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시리즈 <심야식당 : 도쿄스토리> 예고편의 한 장면.
넷플릭스
그는 말이 없다. 조언하지도, 훈계하지도, 등을 두드려 주지도 않는다. 음식을 만들고 그저 들을 뿐이다. 솜씨는 좋지만 내놓는 음식이 대단하지도 않다. 다만, 모든 음식에는 그의 정성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사람들은 그 소소한 요리에 '맛있다'를 연발한다. 그는 말 대신 따뜻한 접시로 모든 대답을 하는 존재였다. 괴로운 일로 아파하는 이에게 말없이 술 한 잔을 따라주고, 매장을 닫을라 쳐도 누군가 밥 한 끼 먹고 싶다고 다가오면 기꺼이 다시 불을 켜는 사람이었다.
마스타에게는 이름이 없다. 과거도 베일에 싸여있다. 왼쪽 눈 위에 흉터가 하나 있는데, 무슨 일로 생긴 것인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그가 손님들의 사연을 묻지 않고 묵묵히 요리와 맥주를 내어주는 이유도 자신 역시 말 못 할 상처와 지우고 싶은 과거를 안고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일 테다.
모두가 하루를 마감하고 불을 끄는 밤, 홀로 문을 여는 까닭도 이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낮고 소외된 자들에게 잠시나마 쉴 수 있는 공간을 내어주고, 작게나마 위로 받을 수 있는 틈을 마련해 주기 위함이 아닐까.
그런 마스타에게 점점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나는 맥주를 만들고 매일 손님들을 상대하며 하루를 보낸다. 작가, 강연자, 협회장 같은 타이틀이 있지만, 나의 본업은 결국 매장을 찾아주는 손님들에게 내 맥주와 음식을 내어주는 것이다.
넉살 좋게 손님들과 대화하고 소통하는 성격이라면 좋으련만, 천성적으로 나는 그러지 못한다. 그렇다고 사람을 싫어하거나 마주하는 것을 불편해하는 건 아니다. 그저 매일 접객을 해야 하는 사람치고 외향적이거나 활달하지 못한 성격이란 의미다.
대신 나는 마스타처럼 듣는 것을 좋아하고 맥주로 진심을 전하고 싶어 한다. 그의 밥집처럼 내 맥줏집에서 사람들이 맥주로 행복을 느끼고 위로받았으면 하는 바람이 드라마를 보는 내내 들었다. 아마 그래서 마스타에게 내 모습을 투영했던 것 같다. 이런 공감대가 평상시라면 별로 관심 없었을 일본 드라마를 두 시즌 동안 꿋꿋이 봤던 동력이 되었으리라.
패랭이꽃 맥주
<심야식당 : 도쿄 스토리>는 에피소드마다 등장하는 일본 음식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하지만 나를 정말 궁금하게 만들었던 녀석은 맥주였다. 거의 매회 나오면서도 결코 라벨을 보여주는 법이 없었다. 저 맥주가 무엇일까? 설마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숨길 셈인가?
심야식당 카운터에 앉은 사람들의 음식 옆에는 어김없이 술이 놓여 있었다. 소주와 사케도 종종 보이지만, 주인공은 633미리 갈색 병맥주였다. 진심으로 이 맥주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그런데, 세상에나. 다섯 번째 시즌 최종회를 앞두고서야 맥주 라벨이 살짝 보이는 게 아닌가.
화면을 잠시 정지한 후 한참을 들여다보니, 맥주 라벨 모양과 이름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아치를 그리는 크림색 라벨에 어두운 테두리, 위쪽 곡선을 따라 작은 글씨가 흐르고, 가운데 박혀 있는 꽃문양 밑으로 이름이 보였다.
'나데시코 맥주(Nadeshiko Beer)'.
나데시코(撫子)는 '패랭이꽃', 그중에서도 우리가 '술패랭이꽃'이라 부르는 종이다. 한국 패랭이꽃과 달리 꽃잎 끝이 실처럼 가늘고 깊게 갈라져 있다. 보통 '야마토 나데시코'라고 불린다. 라벨에 오얏꽃처럼 보이는 꽃문양도 나데시코를 상징한 것이었다.
술패랭이꽃은 벚꽃처럼 화려하지 않지만 척박한 환경에서 꿋꿋하게 꽃잎을 피워낸다. 전통적으로 일본에서 나데시코는 겉은 수수하고 가녀리지만 속은 강인하고 심지가 곧은 일본 여성상을 의미한다.
일본 여자 축구 대표팀의 별칭이 바로 '나데시코 재팬'이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일본 전체가 실의에 빠져있을 때, 대표님은 피파 여자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나데시코를 다시 국민들 마음속에 위로와 불굴의 상징으로 각인 시켰다.
▲동료나 친구들과 나누는 맥주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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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의미를 아는 순간, 간판 없는 심야식당의 맥주 이름이 왜 나데시코인지 깨달았다. 마스타가 건네는 맥주는 생명력이었다.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도쿄의 주류 사회의 인물들이 아닌 상처 입고 소외된 이들이다. 그렇지만 심야식당 손님들은 비루하거나 처절하지 않다. 자신의 삶을 인정하고 하루를 기꺼이 털어버린다.
나데시코 맥주는 특별한 누군가를 위한 전유물이 아니다. 척박한 일상을 유쾌하게 버텨내는 모든 소시민을 위한 헌사다. 바위나 아스팔트 틈에서도 쨍하게 피어나는 패랭이꽃처럼 심야식당은 슬픔을 곱씹는 대신 왁자지껄한 온기로 신주쿠의 밤을 채우고 있었다.
홀로 즐기는 독주와 달리, 맥주는 곁에 앉은 이웃과 잔을 부딪칠 때 비로소 의미가 완성된다. 동료나 친구들과 나누는 맥주 한 잔이 내일 또 하루를 살아갈 힘이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오늘 밤, 당신의 그 잔에도 명랑한 패랭이꽃 한 송이가 피어나기를.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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