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은 '우리들의 밥상' 특별전에서 소개한 '일반시국은' 유묵은 친일반민족행위자 박중양(1874∼1959)의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고 7일 밝혔다.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돼 있던 '일반시국은' 유묵.
국립중앙박물관
그런데 두 아들의 감격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벌어졌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 7일 자 보도자료에서 "특별전 '우리들의 밥상'(2026.7.1.~10.25)에 전시되었다가 외부의 제보로 철수한 유목 '일반시국은'의 필자 문제에 대해 전문가 조사를 진행하고, 해당 작품이 애국지사 박원근(1912~1950)의 유목이 아니라 친일반민족행위자 박중양의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두 아들의 모습이 보도된 지 사흘 뒤인 지난달 10일, '박원근은 친일파 박중양의 또 다른 이름일 수 있다'라는 <제천뉴스저널> 주은철 대표의 제보가 있었다. 그런 뒤 박물관이 사실 조사를 벌인 결과로 위와 같은 결론이 도출됐다. 독립운동가의 작품이라며 전시한 유묵이 하필이면 친일파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명되는 어이없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박물관은 1874년생인 박중양이 일본 유학 기간(1897~1903)에 박원근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 박중양이 유학 기간에 유묵을 팔아 돈을 벌었다는 점, '일반시국은'의 필체가 박중양의 것과 유사하다는 점, '한인 박원근'의 '한인'이 재일 유학생들이 일본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 많이 사용한 표현이라는 점, '일반시국은'에 찍힌 인장 문구가 서예가 김태석이 1932년에 박중양에게 새겨준 인장 문구와 일치하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일본 유학 기간에 유묵을 팔았다'는 설명과 '1932년에 김태석이 새겨준 인장 문구가 적혀 있다'는 설명이 상호 불일치하는 측면도 있지만, 그 문구가 나중에 추가됐을 수도 있으므로 이것만으로는 박물관의 설명이 부족하다고 판단하기 어려울 듯하다. 박중양이 원근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서예 작품을 판 것이 사실인 데다가 필체가 유사하다는 전문가 감정도 나왔으므로, '일반시국은'이 그의 작품일 가능성을 신뢰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박중양의 또 다른 이름인 '원근'은 관례(성인식) 때 받는 자(字)일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중양과 원근' 사이에 '명(名)과 자' 사이에 나타나는 상호 관계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자'를 지을 때는, 출생 직후에 지은 '명'의 의미를 강화해 주거나 그 의미를 제어하거나 혹은 '명'에 없는 의미를 채워주곤 했다. 예컨대, 밝을 양(亮)을 '명'으로 사용한 전략가인 제갈양의 '자'는 매우 밝음을 뜻하는 공명(孔明)이다. 이 경우에는 '자'가 '명'을 강화했다.
성리학의 집대성자인 주자('주선생'이라는 의미)의 이름은 주희(朱熹)다. 그의 '명'에는 '빛날 희'가 들어갔다. 반면, 그의 '자'는 '매우 어둡다, 크게 감추다'를 뜻하는 원회(元晦)다. 이 경우에는 '자'가 '명'을 견제한다.
박중양의 '명'인 중양(重陽)은 매우 동적인 이미지를 띤다. 말 그대로 하면, 태양이 두 개라는 의미다. 그의 성격은 이 이름과 매우 유사했다. 2022년 5월 29일 자 기사인 '
친일파의 재산 – 박중양' 편에도 소개됐듯이, 그는 중용의 덕목과 거리가 먼 개성의 소유자였다.
1894년에 동학혁명을 진압하겠다며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의 위용을 보고 스스로 일본인 이발소를 찾아가 상투를 자른 일, 조선 상인들의 텃세에 막혀 대구성 내에 진입하지 못하는 일본 상인들을 돕고자 일제 강점 이전에 경북관찰사 지위를 남용해 대구 성벽을 허문 일, 이승만 대통령의 권력이 절정기를 달리던 1957년에 그를 모독하는 책자를 써서 경무대에 보낸 일, 이로 인해 검찰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비상식적인 친일 발언을 너무 많이 해서 검사가 정신감정을 의뢰한 일 등은 중양이라는 '명'과 그의 성격이 비슷했음을 보여준다.
