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9.13 17:46ㅣ최종 업데이트 26.09.13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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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두 살의 소학교 교사인 박정희는 인생의 귀인을 '북방'에서 찾았다. 일본과 만주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가 1939년 3월 31일 자 <만주신문>에 보도된 것은 그가 입학 연령(19세)과 관계없이 군관학교에 들어가고 만주국 장교가 되는 디딤돌이 됐다.

그때보다 두 배의 인생 경험을 갖게 된 마흔네 살(1961년)의 박정희는 쿠데타를 일으킨 직후부터 '동방'에서 귀인을 찾았다.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그해 10월 25일 이케다 하야토 총리를 만난 것은 굴욕적인 수교 조건을 받아들이는 대신 경제 지원을 받아내 군사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한 일이었다.

일본 이어 베트남으로 향한 박정희의 시선

케네디 박정희 한미정상회담 장면(1961. 11. 14.).
▲케네디 박정희 한미정상회담 장면(1961. 11. 14.).국가기록원

이 무렵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정권 안정을 위한 돌파구를 '남방'에서도 모색했다. 그는 1960년에 발발한 베트남전쟁에 참여할 방법을 강구했다.

미국 국무부가 편찬한 <미국외교문서집 1961~1963: 제22권 동북아시아>에 실린 '워싱턴, 1961년 11월 14일 오후 3:30~4:50 회담 비망록'은 박정희-케네디 회담을 정리하면서 "동남아시아 특히 베트남과 관련해 의장(박정희 지칭)은 확고한 반공 국가인 한국은 극동 안보에 기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자리에서 박정희는 이런 말도 했다.


"북베트남은 잘 훈련된 게릴라 병력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은 이런 유형의 전쟁을 위해 잘 훈련된 백만 인력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정규군에서 훈련을 받았지만, 지금은 분리돼 있습니다. 미국의 승인과 지지가 있다면, 한국은 베트남에 군대를 보내거나 지원병을 모집할 수 있습니다."

미국이 베트남전에 본격 개입한 것은 1964년이다. 그런 미국이 1961년에 한국군 파병을 요청했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도 박정희는 '한국에는 정규 군대에서 훈련을 받은 뒤에 제대한 남성이 100만 명이 있다'면서 '정규군이든 지원군이든 파견할 용의가 있다'고 제안했다. 한국 국회에서 베트남 파병에 관한 최초의 동의(1964.7.31)가 나오기 전부터 그런 궁리를 했던 것이다.

베트남 파병을 둘러싼 국내외 반발

정통성이 희박한 군사정권을 유지하고자 외부와의 인연을 모색하는 박정희의 태도는 저항을 초래했다. 굴욕적인 한일협정 체결을 위한 시도는 거국적인 저항을 초래했고, 이는 비상계엄 선포(1964.6.3)로도 막기 힘들었다.

베트남전쟁 개입을 위한 시도는 한일협정만큼의 저항을 초래하지는 않았지만, 역시 상당한 반발을 낳았다. 학생들과 야권이 강력히 반대했고, 미국대사관마저 부담을 느꼈다. <미국외교문서집 1964~1968: 제29권 제1부 한국>에 실린 1965년 3월 30일 자 주한미국대사관 보고서에 따르면, 미 대사관은 파병 문제가 학생들과 야당의 반대뿐 아니라 일반 국민의 불안까지 초래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북한의 위기가 강조되던 반공 국가의 군대가 베트남으로 가게 되면 국민이 불안을 느낄 수 있다고 미 대사관은 예측했다.

베트남 파병이 나라를 위한 결단으로 인식됐다면 국민들이 그런 정서를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자유니 반공이니 하는 명분으로 포장됐지만, 실상은 박 정권이 살아남기 위한 방책에 불과했다.

베트남전쟁에 대한 반대운동은 세계적이었다. 이것은 세계질서에 대한 도전인 68혁명과 관련성을 띠었다. 미국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주도한 제2차 세계대전의 승자다. 그런 미국이 식민지 해방운동의 성격을 띠는 이 전쟁에 개입하는 것은 제국주의의 청산을 훼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반전운동은 베트남인들을 돕는 측면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세계질서의 퇴행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베트남전을 반대하는 그 기운이 얼마나 오래갔는지는 전쟁이 끝난 뒤 4년이 지나 한국에서 발생한 양성우 필화사건에서도 확인된다. 베트남 참전을 비롯해 대한민국 정권의 폭정을 비판한 시인 양성우의 <노예수첩>은 1970년대 중반에 상당한 파장력을 일으켰다.

양성우 시인의 <노예수첩>
▲양성우 시인의 <노예수첩>풀빛

1943년생인 그는 2017년에 발간된 <지금 나에게도 시간을 뛰어넘는 것들이 있다>에서 "그즈음에 내가 쓴 장편시 '노예수첩'은 상당히 많은 부수가 이미 해외에 유포되고 있었다"라면서 "그것은 내가 만나는 외국인 선교사들의 손을 통해서 여러 나라에 흘러 들어갔으며, 특히 미국의 캐더린 엘리자벳 교수와 일본의 다까사끼 쇼지 교수의 손을 통하여 적극적으로 전해지고 있었다"고 회고한다.

