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 5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 오벌 오피스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의약품 관련 행정명령에 서명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의약품의 가격 결정 구조 역시 정치권력의 의지에 따라 완전히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살기 위해 약을 먹어야 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제약기업에는 공정한 가격보다 훨씬 비싸게 팔 유인이 늘 작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보건당국은 약값을 억제하기 위해 정치적·제도적 역량을 동원해야 한다.
하지만 사정이 다른 나라도 있다. 미국이 대표적이다. 미국은 제약산업을 보호하고 지원한다는 기조에 따라 오랫동안 제약기업이 요구하는 가격을 최대한 수용해 왔다. 그 결과 공적 의료보험인 메디케어(Medicare) 이용자들은 살인적인 약값 폭탄에 시달려야 했다.
대통령 선거 당시 약값을 잡겠다며 공약했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부임 초기 "주요 선진국 수준으로 약값을 낮추겠다"며 '최혜국 약가 정책(MFN)' 행정명령을 발표했다. 미국 메디케어·메디케이드 서비스센터(CMS)는 지난해 12월 두 개의 시범 사업인 글로브(GLOBE)와 가드(GUARD)를 발표했다. 이 프로그램은 국제 벤치마크 가격을 산정해, 메디케어 Part B와 Part D의 약값이 그 기준을 넘으면 차액만큼 제약사가 환급하도록 하는 구조다. 해외에서 더 싸게 팔았다면 그 차액을 다시 토해내라는 것이다.
GLOBE는 올해 10월 1일, GUARD는 내년 1월 1일 시행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 시행이 코앞인 지금까지 최종 규칙이 나오지 않았다. 대상 의약품 목록도, 기준이 될 국가도, 환급액 산정 방식도 여전히 미지수다.
이 침묵을 두고 두 시범 사업이 애초에 제약사를 압박하기 위한 지렛대였을 뿐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트럼프 행정부는 두 모델의 출범과 별개로 주요 제약기업들과 약가인하 협상을 병행했다.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9월까지 26개 제약회사와 비슷한 형식의 협상 결과를 발표했다. 협상의 구체적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메디케이드 약값을 최혜국 약가 수준으로 낮추고 국내 생산 시설을 증축한다는 것이 골자로 알려져 있다. 그 대가로 기업들은 관세를 면제받았고, 일부는 GLOBE와 GUARD의 적용까지 면제받았다.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이 있다. 미국의 두 공적 프로그램은 약값 구조가 전혀 다르다. 메디케이드는 제조사가 미국 내 최저가를 보장하는 조항을 두고 있고 협상을 통한 인하 기전도 있다. 반면 메디케어는 오랫동안 단순한 상업적 계약에 의존해 제약사가 부른 값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더 비싸고 더 문제였던 쪽은 메디케어다. 바이든 전 대통령이 메디케어 약가협상 프로그램(IRA)을 도입해 2026년부터 소수 신약의 가격 인하 협상을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트럼프 행정부의 약가인하가 실질적 효과를 내려면 메디케어를 겨냥한 GLOBE와 GUARD가 관건이었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역할을 부각시키기 위해 개별 기업과의 협상을 앞세우면서 제도로 남을 프로그램은 사장시키고 있다. 협상은 정권이 바뀌면 사라지지만, 제도는 남는데도 말이다.
'혁신 신약'이라는 감투, 높아지는 약값
제약업계는 오랫동안 한국의 약가제도 문제를 제기해 왔다. 정부가 혁신 신약에 대해 충분히 보상하지 않아 신약이 빠르게 도입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여기에 더해 국내 제약산업 육성을 위해 신약 가격을 더 높게 책정해 주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정부는 최근 신약 약가제도를 개편하며 희귀질환 치료제의 가격 기준을 완화하고 사후적으로 보완하는 '신속 등재 시범 사업'을 발표했다. 시범 사업을 토대로 대상 범위를 확대할 예정인데, 이는 그동안 보건당국이 약가를 엄격하게 통제해 오던 패러다임의 대대적인 변화를 예고한다. 그뿐만 아니라 약의 적정 가격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는 점증적 비용효과비(ICER) 임계값을 상향하기 위한 연구용역에도 착수했다.
이러한 일련의 제도 변화는 약값을 높이려는 제약 자본과 "국산 신약이 해외에서 비싼 가격에 판매하기 위해 국내 약가를 높여야 한다"는 정치권력의 이해관계가 맞아 작동한 결과다. 환자와 건강보험이 감당해야 할 약값 부담보다 제약산업 육성이 앞선 것처럼 보여 씁쓸함만 남긴다.
약의 효과는 과학이 판단하지만, 그 약을 언제 허가할지, 얼마에 팔지, 누구에게 지원할지는 정치에 강한 영향을 받는다. 문제는 방향이다. 힘이 국민을 보호하고 부담을 낮추는 쪽이 아니라 제약산업을 지원하는 쪽으로만 기운다면, 우리는 앞으로도 같은 질문을 계속 듣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약은 왜 이렇게 비싼가, 이 약은 왜 구할 수 없는가, 이 약은 정말 필요한 약이 맞는가.
약값 부담은 소득이 낮을수록 무겁게 내려앉는다. 부의 양극화가 어느 때보다 극심해지는 지금이라면 더욱 그렇다. 정치권력이 제약 자본의 달콤한 유혹에서 벗어나, 오롯이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가리키는 바른 나침반을 되찾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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