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출두하는 정호용5.18 광주민주항쟁 당시 특전사령관이었던 정호용 전 국방장관이 검찰의 조사를 받기 위해 1996년 1월 검찰에 출두하는 모습. (서울=연합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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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광주 학살에 대한 책임을 부인할 수 없는데도, 정호용은 죽기 전까지 학살 책임을 부인하고 피해자들과 세상에 사죄하지 않았다. '5·18 책임자들은 당연히 사과해야 하지만, 나는 책임자가 아니므로 사과할 이유가 없다. 사과는 전두환의 몫이다'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그는 2021년 2월 4일에 위 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 제출한 진정서에서 "본인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사과를 하고 화해를 하여 국민통합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그런 사과를 하라고) 측근들과 전 대통령에게 건의를 하였습니다"라고 말했다. 전두환에게는 '사과, 네가 해라'라고 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럴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도 경우에 따라서는 사과할 수 있다고 여지를 남겼다. "본인은 실질적으로 책임을 지고 사과를 해야 할 입장도 못 되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이 끝내 사과를 하지 않는다면 본인 혼자라도 합당한 수준의 사과를 할 뜻을 가지고 있음을 밝힙니다"라고 말했다. 신군부를 대표하는 전두환이 사과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자신이 나서서 사과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사과가 아니라 신군부 전체의 사과를 자신이 대리할 수 있다고 말한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제3공수여단 제11지역대대장 자격으로 5·18 현장에 투입된 신순용 전 육군 소령은 2021년 5월 21일 국립5·18민주묘지를 방문해 "미안합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라며 절을 올렸다. 그러나 그의 상급자들은 사과하지 않았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사망한 뒤에 그 아들인 노재헌 현 주중대사가 아버지의 유언이라며 사과를 대신한 일은 있지만, 이는 본인의 직접 사과도 아니고 살아생전의 사과도 아니다.
5·18 학살 책임자 중의 일부가 사과를 하지 않는다면 그 일부의 인격이나 개성 문제로 볼 수도 있겠지만, 전·노와 정호용을 포함한 간부급 가담자들이 그런 태도를 통일적으로 유지하고 있으니 이를 개인적 차원의 문제로 국한시키기는 힘들다. 집단적으로 사과를 하지 않는 구조적 요인이 있다고 이해하는 게 타당하다.
5·18 책임자들의 보호막이 되어온 정치시스템
1987년 6월항쟁은 전두환 신군부에 대한 국민적 응징이었다. 그런데 그 기운에 힘입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한 야당들은 6월항쟁의 대의보다는 당리당략에 매몰돼 그해 12월의 대선 승리를 학살 책임자인 노태우(36.64%)에게 헌납하는 어이없는 상황을 초래했다. 야권이 김영삼(28.03%) 후보와 김대중 후보(27.04%)로 분열한 것은 5·18 책임자들이 정권 재창출에 성공한 핵심 요인이다. 이는 그들이 세상을 무서워 할 필요성을 덜 느끼게 만들었다.
노태우의 대선 승리로 꼬이는 듯했던 상황은 국민들과 민주진영의 개입으로 다시 정리됐다. 1988년 총선은 사상 초유의 여소야대 정국을 탄생시켰고, 민주진영의 통일운동·노동운동 등은 노태우 정권이 혁명 발생을 우려하게 만들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이는 1987년 대선 승리 때문에 한숨을 돌렸던 5·18 책임자들을 또다시 긴장시키는 일이었다.
이때 야권은 또다시 배신을 했다.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이 노태우의 민정당 및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과의 3당 합당을 선언(1990년 1월 22일)한 것은 신군부 세력이 공안정국을 통해 민주화 기운에 맞서는 배경이 됐다. 이는 학살 책임자들이 마음을 놓게 만드는 일이었다.
학살자 응징과 5공 청산을 이루려는 국민적 열망은 그 상황을 다시 뒤집어놓았다. 그 열망이 만들어낸 기운은 1995년 12월 3일 전두환이 고향 합천에서 잠옷 바람으로 구속되고 전·노와 정호용을 비롯한 신군부 핵심들이 죄수복을 입고 유죄 선고를 받는 단계를 만들어냈다.
이 상황에서 정치권은 또다시 국민 열망을 저버렸다. 1997년 대선 직후에 김대중 당선인과 김영삼 대통령의 합의하에 전·노가 사면되고 정호용 등도 사면됐다. 12·12 및 5·18 재판을 받은 16명 중에서 14명이 그해 12월 22일에 특별사면을 받았다. 유학성은 재판 도중에서 사망했고 박준병은 무죄선고를 받았기 때문에 사면이 불필요했다.
국민들을 대표해 5·18 학살 문제를 처리해온 정치권은 이처럼 번번이 학살 책임자들에게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주거나 아니면 법적으로 용서를 해줬다. 그래서 5·18 청산은 되돌릴 수 없는 불가역적 청산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완화되거나 흐지부지될 수 있는 잠정적인 청산이 되고 말았다.
이는 '우리를 부정하거나 외면하고서는 대한민국이 돌아갈 수 없겠구나'라는 인상을 5·18 책임자들에게 심어주는 것이었다. 진심을 다해 사죄하고 손발이 닳도록 빌어야 나와 내 자손들이 이 땅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겠구나 하는 절박한 심정을 품을 필요성을 떨어트리는 일이었다.
5·18에 대한 폄훼가 국회를 비롯한 정치권 내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것도 그것과 무관치 않다. 손에 피를 묻힌 학살 책임자들도 적당히 용서를 받는 나라에서, 학살도 아닌 폄훼를 한 사람에게 중한 제재가 가해지지 않으리라는 것은 얼마든지 예견할 수 있는 일이다
5·18 학살 책임자들은 적대적인 세상 분위기에 둘러싸여 있다. 이런 상황에 놓인 사람들은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에 자식들이 어떻게 될까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거짓으로라도 싹싹 빌어 자손들이 무사히 살 수 있도록 만들고 싶은 것이 이 같은 처지에 처한 사람들의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5인방으로 불리는 정호용을 비롯해 간부급 책임자들은 하나 같이 한마디 사과도 없이 편안히들 눈을 감았다. 그렇게 세상을 떠나도 자손들이 살아가는 데에 별 지장이 없으리라는 나름의 믿음이 없다면 그렇게 하기 힘들다.
세상의 기운은 적대적이지만, 정치시스템은 5·18 책임자들에게 일종의 보호막이 되어 왔다. 사과 없이 떠난 정호용의 죽음은 5·18에 대한 단호하고도 불가역적인 청산을 수행하도록 정치권을 압박하는 것이 얼마나 절실한가를 웅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