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8.15광복절 기념식장에 참석한 맥아더 장군(왼쪽)과 이승만 대통령
맥아더기념관
이승만 정부 2년 차인 1949년을 강타한 대형 이슈 중 하나는 '국회 프락치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징역 6년 형을 선고받은 국회의원 김옥주(1914~1980)의 아들이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진실 규명을 재신청했다는 보도가 지난 5월 말에 있었다.
김옥주의 아들인 김진원씨는 윤석열 대통령이 임명한 박선영 위원장이 재임할 당시인 2025년 4월 15일에 진실 규명 결정을 받은 일이 있다. 보도에 따르면, 그는 1년 만인 금년 4월 17일에 재신청을 했다. 2025년의 진실 규명 결정이 "알맹이가 빠진 50점짜리"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재신청 사유다.
진실화해위원회의 <2025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제31권 '국회 프락치 사건' 편은 김옥주·김병회 두 의원에 대한 체포·구금·수사 등이 불법이었다면서 "이 사건은 피해자가 국가로부터 헌법이 보장한 신체의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 양심의 자유를 침해당하였고, 피해자의 친족들이 사생활을 보장 받을 권리가 침해당한 중대한 인권침해사건"이라고 규정했다. 김진원씨는 이 같은 인권적 측면뿐 아니라 사건 자체가 조작인가 아닌가 등도 규명돼야 한다고 말한다.
지난 2월 26일 출범한 제3기 진실화해위원회가 다시 맡게 된 국회 프락치 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독재정치가 발생하는 초기 과정을 보여주는 단서다. 2024년 12월 3일에 민주주의를 빼앗길 뻔했던 지금의 대한민국에 시사하는 바가 큰 사건이다.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부터 30년 전에 3·1운동이 있었다. 1919년 당시의 한국인들은 무조건적인 독립이 아니라 민주공화정 형태의 독립을 희망했다. 그런 열망을 반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임시헌장 제1조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규정했다. 일본을 몰아내는 것뿐 아니라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실현시키는 것도 당시 한국인들의 열망이었음을 반영하는 선언이었다.
그렇게 표출된 민족적 열망이 해방으로부터 불과 4년 만에 좌초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 것이 국회 프락치 사건이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이 공화정 궤도를 이탈해 독재정으로 갈 조짐이 있음을 보여줬다.
미군정 지지하에 해방정국 중심인물이 된 이승만
정부수립 당시의 이승만 대통령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여의도 정치와 거리가 멀었다. 33년간 미국에 거주한 그는 국내 기반이 취약해 의회에 대한 영향력이 낮았다. 미군정의 지지하에 해방정국의 중심인물이 된 그는 200명을 뽑는 1948년 5·10 총선에서 확실한 자기편을 55명밖에 당선시키지 못했다. 그를 가장 열렬히 지지하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제1당이 되기는 했지만, 의석수가 전체의 4분의 1을 약간 넘는 데 그쳤다.
김성수가 이끄는 한국민주당(한민당, 29석), 지청천이 이끄는 대동청년단(12석), 이범석이 이끄는 조선민족청년단(6석), 채규항이 이끄는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2석) 등도 이승만을 지지했지만, 이런 그룹들은 이승만의 직접적 영향을 받지 않았다. 범여권으로 묶일 수 있을 뿐이었다.
이승만은 그 같은 범여권의 지지하에 대통령이 됐다. 그런데 그는 대통령이 된 직후의 초대 내각 구성 과정에서 핵심 우군인 한민당을 저버렸다. 김성수가 정치·경제적으로 막강한 거물이 아니었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김성수와 등진 일은 국정 안정보다 차기 대선을 우선시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가장 강력한 보수세력인 한민당과의 결별은 이승만이 정치 공세에 노출될 위험성을 높였다. 바로 이 상황에서 이승만에게 제동을 건 세력이 주로 무소속인 소장파 국회의원들이다. 5·10 총선 때 무소속 당선자는 85명이었다. 소장파 지도자들은 그중 상당수에 대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이승만을 압박했다. 어느 정당도 과반수를 얻지 못한 상황이 이들의 활동 공간을 넓혀줬다.
정부수립 직후에 두각을 보인 소장파 의원들은 김옥주·김병희를 비롯해 강욱중·김약수·노일환·박윤원·이구수·이문원 등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친일청산 문제를 매개로 이승만을 압박했다.
