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9.23 17:23ㅣ최종 업데이트 26.09.23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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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디세이>의 오디세우스.
▲영화 <오디세이>의 오디세우스.<오디세이> 예고편 스틸컷

3천 년 전에 나온 작품을 각색한 영화 <오디세이>가 관객 수 1100만 명을 넘어섰다. 이유가 뭘까? 짧게 답하면 <오디세이>가 괴물, 마법, 로맨스로 가득한, 10년에 걸친 모험 이야기이며, 미지의 세계로 모험을 떠나 자신을 발견하고 증명하고 싶은 욕망을 표현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모험 끝에 친숙하고 사랑하는 집(가정)으로 돌아가고 싶은 그리움을 극화했다는 점도 꼽을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떠난다는 행위 자체가 사람을 변화시키며, 시간은 남겨진 사람들도 변화시킨다는 걸 원작은 보여준다. 이는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이 보편적으로 겪는 삶의 궤적이다. 영화의 인기에 덩달아 원작의 여러 번역본도 주목을 받는다. 고전을 다시 보게 만드는 좋은 사례이다.

영화가 보여준 고전의 새로운 해석

지난 글에서 썼듯, 나홍진 감독의 <호프>도 주목을 받았지만 찬반이 첨예하게 갈린 경우였다. <오디세이>는 다르다. 내가 읽은 여러 평을 보면 압도적으로 호평이 많다. 나도 동의한다. '2026년 최고의 외국 영화'가 될 만한 작품이다.


이 글에서는 영화 자체에 대한 평가보다는 원작에 충실하다고 자부하는 새로운 번역본과 영화를 비교하면서 영화가 보여주는 새로운 해석의 의미를 따져보겠다. 일부 평에서는 영화와 원작을 비교하면서 영화가 원작에 충실하지 않다고 하는데, 논점을 벗어난 비판이다. 모든 고전이 그렇듯이 <오디세이>는 영원불멸의 단편적 교훈을 주려 하기보다 각 세대가 텍스트의 가르침을 스스로 재해석하도록 유도한다. 이점에 대해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박찬욱 감독과 나눈 대화를 인용할 만하다.

"박찬욱: 그렇죠. 호메로스도 당대 관점에서 오래된 이야기를 쓴 것이고, 이런 오래된 이야기들은 시대를 바꿔가면서 계속해서 그 시대의 눈으로 각색되고 변주됩니다. 오래된 이야기의 가치가 바로 그 지점에 있습니다. 호메로스의 이야기를 그대로 영화로 옮기는 것이 21세기에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이 영화의 각색을 두고 원작을 훼손했다는 식의 비판은 정말 아무 가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크리스토퍼 놀런: 저도 동의합니다. 영화감독으로서 작품을 해석하는 건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대가를 받는 이유이자 우리의 일이죠. 영화감독은 이야기를 가져와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그 안에서 관객이 공감 가능한 진리를 발견해내야 합니다. 이 작업은 분명 특권이지만 동시에 막중한 책임이 따르는 일이라고 봅니다." (<씨네21> 1569호)

그러면 놀런이 이 고전을 어떤 시각에서 "시대를 바꿔가면서 계속해서 그 시대의 눈으로 각색하고 변주"하는지를 살펴보자. 먼저 인간과 신의 관계. 당연한 얘기이지만, 신화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시대의 작품인 원작에서 신은 인간사에 광범위하고 직접적으로 개입한다. 예컨대 원작에서 오디세우스의 수호신인 지혜와 문명의 여신 아테나는 오디세우스가 이타카로 돌아갈 수 있도록 제우스의 허락을 받아내고, 텔레마코스가 스스로 정보를 수집하고 세상을 경험하며 후계자로 성장하도록 판을 설계한다. 원작은 신의 개입을 당연시하고 신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을 보여준다. 오디세우스의 운명도 제우스가 미리 결정한다.

"배에 실어 사랑하는 조국 땅으로, 청동과 황금과 또 옷가지들을 듬뿍 선사하고서, 많이, 트로이아에서 가져가지 못했을 만큼 오뒷세우스가 설령 무사히 돌아갔다 해도, 전리품의 몫을 제비 뽑고서. 그렇게 그의 운명은 사랑하는 이들을 보고, 또 이르는 것이다. 높은 지붕의 집에, 그리고 자신의 조국 땅에."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을유문화사)

각색된 영화에서도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에서 싸웠던, 누구보다도 지략이 뛰어난 사람으로 간주되지만 포세이돈의 분노와 부하들의 어리석음 앞에서는 여전히 취약한 모습을 드러낸다. 여전히 인간은 신 앞에서 약하다. 그래서 7년 동안 오디세우스를 보살핀 혹은 가둔 여신 칼립소는 뗏목을 만들어 이타카로 떠나는 오디세우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신과 싸우려 하지 말고, 통제하지 말고 맡겨. 시련을 겪겠지만 죽지는 않을 거야." 현대의 우리도 운명의 힘이나 신들의 계획에 지배받을 때, 우리 삶을 통제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깨닫고 겸허해진다.

영화는 그 점을 놓치지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영화는 신이 정해 놓은 운명과 시련에 물음을 던지는 오디세우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오디세우스는 아들 텔레마코스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인간에게서 신을 찾으면 실망한다." 그리고 아테나에게 불평한다. "신들은 왜 알아듣기 어렵게 말하나요." 원작과 달리 아테나 여신도 오디세우스의 행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며, 곁에서 지켜만 본다. 이런 장면은 수많은 고통과 시련이 닥치는 우리 시대에 인간과 신이 맺는 관계 또한 돌아보게 한다.

