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미냐르 <포샤의 죽음> 17세기 / 귀도 레니 <루크레티아> 162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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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화가 피에르 미냐르(1612~1695)의 <포샤의 죽음>도 이를 반영한다. 포샤는 카토의 딸이자 카이사르 암살로 유명한 브루투스의 아내였다. 그녀의 기록도 영웅으로 강조하려는 흔적이 역력하다. 남편이 카이사르 암살 음모를 숨기자, 얼마나 믿을 만한 여자인지를 확인시키려 칼로 허벅지를 찔러 고통을 참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브루투스를 비롯한 공화파 의원들은 기원전 44년 카이사르 암살에 성공했다. 이후 옥타비아누스를 중심으로 한 카이사르 추종 세력과 브루투스가 포함된 공화정 지지 세력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다. 내전에 패배하며 남편이 죽을 위기에 처하자, 그의 안위를 극도로 걱정하다가 헌신의 증명으로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로렌스 그림의 카토처럼, <포샤의 죽음>에서 그녀의 눈은 마지막 순간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다. 위로 향하는 눈길은 종교화에서 신을 향한 믿음을 담은 순교자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칼이나 올가미처럼 자살을 떠올리게 하는 도구가 보이지 않아 의아스럽다.
집게를 이용해 든 붉은 무언가가 끔찍한 마지막을 전해준다. 플루타르코스는 "그녀는 불에서 타오르는 숯을 집어삼키고 입을 꽉 다문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라는 기록을 전한다. 그는 이 죽음의 방식에 의문을 품었지만, 대다수 역사가가 서술한 바를 소개한다.
키케로가 브루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슬픔을 위로하며 포샤를 "세상에 전례 없는 여인"이라고 한 점을 고려할 때, 적어도 남편을 걱정하며 자살로 생을 마쳤고 로마인들이 칭송의 태도를 지녔음은 분명해 보인다. 영국 극작가 셰익스피어도 <줄리어스 시저>에서 이글거리는 숯불을 삼켜 목숨을 끊는 방식으로 포샤의 비극적인 최후를 묘사했다.
이탈리아 화가 귀도 레니(1575~1642)의 <루크레티아>는 정절을 침해당한 여자가 명예를 지키기 위해 선택한 자살을 다룬다. 칼을 들어 자기 가슴을 찌르려는 순간이다. 포샤와 마찬가지로 순교자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한쪽 옷이 열려 가슴이 드러나 있고 뒤로는 흐트러진 침대가 보여서 그녀가 겪은 치욕스러운 경험을 알려준다.
루크레티아는 기원전 510년에 폭정을 일삼던 로마 타르퀴니우스 왕정의 왕자 섹스투스에게 굴욕을 겪은 뒤 목숨을 끊었다.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소설가 조반니 보카치오의 <유명한 여자들>에 비교적 자세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섹스투스가 남편의 친척이기도 해서 그녀는 정중하고 친절하게 맞았다. 흑심을 품고 몸을 범하려 들자 거부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하지만 왕자는 남자 하인과 간통해서 두 사람을 죽였다는 소문을 내겠다고 위협하며 강제로 욕망을 채웠다. 악몽 같은 밤이 지나고 난 후 그녀는 아버지·남편·친척을 전부 불러 모았다.
옷 속에 숨겨 놓았던 칼을 빼 들고 말했다. "비록 내 죄가 사면되었다 할지라도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나의 본보기 때문에 어떤 여성도 치욕스럽게 살지 않을 것입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칼을 가슴에 꽂았다. 보카치오는 이 행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그녀의 순결함은 그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의 불명예에 대해 그처럼 가혹하게 속죄했다는 것은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녀의 행동은 방탕한 젊은이들이 추잡한 범죄로 파괴했던 명성을 회복했을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로마를 자유로 이끌었다."
자살 방식으로 순결한 마음을 입증하고 명예를 지키려 한 행위를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며 옹호한다. 나아가 자살을 통해 로마를 자유로 이끌었다고 한다. 개인적인 명예의 회복만이 아니라 나라를 구하는 데 큰 영향을 준 행위로 규정한다.
타르퀴니우스는 이전 왕을 살해하고 권력을 차지했다. 반대파를 처형하고 원로원을 무력화했으며, 백성을 가혹한 강제 노역에 동원하는 등 시민들의 권리를 무참히 짓밟았다. 섹스투스 왕자도 폭군인 아버지 못지않게 난폭하게 권력을 휘둘렀다. 평민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지만, 독재자의 무자비한 폭력에 눌려 신음만 할 뿐이었다.
