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9.09 07:14ㅣ최종 업데이트 26.09.09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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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노동, 운동, 대중문화, 기타 등등... 그러니까 오늘의 세상 전부는 마치 거대한 농담같습니다. 거창하지만 정작 진심이라곤 없는 그런 허무한 농담. 그러나 그 허무한 농담 속에서 하나의 진실이나 한올의 진심을 길어내는 것이 모든 말하기와 글쓰기 의무일 것입니다. 거창한 농담의 세계에서 작고 소소하지만 소중한 한 올의 진심을 길어올리는 이야기를 씁니다.[기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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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 (해당 기사와 관련 없습니다)연합뉴스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를 좋아한다. 세종이 사대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글을 만드는 이야기. 특히 사대부를 대표하는 정기준이라는 인물과 세종이 만나 대립하는 장면을 가장 좋아한다. 이 장면에서 둘은 '정치의 본질'에 대해 토론한다.

세종은 정치의 본질이란 책임이기 때문에, 모두가 지식과 정보를 취득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지식과 정보를 통해 자기가 사는 세계를 상상하고 그려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것이 모두가 책임을 나누어지며 자기의 삶, 자기의 정치를 책임지는 일이라고 말한다.


반면 정기준은 정치의 본질이란 책임이기 때문에 책임을 질 수 없는 이들이 지식과 정보를 너무 많이 얻고 무분별하게 발화하게 되면 책임을 지지 않는 말과 글만이 넘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모두의 책임이라는 말은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언론은 기본적으로 권력을 분산시키는 기능을 수행한다. 지식과 정보가 고여있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게 하며, 그곳에서 발생한 권력을 감시하고 해체한다. 그러나 이건 뒤집어서 말하면 언론이 정보를 고이게 하고 권력을 집중시키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의 언론은 꽤 오랫동안 실제로 그런 역할을 수행했고, 그러다 보니 그 자체로 권력이 되기도 했다. 이제는 유명무실해졌지만, 가장 많은 독자를 보유하고 있던 <조선일보>의 사주는 한때 '밤의 대통령'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언론개혁'은 사회가 조금 더 나아지길 바라는 사람들의 숙원이다. 언론이 제 기능을 해 준다면 우리 사회는 좀 더 평등해지고, 평화로워지고, 민주적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스스로 펜과 마이크를 쥐기 시작했다. 때마침 세상의 기술도 같은 방향으로 발전했다. 인터넷의 발달로 훨씬 더 많은 정보와 지식이 발생하고 더 쉽게 사람들에게 찾아들었다.

스마트폰과 SNS의 시대엔 누구나 글을 쓰고 사진과 영상을 찍을 수 있었다. 지면과 마이크를 독점함으로써 스스로 권력이 된 언론들은 '재래식 미디어'라고 불리게 됐다. 이제 사람들은 9시 뉴스나 조간신문을 기다리지 않는다. 바야흐로 뉴미디어의 시대가 열렸다.

뉴미디어 시대에 나타나는 '책임'의 부재

SNS와 뉴미디어의 시대가 열렸을 때 <뿌리 깊은 나무>의 세종이 바라던 세상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진 것으로 생각했다. 모두가 말할 수 있고, 자기의 언어로 세상을 그리고, 각자의 세계를 견주며 나아가는 세상. 그렇게 만들어진 세상을 함께 살고, 그 때문에 빚어진 갈등은 함께 해결하며 책임지는 세상. 그런데 오늘의 현실은 그보다는 드라마 속 정기준이 말했던 세상에 더 가까워 보인다.

글을 읽고 말을 하는 것은 너무도 즐거운 일이기 때문에 모두가 자기의 말만 할 것이고, 그 때문에 빚어진 혼란에 대해선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을 것이라던 우려. 최근 한 유튜브 시사 방송의 진행자는 대통령의 지지율이 떨어지는 까닭이 장관을 비롯한 정부 요인들이 자신의 방송에 나와 국정을 홍보하고 지지층의 결집을 꾀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거대 유튜버의 자아 비대라고 웃고 넘길 수만은 없다. 대통령과 정부의 지지율이 방송 출연 여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인식은 그 자체로 과거 언론이 정보를 독점하고 권력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던 '재래식 언론'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슬프게도 오늘의 현실에서 그것은 일정 부분 사실로 입증되고 있다.