'노예수첩'은 한국 민중을 "억울하게 발 묶인 노예"로 지칭한 뒤, 이들이 학살이나 불법연행의 위험성에 노출돼 있다고 고발한다. "논둑에서, 학교에서, 출근길에서/ 아무도 모르게 묶여간/ 사람들/ 검은 차에 실려 가서 돌아오지 않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알고 있느냐"라고 외친다.

'노예수첩'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난을 면치 못하는 현실을 지적한다. "손가락이 닳도록 심어 놓아도/ 밤새도록 땀 흘리며 타작을 해도/ 언제나 곳간은 남의 것이다"라고 탄식한다. 노력이나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착취 구조 때문에 빈곤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을 그렇게 묘사했다.

이 시는 민중에 대한 착취가 정권의 이익을 위한 해외 파병을 통해서도 이뤄지는 현실을 지적한다. 이 시는 "조상들은 팔려 갔다 발목 묶여서/ 해적선에 실려서 포르투갈로"라고 한 뒤, "월남으로 팔려 간/ 내 친구들도/ 이제는 죽어서 돌아오지 않고/ 밀림 속의 진흙으로 사라졌구나"라고 읊는다.

월남으로 팔려 간 내 친구들... 양성우가 쓴 노예수첩

전남 함평에서 태어난 양성우는 1960년 4·19혁명에 참여했고, 5·16쿠데타 뒤 체포돼 퇴학당했다. 이후 전남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근무했다. 그의 삶은 사회생활을 하는 중에도 험난했다. 스물일곱 살 때 시인으로 등단한 그는 서른두 살 때인 1975년에 광주 구국기독회에서 박정희 체제를 겨울에 빗댄 '겨울공화국'을 낭송했다가 교사직에서도 파면됐다.

그런 뒤 논문 발행이나 출판 계통의 일을 하던 그는 '노예수첩'을 발표했다가 또다시 시련을 맞이했다. 저명한 일본 잡지인 <세카이> 1977년 6월호에 이 시가 실린 것이 공안당국을 자극했다. 회고록에 이런 대목이 있다.

"나는 6월 13일 아침 출근길에 성서공회가 들어 있는 종로서적 건물의 입구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서 체포되었다. 그들은 다짜고짜 나를 끌고 그 옆 골목의 갈릴리다방 앞에 세워둔 검은 차에 밀어 넣더니 검은 천으로 내 눈을 가렸다."

'노예수첩'에 적힌 그대로 "출근길"에 "검은 차"에 실려 연행된 그는 긴급조치 제9호 위반 및 형법상 '국가모독죄' 위반 혐의로 서울형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과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은 뒤, 2심에 항소하고 3심에 상고했지만 모두 기각됐다. 1978년 9월 26일, 그에 대한 형이 확정됐다.

'노예수첩'은 한국 민중의 억울한 처지를 전반적으로 다뤘지만, 중앙정보부와 재판부는 베트남전쟁 파병 문제에 특히 주목했다. 재심 재판을 다룬 서울중앙지방법원의 2016년 1월 19일 자 판결문은 그가 체포된 이유에 관한 대목에서 "정부가 비밀 흥정에 의해 몇 푼의 대가를 미끼로 군인들을 월남으로 보내 죽게 하였다는 등으로 묘사"된 부분을 지적했다.

양성우는 베트남 파병을 정권의 이익과 지배-피지배의 관점에서 바라봤다. 정권이 청년들을 미국과 남베트남에 '파병'한 게 아니라 '매도'했다는 시각이었다. 박 정권의 공식 명분인 '공산침략 저지'니 '자유세계 공동방위'니 하는 것들을 허상으로 봤던 것이다.

'노예수첩'에 "검은 차에 실려 가서 돌아오지 않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알고 있느냐"라는 대목이 있다. 그는 검은 차에 실려 갔지만, 돌아왔다. 석방된 뒤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그는 1988년 총선 때 김대중의 평화민주당 후보로 서울 양천갑구에서 당선됐다. 그는 또 다른 의미에서도 '돌아온 사람'이다. 원심판결을 취소하고 무죄를 선고하는 재심 판결을 받아낸 그는 형사 보상 청구소송에서도 승소했다.

박 정권은 정권 유지를 위해 일본뿐 아니라 베트남으로도 눈을 돌렸다. 시인 양성우는 그런 박정희가 한국 민중을 외국 전쟁터에 팔아넘기고 있다고 외쳤다. 그래서 박 정권은 국가모독죄를 적용했지만, 재심 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결과적으로 양성우의 주장이 맞게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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