왕자의 루크레티아 능욕 사건이 벌어지고, 자살로 명예를 지켰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로마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녀의 행위가 용기를 불러일으켰고, 민중의 불만이 분노로 급변하여 봉기가 일어났다. 보카치오는 그녀의 비극적인 죽음이 왕정을 무너뜨리고 기원전 509년 로마 공화정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여겼기에 로마를 자유로 이끌었다고 한 것이다.
이처럼 로마에서 모든 자살이 죄악으로 치부되지는 않았다. 때에 따라 국가를 수호하고 명예를 지키는 숭고한 행위로 인정됐다. 역사가들은 애국이나 명예를 명분으로 한 자살을 고결함을 나타내는 징표로, 본받아야 할 교훈으로 삼았다. 하지만 노예의 자살은 노동력 약화로 사회에 해악을 주는 행위로, 군인·범죄자의 자살은 책임을 저버리는 짓으로 비난을 받았다.
충성스러운 전사의 증명

▲우타가와 구니카즈 <할복> 19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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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을 명예의 실현 수단으로 삼았던 대표적인 사례가 일본 무사들의 할복이다. 사무라이의 명예와 충성심을 상징하는 극단적 형식이다. 19세기 중후반에 활동한, 일본 특유의 다색 목판화인 우키요에 대가 우타가와 구니카즈의 <할복>은 그 결정적인 순간을 담았다.
건장한 체격의 무사가 상체를 벗어 젖힌 상태에서 배에 칼을 대고 찌르는 중이다. 단숨에 생명을 끊기 위해, 복부의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가르는 자세를 취한다. 흰 천을 두른 칼날 중간을 잡은 것도 이를 수월하게 하려는 의도다. 단호한 결의를 보이려는 듯 입을 굳게 다문 모습이다. 앞에는 할복의 사유 혹은 유언을 적은 것으로 보이는 종이가 놓여 있다.
자살하는 당사자나 일본인의 사고방식에 숭고한 결단으로 자리 잡았기에 엄격한 의식 절차가 생겼다. 보통은 증인과 보조자가 참석한 가운데 '의식'을 치른다. 정성을 다하는 마음을 위해 목욕으로 몸을 청결하게 한다. 사무라이 복장을 정식으로 갖추고 단정한 머리 모양을 해야 한다. 칼날을 흰 종이나 천으로 감싸 쥐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배를 가른다. 마지막으로 고통이 오래가지 않도록 대기하던 보조자가 신속하게 목을 잘라준다.
할복은 여러 측면에서 무사의 자부심이었다. 먼저 주군에게 자신의 결백이나 충성심을 증명하는 수단이었다. 일본인들이 영혼과 진심이 담겨 있다고 믿는 배를 가름으로써 진정성을 증명하는 의미가 있었다. 다음으로 주군의 죽음이나 전쟁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는 숭고한 속죄 수단이었다. 나아가서는 적에게 포로로 잡혀 치욕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기보다는 할복하는 게 무사도의 윤리였다.
역사적으로 1873년에 공식적으로 할복이 금지되었으나 이후에도 정신적인 유산으로 이어지면서 종종 유사한 사례가 생겨났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일본이 미군 함대에 대한 타격을 목적으로 조직한 가미카제 특공대도 그 일환이다. 전세가 불리해지고 제공권을 상실하자, 전투기를 조종하여 미군 함정에 직접 충돌하는 자살 폭탄 방식으로 맞섰다. 가미카제가 '신이 일으키는 바람'이라는 뜻이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영웅적인 행위로 인식되었다.
가미카제 특공대를 만든 해군 군령부 차장은 패전 후 할복한 뒤 고통 끝에 15시간 만에 사망했다. 연합군에 항복할 때 일본 육군 대신은 "패전의 책임을 죽음으로 사죄한다"라며 할복했다. 1970년에는 극우 사상에 경도된 일본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가 자위대원들에게 쿠데타를 일으키도록 촉구하며 자위대 총감실에서 할복한 사건이 충격을 주었다. 일본의 보수 우익 세력에게는 이 모든 자살 행위가 여전히 애국적·영웅적 행위로 통하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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