주요 일간지와 9시 뉴스가 맡던 역할은 이제 유튜브와 커뮤니티가 차지하고 있다. '모두가 말할 수 있기 때문에 마이크의 독점 같은 것은 없다'라는 것은 뉴미디어 시대에 대한 환상에 불과했다. 레거시 미디어는 뉴미디어라고 이름을 바꾸었을 뿐 언론이 기능하고 권력이 생성되는 구조는 놀랄 만치 똑같다. 문제는 이것을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유튜브를 중심으로 한 뉴미디어의 언론인들은 여전히 뉴미디어의 환상 속에서 살고 있다. 자기가 가진 힘과 권력의 무게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 그래서 저런 자아 비대의 목소리도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나타나는 현상은 '책임'의 부재다. '뉴미디어 시대엔 모두가 마이크와 펜을 갖고 있다'라는 알리바이는 마이크와 펜의 감당치 못할 무게를 책임지려는 노력을 삭제한다. '레거시'라 부르든 '재래식'이라 부르든 과거의 언론과 같은 문제를 보이는 미디어에 왜 '새롭다'라는 이름을 붙여야 할까. 개인이 말할 자유와, 수십만 명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미디어의 발화는 같지 않다. 전자는 자유의 문제지만 후자는 이미 권력의 문제다. 뉴미디어의 문제는 그 둘 사이에서 늘 편리한 자리를 선택한다는 데 있다. 영향력을 행사할 때는 언론이고, 책임을 요구받을 때는 개인 방송으로 돌아간다.

언론사의 데스크와 편집국과 취재 윤리는 권위를 만들기 위한 장치인 동시에 책임을 묻기 위한 장치였다. 언론의 시스템이란 결국 어떤 말을 세상에 내놓기 전에 한 번 더 묻는 구조다. 이 말은 사실인가, 이 말을 내놓아도 되는가, 틀렸다면 누가 바로 잡을 것인가, 누가 책임질 것인가를 묻는 시스템. 이 과정을 게이트키핑이라고 불러도 좋고 취재 윤리나 보도 윤리라고 불러도 좋다. 다만 묻고 싶은 것은, 내 말과 그 말에 영향 받은 사람과 사회에 대한 책임을 묻는 장치와 과정이 지금의 뉴미디어들에 있느냐는 것이다.

당신의 좋댓구알은 정말 당신의 생각인가

<뿌리깊은 나무>에서 세종과 정기준이 토론하는 장면
▲<뿌리깊은 나무>에서 세종과 정기준이 토론하는 장면SBS 옛날드라마 빽드 캡처

그러나 미디어의 권력은 제작자 혼자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조선일보만 믿던 어르신들이나, 내가 구독하는 유튜브의 이야기만 믿는 지금의 우리나 '독자'에서 '시청자'로 변했을 뿐 그저 모든 이야기와 정보를 수용하기만 할 뿐이다. 그렇게 구독하고, 공유하고, 추천하고, 반복해서 소비하는 사람들이 그 권력을 함께 만든다.

결국 이 새로운 미디어의 권력을 만들어낸 것도, 과거 재래식 언론의 권력을 만들어낸 것도 독자이고 시청자인 우리다. 하여 필요한 것은 미디어 리터러시다.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객관적으로 검토하고, 끊임없이 묻고 따지고 다투기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 그러니까 뉴미디어 시대의 환상, '모두가 마이크와 펜을 갖고 각자의 생각과 세계를 견줄 수 있다'라는 환상에서 '모두'를 맡고 있는 우리는 지금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당신의 좋댓구알(좋아요, 댓글, 구독, 알림 설정)은 정말 당신의 생각이고 당신이 그리는 세계인가.

다시 <뿌리 깊은 나무> 이야기. 드라마에서 결국 훈민정음을 반포한 세종에 맞서 사대부들은 한글을 '천한 글자'로 만든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 배우지 못한 사람들, 여자들이 쓰는 글자로 만들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그 결과 '언문'이라 불린 한글은 반포 후에도 수백 년 동안 널리 쓰이지 못한다. 세종이 바랐던, 모두가 자기의 언어를 갖고 자기의 세계를 그리는 세상이 그만큼 늦춰졌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 결국 우리는 말과 글을 찾았고, 떠들고 싸우고 쟁명하며 세계를 발전시키고 있다. 정기준의 우려가 현실이 됐다고 해서 글자를 빼앗을 수는 없다. 더 많은 사람이 읽고 쓰고 말할 수 있는 세계는 분명 이전보다 나은 세계다. 다만 말할 권리를 얻었다면 그 말이 만들어낼 세계에 대한 책임도 함께 져야 한다. 세종이 바랐던 것이 모두가 말하는 세상이었다면, 이제 우리가 만들어야 할 것은 모두가 자기 말의 무게까지 감당하는 세상일 것이다. 아직 뉴미디어가 이룰 더 넓은 세계의 환상에서 깨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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