소장파들은 정부수립 한 달여만인 그해 9월 22일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을 통과시켰다. 이승만은 친일청산을 억누른 미군정의 기조를 이어받고, 친일 경찰 및 친일 기득권층과 제휴했다. 이승만의 정당성을 부정하고 그의 우군들을 감옥에 넣을 수 있는 법률이 소장파들의 주도하에 제정됐다.
이에 맞서 이승만도 반격의 구실을 모색했다. 그는 반민법 통과로부터 근 1개월 만에 그 구실을 찾아냈다. 육군 제14연대 장병들이 제주 4·3항쟁을 지지하면서 궐기한 10월 19일의 여순항쟁(여순사건)은 그가 반공 이데올로기를 손에 쥐고 공포정치의 시동을 거는 구실로 악용됐다.
14연대 장병들은 공산주의가 아닌 분단반대 및 제주도민 지지를 외쳤지만, 이승만은 여순항쟁을 반공 이데올로기 확립의 계기로 활용했다. 이승만은 친일 군부와 함께 여순항쟁을 진압한 열기를 타고 항쟁 다음 달인 11월 20일 국가보안법의 국회 통과를 관철시켰다. 이는 친일청산세력이 아닌 그 반대 세력이 반공을 빌미로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그러자 소장파 지도자들은 이승만의 반공 드라이브에 맞설 새로운 카드를 꺼내 들었다. 자주와 평화가 그것이다. 그들은 주한미군 철수와 평화통일을 외쳤다. 반공 정책의 후원자인 미국의 영향력을 감소시키고 반공 정책의 토대인 남북분단의 구속력을 약화시키는 시도였다.
국회 프락치 사건이 현대사에서 갖는 중차대한 의미

▲1949년 국회 첩자(프락치)사건(고 김옥주, 고 김병희) 진실규명결정서(2025.4.15)
진실화해위원회
그해 11월 22일 자 <독립신보>에 따르면, 국회의원 18명은 '미군 계속주둔 결의안'을 반대하며 20일 국회 회의장에서 퇴장한 동료 의원들에 대한 지지를 표시하면서 "우리는 국제연합총회 및 소총회의 결정에 의한 외군(外軍)의 철퇴를 주장하고 대한민국의 자주권 확립과 민의를 존중하여 당일 퇴장한 16동지의 주장에 공명하는 동시에, 우리 민족정기상 당연한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인정"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미군 철수가 자주권 확립과 국민 민의뿐 아니라 민족정기에도 부합한다는 입장 표명이었다.
1949년 2월 8일 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그달 7일에는 소장파가 제기한 '화평통일안'이 국회에서 토의됐다가 부결되는 일이 있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이승만은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의원들을 향해 "유치하다", "외부의 선동을 받는다" 등의 막말을 했다. 8일에는 이승만의 망언을 추궁해야 한다는 소장파의 반격이 있었다.
이처럼 친일청산으로 인해 입지가 불리해진 이승만 정권이 여순항쟁을 빌미로 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키고 반격 태세를 갖추자, 소장파는 미군 철수 및 평화통일론을 앞세워 국가보안법의 존립 기반을 위협했다. 이런 구도에서 발생한 사태가 1949년 5월 18일 이후의 국회 프락치 사건이다.
이날 소장파 리더인 이문원 의원이 체포된 사건은 정부수립 이후 최초의 국회의원 체포 사건이자 국회 프락치 사건의 시작이었다. 이때부터 6월까지 총 13명의 국회의원이 남조선노동당(남로당) 프락치라는 누명을 쓰고 체포됐다.
국회는 여러 세력이 협력하고 견제하는 공화정치의 장이다. 이승만은 그곳을 무대로 전개되던 정치적 공방의 와중에 반대파를 빨갱이로 몰아 체포하는 공안조작 사건을 일으켰다. 이는 이승만이 공화 정치에 어울리지 않는 독재적이고 폭력적인 인물임을 노출시켰다. 이렇게 노출된 그의 기질은 3년 뒤인 1952년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연임을 위한 불법 개헌에 나서는 결과로 발현됐다.
국회 프락치 사건은 한국 정치에서 공화주의가 실종될 가능성을 보여줬다. 공화주의를 억압할 목적으로 이승만 정권은 의원들에 대한 불법체포·불법감금에 그치지 않고 그들을 남로당 프락치로 둔갑시키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 같은 사건 조작을 제대로 막지 못한 대한민국은 이승만의 페이스에 휘말리며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로부터 멀어져 갔다. 국회 프락치 사건이 한국 현대사에서 갖는 중차대한 의미가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 규명 결정뿐 아니라 사법부의 재심 판결을 통해서도 보다 명확히 확인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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