크리스토퍼 놀런이 보여준 오디세우스의 '죄책감'

영화 <오디세이>에서 불타는 트로이를 바라보는 오디세우스
▲영화 <오디세이>에서 불타는 트로이를 바라보는 오디세우스<오디세이> 예고편 스틸컷

오디세우스의 형상화를 살펴보자. 원작에서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이나 귀환 과정에서 행했던 약탈과 학살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전쟁에서 자신이 한 영웅적 역할을 자부한다. 트로이 전쟁을 대하는 오디세우스의 태도도 그 시대의 정신과 정서를 반영한다.

"그들이 마시고 먹는 욕구를 다 풀었을 때, 데모도코스에게 말했다. 지략 많은 오뒷세우스가. (중략) 목재로 된 그것[목마-인용자]을 에페이오스가 만들었지요. 아테나와 함께, 그 덫을 그때 성채 안으로 들여보냈죠, 고귀한 오뒷세우스가 남자들로 가득 채워서, 그들이 결국 일리오스를 멸망시켰죠. 만약 그대가 내게 그것을 몫에 맞게 들려준다면, 그 즉시 난 모든 인간들에게 이야기하겠소."

이타카로 돌아가서 구혼자들을 학살하고 구혼자들에게 협조했다고 간주하고 여성 노예들(사실 그들은 노예이기에 주인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을 제거하는 과정에서도 오디세우스는 별다른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역시 당대 사회의 관점이 반영된 모습이다.

"그것을 제우스가 던졌소, 트로이아를 떠나던 내게. 일리오스에서 날 바람이 실어 키코니아인들에게 데려갔소, 사이 이스마로스로, 그곳에서 난 도시를 파괴하고, 그들을 죽였소. 도시로부터 아내들과 수많은 재물을 탈취한 뒤에 나누었소, 아무도 공평한 몫 없이 무시당해 돌아가지 않도록."

영화는 매우 강한 해석을 통해 오디세우스의 죄책감을 강조한다. 원작을 읽으면서도 독자는 오디세우스가 구혼자들에게 복수하고 집안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에 쾌감을 느낀다. 하지만 이미 원작에서도 독자는 오디세우스가 이타카를 20년 동안 정치적 무정부 상태에 방치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영화는 그 점을 아내 페넬로페의 격렬한 발언을 통해 드러낸다. "내가 원하는 것은 오디세우스야." 귀환 후 오디세우스가 홀에서 쏴 죽인 남자 중 일부는 그를 따라 트로이로 향했다가 결국 파멸을 맞이한 전사들의 친척이다. 이런 모습은 원작이 지닌 세계관의 도덕적 복잡성,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의 도덕적 복잡성을 드러낸다.

영화는 원작이 어렴풋이 드러내는 오디세우스의 착잡한 내면을 더욱 또렷하게 표현한다. 가장 눈에 띄는 차이점은 오디세우스가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알기 위해 찾아간 지옥에서 만나게 되는, 의미 없는 죽음을 맞은 수많은 병사의 모습이다. 그중에서 시논이라는 인물이 돋보인다. 시논은 원작에는 나오지 않는다. 한참 뒤인 로마 제국 시대에 나온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놀런은 이 인물을 영화에서 오디세우스가 지닌 죄의식을 부각하는 데 활용한다. 지략가인 오디세우스는 대체로 부하들에게 중요한 정보를 공유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성향이 있다. 그래서 여러 번 위험에 처한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시논은 트로이 목마 안에 병사들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적을 속이기 위해 남았다가 죽임을 당한다. 시논이 목마가 아테나에게 바치는 공물임을 증언하자, 그 말을 믿고 트로이 군인들은 목마를 성안으로 들인다. 그 결과 트로이는 멸망한다.

지옥에서 시논은 오디세우스에게 자신이 전쟁에 끌려온 사연을 말한다. 그리고 왜 자신을 속였는지를 오디세우스에게 따진다. 오디세우스는 적을 속이려고 그랬다고 변명한다. 그 변명은 공허하다. 애초에 원작과 다르게 영화는 트로이 전쟁의 본질이 지중해 교역권을 차지하려는 아가멤논의 욕심 때문이라는 걸 시작 부분에서 명확히 밝힌다. 3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전쟁의 원인을 돌아보게 하는 감독의 해석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묻게 된다. 누구를, 무엇을 위한 전쟁인가? 원작과는 다르게 영화는 키르케를 통해 전쟁의 희생자가 누구인지를 묻는다. 키르케는 오디세우스를 질타한다. 당신들의 전쟁은 결국 강간과 약탈로 여성과 약자에게 고통을 안길 뿐이라고.

영화는 청동기 문명의 몰락과 다가오는 암흑시대를 예언하면서 끝난다. 영화의 핵심 모티브는 제우스의 법인 환대의 정신이다. '손님은 가장한 신일 수 있으니 언제나 환대하라'라는 정신이다. 영화는 그 정신이 어떻게 무너져가는가, 그래서 트로이 전쟁의 시대 배경인 후기 청동기 문화(기원전 12-13세기)가 어떻게 몰락해 가는지를 또렷하게 보여준다. 역시 다른 맥락에서 문명의 위기를 점점 실감하는 우리 시대에도 깊은 울림이 있다. 영화 <오디세이>는 고전의 재해석이 갖는 의미를 확인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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