반면, '원근(源根)'은 물과 흙과 뿌리의 이미지를 풍긴다. 중양은 태양과 하늘을 연상시키는 반면, 원근은 지표면이나 지하를 떠올리게 만든다. 중양과 원근의 이 같은 대비적 혹은 상호보완적 관계는 원근이 그의 '자'였을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준다.
'아버지의 글씨를 처음 봤다'고 말한 점에도 주목
단발령이 있기도 전에 스스로 단발한 박중양은 창씨개명이 강요되기 훨씬 전인 1903년부터 야마모토 마코토(山本信)라는 이름을 함께 썼다. 산과 뿌리와 신뢰를 강조하는 이 이름도 '원근'과 통하는 데가 있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일반시국은'의 작가인 박원근이 박중양일 가능성이 있다.
지하 활동을 하는 사회주의자 박원근이 국가주의 냄새가 풍기는 '국은'이라는 붓글씨를 써서 판매했다는 이야기보다는, 20세 때인 1894년부터 일본에 매료돼 광적인 친일 활동을 벌인 박중양이 그런 글귀를 썼다고 보는 편이 훨씬 더 상식에 가깝기도 하다.
위 공훈록에서 확인되듯이 독립운동가 박원근은 인쇄업을 경영하고 활자체 글을 써서 항일 이념을 전파했다. 그가 서예 작품을 남겼다는 이야기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는다. JTBC 뉴스에 나온 아들이 '아버지의 글씨를 처음 봤다'고 말한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묵에 등장하는 박원근이라는 이름을 별 근거도 없이 독립운동가 박원근과 연관시킨 것은 국립중앙박물관의 대형 실수다. 박물관은 위 보도자료에서 "애국지사 박원근 유가족께 조사 경위와 결과를 설명하고 거듭 사과드릴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일반시국은'이 박중양의 작품이고 그것이 일본인에게 팔렸다면, 이것은 그가 이 문구의 뉘앙스를 몰랐거나 아니면 무시했거나 혹은 자기 식대로 해석한 결과일 수도 있다. '일반시국은'은 임진왜란 의병장인 영규대사가 했던 말이라고 알려져 있다. 한 그릇 밥도 나라의 은혜 없이는 먹을 수 없으니 일본군이 쳐들어온 이 상황에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할 때 그 문구가 사용됐다고 한다.
영규대사가 그 글귀의 창안자는 아니다. 중국 송나라(남송) 시인인 육유(陸游, 1125~1210)의 '서벽(書壁)'이란 작품에도 그것과 비슷한 "일반역군은(一飯亦君恩)"이 나온다. 여기서는 나라의 은혜가 아닌 임금의 은혜로 표기됐다.
남송의 채연(蔡淵, 1156–1236)은 '초도만성(初度謾成)'이라는 시에서 "한끼 밥도 임금의 은혜이니 어찌 갚을꼬(일반군은가이보, 一飯君恩何以報)"라고 읊었다. 그런 뒤, "용사들은 편안히 있고 말은 가을에 살찌는구나"라고 말했다. 이 작품은 병역의무를 이행하는 방법으로 '군은'을 갚으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측면이 있다.
영규대사는 과거에 사용됐던 표현을 '일반시국은'으로 바꿔 의병부대 조직에 활용했다. 이처럼 항일의 뉘앙스가 들어간 글귀를 친일파가 써서 일본인에게 팔았다면, 이 역시 역설적인 상황이다. 박중양이 친일파답지 않은 실수를 한 셈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박중양과는 다른 형태의 실수를 범했다. 친일파의 작품으로 보이는 유묵 앞에서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무릎 꿇고 눈물을 글썽이게 만든 것은 이만저만한 실수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