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9.15 07:21ㅣ최종 업데이트 26.09.15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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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시대와 진시황 진나라의 중간인 전국시대 정(鄭)나라 때의 경전으로 알려진 것이 <열자(列子)>다. '열 선생님'이라 하여 '열자'로도 지칭되는 열어구(列御寇)의 저술로 전해지는 <열자>의 탕문(湯問) 편에 우공이산(愚公移山) 이야기가 실려 있다.

주인공 우공은 집 앞을 가로막는 태행산(太行山)과 왕옥산(王屋山) 때문에 왕래의 불편을 겪었다. 그는 자기가 이사 가는 쪽을 택하지 않고 두 산을 이사 보내는 쪽을 택했다. <열자>의 설명이다.


"마침내 아들과 손자 중에서 짐을 질 수 있는 셋을 데리고 가서 돌을 깨고 흙을 파내어 삼태기에 담은 뒤 발해 끄트머리로 옮겼다."

집에서 발해 바닷가까지 한번 왕복하면 계절이 바뀌었다. 그런데도 그는 세상의 비웃음을 무시한 채 그 힘든 일을 계속 벌여 나갔다.

나쁘게 표현하면 어리석고 좋게 표현하면 우직한 이 일을 시작할 당시의 우공은 고령이었다. <열자>는 "나이가 곧 구십이었다"고 말한다. 사실상 불가능한 대역사(大役事)를 90 나이에 시작한 우공의 모습은 하늘을 감동시켰다. 상제는 두 산을 다른 데로 옮겨주라고 신들에게 명령했다. 결국 하늘의 도움에 힘입어 우공은 이산(移山)을 실현시켰다.

자기 분야에서 우공이산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과거에도 많고 지금도 많지만, 산과 관련해 실제로 그런 일을 벌인 인물이 한국 현대사에 존재한다. 우공과 다른 게 있다면, 우공은 산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일을 벌인 데 비해 이 인물은 산을 살리는 방향으로 힘을 쏟았다는 점이다.

국내 최고의 삼나무·편백 숲을 만든 사람

유튜브 영상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나무를 심은 사람이 있다!? 대한민국 조림왕 임종국' 갈무리.
▲유튜브 영상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나무를 심은 사람이 있다!? 대한민국 조림왕 임종국' 갈무리.KBC 광주방송

2005년 11월 23일 자 산림청 보도자료는 "산림청은 11월 23일 20세기 국내 최고 임업가로 손꼽히며 1987년 타계한 춘원 임종국 선생의 유골을 고인이 평생 가꾸어 온 전남 장성군 편백숲으로 이장하여 수목장으로 조성했다"고 한 뒤 임종국을 이렇게 소개한다.

"고 임종국 선생은 1956년부터 1976년까지 전남 장성군 서삼면 일대 596ha에 삼나무·편백 등 279만 그루의 나무를 심어 오늘날 국내 최고의 삼나무·편백 숲을 만들어 놓았다. 이러한 공로로 선생은 철탑산업훈장(1970), 5·16민족상(1972)을 수상했고 1987년 72세의 일기로 타계, 전북 순창군 선영에 안장되었으며 2002년에는 산림청 국립수목 내에 있는 '숲의 명예전당'에 헌정되기도 했다."

설화 속의 우공은 삼태기에 돌과 흙을 담아 베이징 동쪽인 발해 쪽으로 옮겨놨다. 임종국의 산 가꾸기도 그에 뒤지지 않는 고통의 과정이었다.

2012년 8월 17일 자 '대한민국 정책브리핑'에 실린 김성륜 서부지방산림청장의 '편백나무 치유의 숲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라는 기고문은 "전남 장성의 축령산(621m). 높지도 크지도 않은 이 산이 유명해진 것은 40~50년생 편백과 삼나무가 울창하게 자라고 있는 편백숲 덕분"이라며 "쭉쭉 뻗은 나무를 보면 '잘생기고 아름답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고 한 뒤, 임종국의 노력과 헌신을 이렇게 설명한다.

"1968년과 69년에 극심한 가뭄으로 산에 심었던 나무도 말라죽기 시작했다. 선생은 물지게를 지고 산을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물을 길을 수 있는 냇가와 거리도 멀 뿐 아니라 물지게를 지고 산으로 올라간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물지게를 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보다 못한 가족과 마을 주민들도 돕기 시작했다. 계속된 가뭄으로 어깨는 피투성이가 되었고, 가족과 마을 주민들도 물지게를 졌던 어깨가 온전하지 않았다."

우공의 모습을 보고 상제가 감동하고 신들이 움직였다. 임종국의 모습을 보고 가족과 마을 사람들이 힘을 보탰다. 어깨가 영구적이지 않은 불완전한 육체를 가진 '상제'와 '신'들의 도움으로 '임공'은 이목(移木)을 완성시켰다.

두 '춘원'의 다른 삶

임종국(1915~1987, 林種國)은 친일문제 전문가인 역사학자 임종국(1929~1989, 林鍾國)과 동명이인이다. 조림가 임종국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의 토대를 놓은 역사학자 임종국과 다른 분야에서 활동했다. 그렇지만 조림가 임종국의 삶과 활동에서도 친일파가 중요한 작용을 했다.

