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에 인용된 <한겨레>의 조아라 인물탐구 기사.
한겨레
한국인들이 자기 운명의 주권자임을 확인하도록 하기 위한 조아라의 투쟁은 1929년과 1980년의 사이에도 꾸준히 전개됐다. 그것은 위의 백청단을 통해서도 계속됐다. 수피아100년사간행위원회가 펴낸 <수피아100년사>에는 백청단 단원들과 그가 항상 태극기를 몸속에 간직한 채로 사람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태극기에 관해 설명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총독부 기관지인 1933년 2월 3일 자 <매일신보>는 은반지 착용이 백청단 단원들의 표식이라면서 '형무소를 두려워 말고 자금 조달에 힘쓰라'는 것이 이들의 강령이라고 보도했다. 조아라 특집인 1992년 5월 20일 자 <한겨레> 20면은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자금을 모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들이 학교에서 배운 자수와 뜨개 작품을 팔아서 군자금을 대기로" 했던 일도 설명했다. 가슴 속에는 태극기를 품고 손가락에는 은반지를 낀 조아라는 그런 상징물들의 힘을 받아 일제강점기의 투쟁을 이어갔다.
지속적인 항일운동은 그를 일제의 감시 대상으로 만들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수피아여학교가 1937년에 폐교된 뒤에는 동창회장이라는 지위 때문에 구속돼 1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조아라는 한국인들이 자기 운명을 주도하는 데 필요한 역량을 갖추도록 돕는 일에도 참여했다. <호남학> 2023년 제73집에 수록된 한규무 광주대학교 교수의 논문 '광주수피아여학교 백청단의 결성과 활동(1930~1933)'은 "문맹 퇴치가 급선무라 하여 일요일이나 축제일, 방학 때 고향에서 농민계몽운동에 열중"했다는 점, "가정이 넉넉지 못하여 취학하지 못하는 수재아동에게 학자금 조달"을 했다는 점 등을 소개한다. 백청단이 "문맹 퇴치와 농민 계몽"에서 역할을 해냈다고 이 논문은 평한다.
그는 일제가 물러난 뒤에는 광주 땅에서 제국주의의 흔적을 지우고 새로운 질서의 토대를 놓는 일에 헌신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펴낸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조아라 편은 "광주에서 YWCA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사회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고 말한다. 위 <한겨레>는 그의 해방 직후 활동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해방이 되고 당시 광주의 여성 지도자였던 김필례·김정현·현덕신 등과 함께 건국준비광주부인회를 만드는 데 참여했고, 38년 일제의 탄압으로 문을 닫은 광주여자기독교청년회(YWCA) 재건에도 적극 나섰다.
또 37년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폐교당한 수피아여학교가 그의 땀과 힘을 기다렸다. 동창회장을 다시 맡아 합창단을 조직한 뒤 광주·목포·순천을 돌아다니며 모교 재건 기금을 모아 45년 12월 5일 양림교회에서 수피아를 부활시켰다."
조아라의 항일운동에서는 학교 선생님 스타일이 배어났다. 한편으로는 일본에 항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문맹퇴치운동이나 계몽운동을 통해 대중을 보듬는 양상이 나타났다. 이런 양상은 그의 활동에 대한 '훼방꾼'이 패망해서 물러난 뒤에는 훨씬 자유롭고 폭넓게 전개됐다.
위 기사는 "6·25가 끝난 뒤 전쟁으로 생계가 막연해진 전쟁 미망인과 고아들을 위해 도립모자원과 성빈여사를 만들었다"라며 "'먹고 입고 키워주는 것만으로는 결코 사람이 성숙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그는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야간 중학 호남여숙도 세웠다", "불우한 미혼여성들의 보금자리인 양림동 계명여사의 벽돌 한장 한장도 그의 땀으로 쌓아졌다"고 기술한다.
조아라는 1979년 10·26사태 이후에는 소설가 황석영 등과 함께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회'를 준비했다. 그해 11월 28일 광주기독교연합회·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등이 발표한 '민주주의를 향하여 힘차게 나아가자!'라는 성명문은 "그들은 영구집권의 도구로서 유신체제라는 쇠사슬을 국민에게 씌우고" 국민들을 억압했다고 한 뒤, "우리는 눈을 부릅뜨고 유신잔당의 마지막 몸부림을 주시하면서 이를 분쇄하기 위해 온몸을 던질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 일로 인해 그는 추운 겨울에 한 달 동안 경찰서 유치장 마룻바닥에서 보내야 했다. 이처럼 박정희 피살 뒤에 "눈을 부릅뜨고" 민주화의 봄을 위해 시동을 걸던 그는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가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1929년 광주와 달리 1980년 광주는 그를 비껴갈 수도 있었다. 2003년 3월 8일에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나온 부고 기사에 따르면, 계엄군이 광주를 짓밟기 시작할 당시 그는 서울로 출장 가던 중이었다. 그는 "광주 시민들을 내버려둘 수 없다"라며 주변 사람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광주로 방향을 돌렸다. 세상을 감싸안는 그의 투쟁 방식은 이 시기에도 변함없이 구현됐다.
세상을 떠날 당시, 그는 91세였다. 전주예수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고 언론들은 보도했다. 자신과 한국인들을 자기 삶의 주권자로 만드는 투쟁에 일생을 마친 그의 안식처는 국립5·18묘지 내에 조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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