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어둡고 고통스러운 절망의 감옥 속에서도 한 줄기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하지만 또 다른 사람들이 갖는, 존엄하게 삶을 마무리하여 절망에서 벗어나려는, 생명에 대한 자기 결정권도 존중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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