조림가 임종국은 일제강점기에 평균 이상인 중학교 중퇴 학력을 쌓았다. 그가 자신의 호로 선택한 것은 춘원(春園)이다. 그가 공부할 당시의 문인이자 친일파인 춘원 이광수(1892~1950)와 똑같은 호다. 말 그대로 하면 '봄 동산'인 춘원은 조림가 임종국의 업적을 잘 표현한다.

전북 순창 출신인 임종국이 편백나무를 심게 된 것은 전북 고창 출신인 친일파 김성수와 관련이 있다. 임종국이 65세일 때인 1980년 식목일에 발행된 <매일경제>에 이런 사연이 실려 있다.

"해방 전 그는 장성군 내에 있는 인촌 김성수 선생이 그의 산에 심어 놓은 삼나무와 편백을 구경하는 기회가 있었다. 그는 성목(成木)이 된 나무의 당당한 기상, 숲의 푸르름에 감명을 받았다. 모든 산이 푸르렀으면 좋겠고 울창한 산은 가난을 물리쳐 줄 것으로 그는 확신했다."

조림가 임종국은 가장 지성적인 친일파와 똑같은 호를 쓰고 가장 부유한 친일파 중 하나의 산림을 보고 편백나무를 심었다. 그러나 그의 삶과 나무 심기는 친일파들과 정반대 방향으로 전개됐다. 그것은 일제강점기의 유산을 극복하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임종국씨는 전남 장성에 504ha가 넘는 삼나무와 편백나무를 조성했다. 1999.5.
▲임종국씨는 전남 장성에 504ha가 넘는 삼나무와 편백나무를 조성했다. 1999.5.연합뉴스

한국전쟁(6·25전쟁) 때문에 한국의 산들이 민둥산이 됐다는 인식이 매우 강하지만, 해방 이후의 언론계나 지성계를 항일투사 출신들이 주도했다면 그런 인식의 파급력은 훨씬 약했을 것이다. 20세기에 한국의 산들이 황폐해진 것은 조선 후기부터 땔감 채취와 화전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국전쟁 중의 공습과 포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제의 산림수탈정책으로 인해 산림자원이 많이 사라진 것에도 기인한다.

임종국 특집인 위의 <매일경제> 기사는 김성수 가문의 편백나무숲을 보고 나무 심기에 뛰어드는 과정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이처럼 감동에 의해서 시작된 그의 조림 사업은 해방 이후에 본격화되었다"라며 "해방을 맞은 모든 산들은 남벌을 면치 못했으며"라고 말한다. 한국전쟁 이전인 해방 직후에 임종국이 본 것은 일제의 산림자원 수탈로 인해 황폐해진 산들이었다.

임종국은 그런 토대 위에서 나무 심기에 뛰어들었다. 미국 군사고문단이 마련해준 묘목과 그 자신이 양잠업 등을 해서 번 자금을 투입해 그는 산림을 풍성하게 만드는 일을 벌여나갔다. 그것은 일제에 의해 황폐해진 산림을 그의 지역 내에서 재생시키는 일이었다.

위 기사에 따르면 그의 활동을 지원한 미 군사고문들은 "무서운 것은 전쟁이 아니라 산의 황폐로 토사가 밀려내려와 전 농토를 폐허화시키는 일"이라는 말을 들려줬다. 임종국은 "나 혼자만이라도 그런 사태를 막아보자는 것이 내 신념이었지요"라고 이 신문에 말했다. 산을 푸르게 만들고 산을 통해 부를 일구는 것뿐 아니라 산의 황폐화로 인한 재앙을 방지하겠다는 신념 역시 그의 노력을 추동했던 것이다.

이전 시기에 황폐해진 산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뛰어든 '우공'은 이 때문에 빚을 지게 됐다. 그가 가꾼 편백나무 숲은 결국 다른 사람의 소유로 넘어갔다. 그러자 나무들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할 뿐 아니라 대규모 벌채 위기로 내몰리는 일까지 일어났다.

지난 7월 1일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장성군 축령산 편백숲 내 임종국 선생 수목장.
▲지난 7월 1일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장성군 축령산 편백숲 내 임종국 선생 수목장.연합뉴스

위의 김성륜 청장은 "자칫 편백숲이 사라질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고 한 뒤 "산림청에서는 국가관리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고인의 숭고한 뜻을 받들고자 소유주들을 수차례에 걸쳐 설득한 끝에 2002년 장성 편백숲을 국가에서 사들이게 되었다"고 기술한다. 상제와 신들의 개입으로 우공의 노력이 완성됐다는 <열자>의 설화와 비슷한 구조로 임종국의 노력도 결실을 맺었던 것이다.

나무를 심고 숲을 조성하는 일은 백년대계라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로 긴 시간을 요한다. 이는 자신이 누리기 힘든 미래를 위해 자신을 바치는 헌신적 행위다. 또 자신의 유한한 일생을 후대의 숲을 통해 항구화시키는 철학적 행위이다. 황폐해진 산들을 살리겠다며 일생을 조림사업에 헌신한 임종국의 유골을 편백숲으로 이장한 것은 그런 숭고한 정신과 희생에 대한 우리 사회의 작은 답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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