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9.29 11:57ㅣ최종 업데이트 26.09.29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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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전라도 광주에서 발생한 가장 큰 사건들은 1929년 11월 3일의 광주학생독립운동과 1980년 5월 18일의 광주민주화운동이다. 두 사건은 1919년 3월 10일의 광주 3·1운동, 1960년 4월 19일의 광주 시위, 1978년 6월 27일의 전남대학교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교수들의 반유신투쟁), 1980년 6월 19일의 광주 원각사 집회 등과 더불어 광주의 역사 발전을 추동했다.

그 두 사건에 모두 참여한 산증인이 전남 나주 출신인 조아라(曹亞羅, 1912~2003)다. 그는 열일곱 살 때인 1929년에 한일 학생들의 충돌이 발단이 된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했고 그 후속으로 전개된 항일운동 와중에 체포됐다.

"민족적 의식으로 독립운동 결심"

2003년 7월 8일 숙환으로 타계한 고 조아라 광주YWCA 명예회장의 생전 모습.
▲2003년 7월 8일 숙환으로 타계한 고 조아라 광주YWCA 명예회장의 생전 모습.연합뉴스

국가보훈부가 발간한 <독립유공자공훈록> 제24권 조아라 편은 "광주 수피아여학교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을 경험"했다고 한 뒤 "광주학생운동 때 일본인 학생과 달리 한국인 학생만 다수 검거되는 것을 보고 민족적 의식을 갖고 독립운동을 결심했다"고 기술한다.

그러면서 "1930년 4월 중순경 동교생(同校生) 6명과 함께 양림산에 모여 조선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결사 백청단(白靑團)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활동하였다"고 한 다음, "이후 전라남도경찰부와 광주경찰서 고등계에서 다른 사상 사건을 수사하면서 백청단이 드러나, 광주 이일(李一)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1933년 1월 9~10일 서복금·허귀례 등 동지 1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고 알려준다. 그는 검찰에 송치돼 수감됐다가 석방됐고, 교사직에서 쫓겨났다.


17세 때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조아라는 68세 때는 5·18 현장을 뛰어다녔다. 당시의 수습대책위원이었던 그는 <YWCA 아카이브> 사이트에 따르면 전남도청을 계엄군에게 빼앗긴 지 이틀 뒤인 1980년 5월 29일에 구속됐다.

조아라의 구속이 상당한 의의를 띠었다는 점은 1981년 1월 24일 자 <동아일보> 9면이 그에 대한 처벌을 비중 있게 언급한 데서도 확인된다. 이 기사는 10·26사태 다음날인 1979년 10월 27일부터 비상계엄 해제일인 1981년 1월 24일까지의 주요 사건들을 열거하면서 1980년 12월 29일의 "조아라 등 12명에게 선고유예를 각각 선고"한 일을 언급한다.

20세기 광주가 최대 격변에 휩싸였던 '1929년 광주'와 '1980년 광주'의 두 시점에 조아라는 매번 그곳에 있었다. 그는 1929년 광주가 계기가 되어 구속을 당하고, 1980년 광주로 인해 구속됐다. 한국 현대사와 광주 현대사의 산증인이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그가 '광주의 어머니'(이태영), '민주의 어머니'(시인 고정희), '한국의 어머니'(오병문 전남대 교수), '조선의 할머니'(지선스님)로 불렸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1912년은 한국을 강점한 일본이 식민 지배의 제도적 틀을 구축하던 해였다. 일례로, 그해 4월 1일에는 오로지 한국인에게만 적용되는 조선태형령이 시행됐고, 8월 13일에는 한국인 토지를 '합법적'으로 수탈하기 위한 토지조사령이 공포됐다.

일제의 착취와 수탈이 한국인들의 신체와 토지를 향해 파고들던 그해의 3월 28일에 조아라는 나주군 반남면 대안리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세 딸과 세 아들 중의 둘째 딸이었던 그는 수피아여학교 보통과를 졸업한 뒤 고등과를 다니던 중에 '1929년 광주'에 뛰어들고, 반세기 뒤에는 1980년 광주에 뛰어들었다.

그가 남긴 두 시기의 발자취는 외형상으로는 민족주의투쟁과 민주주의투쟁으로 차별화되는 듯하지만, 본질을 놓고 보면 그렇지 않다. 두 사건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점이 있다. 그것은 한국인들이 자기 운명의 주인임을 확인하기 위한 싸움이었다는 점이다. 대상만 다를 뿐, 목표는 동일했다.

학교 선생님 스타일의 항일운동

본문에 인용된 <한겨레>의 조아라 인물탐구 기사.
▲본문에 인용된 <한겨레>의 조아라 인물탐구 기사.한겨레

한국인들이 자기 운명의 주권자임을 확인하도록 하기 위한 조아라의 투쟁은 1929년과 1980년의 사이에도 꾸준히 전개됐다. 그것은 위의 백청단을 통해서도 계속됐다. 수피아100년사간행위원회가 펴낸 <수피아100년사>에는 백청단 단원들과 그가 항상 태극기를 몸속에 간직한 채로 사람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태극기에 관해 설명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총독부 기관지인 1933년 2월 3일 자 <매일신보>는 은반지 착용이 백청단 단원들의 표식이라면서 '형무소를 두려워 말고 자금 조달에 힘쓰라'는 것이 이들의 강령이라고 보도했다. 조아라 특집인 1992년 5월 20일 자 <한겨레> 20면은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자금을 모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들이 학교에서 배운 자수와 뜨개 작품을 팔아서 군자금을 대기로" 했던 일도 설명했다. 가슴 속에는 태극기를 품고 손가락에는 은반지를 낀 조아라는 그런 상징물들의 힘을 받아 일제강점기의 투쟁을 이어갔다.

지속적인 항일운동은 그를 일제의 감시 대상으로 만들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수피아여학교가 1937년에 폐교된 뒤에는 동창회장이라는 지위 때문에 구속돼 1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조아라는 한국인들이 자기 운명을 주도하는 데 필요한 역량을 갖추도록 돕는 일에도 참여했다. <호남학> 2023년 제73집에 수록된 한규무 광주대학교 교수의 논문 '광주수피아여학교 백청단의 결성과 활동(1930~1933)'은 "문맹 퇴치가 급선무라 하여 일요일이나 축제일, 방학 때 고향에서 농민계몽운동에 열중"했다는 점, "가정이 넉넉지 못하여 취학하지 못하는 수재아동에게 학자금 조달"을 했다는 점 등을 소개한다. 백청단이 "문맹 퇴치와 농민 계몽"에서 역할을 해냈다고 이 논문은 평한다.

그는 일제가 물러난 뒤에는 광주 땅에서 제국주의의 흔적을 지우고 새로운 질서의 토대를 놓는 일에 헌신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펴낸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조아라 편은 "광주에서 YWCA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사회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고 말한다. 위 <한겨레>는 그의 해방 직후 활동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해방이 되고 당시 광주의 여성 지도자였던 김필례·김정현·현덕신 등과 함께 건국준비광주부인회를 만드는 데 참여했고, 38년 일제의 탄압으로 문을 닫은 광주여자기독교청년회(YWCA) 재건에도 적극 나섰다.
또 37년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폐교당한 수피아여학교가 그의 땀과 힘을 기다렸다. 동창회장을 다시 맡아 합창단을 조직한 뒤 광주·목포·순천을 돌아다니며 모교 재건 기금을 모아 45년 12월 5일 양림교회에서 수피아를 부활시켰다."

조아라의 항일운동에서는 학교 선생님 스타일이 배어났다. 한편으로는 일본에 항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문맹퇴치운동이나 계몽운동을 통해 대중을 보듬는 양상이 나타났다. 이런 양상은 그의 활동에 대한 '훼방꾼'이 패망해서 물러난 뒤에는 훨씬 자유롭고 폭넓게 전개됐다.

위 기사는 "6·25가 끝난 뒤 전쟁으로 생계가 막연해진 전쟁 미망인과 고아들을 위해 도립모자원과 성빈여사를 만들었다"라며 "'먹고 입고 키워주는 것만으로는 결코 사람이 성숙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그는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야간 중학 호남여숙도 세웠다", "불우한 미혼여성들의 보금자리인 양림동 계명여사의 벽돌 한장 한장도 그의 땀으로 쌓아졌다"고 기술한다.

조아라는 1979년 10·26사태 이후에는 소설가 황석영 등과 함께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회'를 준비했다. 그해 11월 28일 광주기독교연합회·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등이 발표한 '민주주의를 향하여 힘차게 나아가자!'라는 성명문은 "그들은 영구집권의 도구로서 유신체제라는 쇠사슬을 국민에게 씌우고" 국민들을 억압했다고 한 뒤, "우리는 눈을 부릅뜨고 유신잔당의 마지막 몸부림을 주시하면서 이를 분쇄하기 위해 온몸을 던질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 일로 인해 그는 추운 겨울에 한 달 동안 경찰서 유치장 마룻바닥에서 보내야 했다. 이처럼 박정희 피살 뒤에 "눈을 부릅뜨고" 민주화의 봄을 위해 시동을 걸던 그는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가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1929년 광주와 달리 1980년 광주는 그를 비껴갈 수도 있었다. 2003년 3월 8일에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나온 부고 기사에 따르면, 계엄군이 광주를 짓밟기 시작할 당시 그는 서울로 출장 가던 중이었다. 그는 "광주 시민들을 내버려둘 수 없다"라며 주변 사람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광주로 방향을 돌렸다. 세상을 감싸안는 그의 투쟁 방식은 이 시기에도 변함없이 구현됐다.

세상을 떠날 당시, 그는 91세였다. 전주예수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고 언론들은 보도했다. 자신과 한국인들을 자기 삶의 주권자로 만드는 투쟁에 일생을 마친 그의 안식처는 국립5·18묘지 내에 조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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