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9일 제17회 봉하음악회(노무현 대통령 탄생 80주년 기념 음악회)가 열린 날,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이 <노무현 평전>을 노무현 대통령 묘역 앞에 헌정하며 인사를 드렸다.
노무현재단
"<노무현 평전> 탈고(脫稿)가 내겐 탈상(脫喪)이다."
'노무현의 필사'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이 2019년 5월 노무현 대통령 서거 10주기 때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그 해 말까지 탈고하고, 이듬해인 2020년 봄쯤 출간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했다. 한 해 두 해 시간이 흘렀고, 17주기인 올해 드디어 <노무현 평전>(위즈덤하우스)이 세상에 나왔다. 노무현재단이 기획하고, 윤태영이 집필한 첫 공식 평전이다. (
☞ <노무현 평전> 서평|'기억 속의 노무현'을 '역사 속의 노무현'으로 https://omn.kr/2joce)
왜 이렇게 늦어졌을까. 윤태영은 "내가 게을렀고, 사방이 벽에 가로막혀 진도를 나갈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자의 반 타의 반 윤태영은 '노무현의 말과 글' 속에 갇혀서 10년의 세월을 앓았다. 현실에서는 기록으로밖에 소통할 수 없었던 노무현은 종종 그의 꿈에 나타났다. 신기하게도 <노무현 평전> 원고가 마무리될 즈음 꿈에서 점차 자취를 감췄다.
8월 29일 노무현 대통령의 80세 생신을 기념하는 '봉하음악회'가 열리던 날, 윤태영은 노무현 대통령의 묘역을 찾았다. <노무현 평전>과 국화꽃을 앞에 놓고 헌정 인사를 드렸다. 당시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그는 "부족하지만, 그래도 이것으로 숙제를 끝내겠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렸다고 한다. 스스로 매긴 점수는 '85점'. "완벽해야 한다는 욕심을 내려놓고" 집필의 한계를 인정한 작업의 결과였다. 애초 20주기 때 내려던 걸 몇 년 앞당겼단다.
▲ "노 대통령이 <노무현 평전> 봤다면? 유시민 <운명이다>와의 차이는..." ⓒ 고정미
윤태영과 노무현의 첫 만남은 1988년 말 국회에서였다. 스물일곱 살 윤태영은 다른 의원의 보좌관이었고, 마흔두 살 노무현은 초선 국회의원이었다. '찐'으로 만난 건 노무현의 에세이 <여보, 나 좀 도와줘>(1994년) 구술·집필 작업을 하면서였고, 불가분의 관계가 된 건 2002년 대통령선거 때 노무현 캠프의 홍보팀장을 맡으면서부터였다. 참여정부 청와대에서는 '연설담당비서관→대변인→제1부속실장→대변인 겸 연설기획비서관'을 지내면서, 윤태영은 '노무현의 언어'를 가장 잘 이해하는 '노무현의 복심'으로 여겨졌다.
2008년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한 뒤 윤태영은 '봉하 집필팀'을 이끌었다. "아무리 복잡하고 심란한 일이 있어도 봉하 집필팀 회의 때만큼은 오롯이 집중했던" 노무현 대통령이 2009년 5월 23일 서거했던 날의 기억은 아직도 쉽게 꺼내기 힘든 심연의 상흔으로 남아있다. '그때 봉하 집필팀을 해체하지 않았다면...'이라는 죄책감과 상실감에 오랜 시간 몸도 마음도 '수렁'에 빠졌고, 은둔의 시간을 보냈다.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난 뒤 정신을 차리고, 그가 집중한 건 노무현의 말과 글에 대한 기록이었다. 노무현과 관련한 책도 여러 권 펴냈다. 그마저 안 했다면 그는 아직까지도 자기자신을 '동굴' 속에 가둔 채 자책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윤태영이 가장 가슴 아파하는 '노무현의 유서' 대목은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는 구절이다. 그게 윤태영을 살렸는지도 모른다. 대통령이 갈망했던 '읽고 쓰는 일'을 대신하면서 노무현에 대한 부채의식을 덜어내는 일, 그게 윤태영이 긴 '상중(喪中)의 시간'을 견뎌낸 버팀목이었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80세 생신 다음날인 9월 2일 오후 일산의 한 오피스텔에서 윤태영 전 대변인을 만났다. 그리고 2시간가량 노무현과 <노무현 평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 이 인터뷰에서 직책 표기는 글의 흐름에 맞게 넘나든다는 점, 미리 독자들께 양해를 구한다.)
노무현 대통령께 헌정한 <노무현 평전> "85점이지만 숙제는 냈다"

▲<노무현 평전>을 집필한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이 2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한 지인의 자택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삶과 정치적 의미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유성호
- 지난 8월 29일 봉하마을에 내려가 노무현 대통령 묘역 앞에 <노무현 평전>을 놓고 헌정 인사를 드렸다. 무슨 생각이 들었나.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책이 약간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책 쓴 사람들은 다 그런 생각을 하겠지만, 제 기준으로 봤을 때 약간 부족함이 있다고 생각했다. 좀 찝찝했다. 하지만 어쨌든 '숙제는 이것으로 끝내겠습니다'라는 마음이 더 컸다. 제가 더 들고 있어도 더 잘 쓸 자신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이 정도에서 숙제를 마무리하겠다는 생각이었다."
- 이번엔 노 대통령이 내주신 숙제의 결과물을 갖고 간 것이니 한편으로는 후련한 느낌도 들지 않았나.
"정확히 말하면, '한 85점이지만 숙제는 냈다'는 그런 학생의 기분이랄까."
- 노 대통령께서 살아계셨다면 뭐라고 하셨을 것 같나.
"여기저기 지적을 많이 하셨을 것 같다. '야, 이거는 아닌데', '이 정도가 아닌데', '이런 건 좀 더 자세히 설명해야 되는 거 아니야', '내가 이렇지 않았어'. 이런 게 꽤 있으실 것 같다. 워낙 옛날부터 (선거) 홍보물 같은 걸 보실 때도 꼼꼼하게 체크하시는 분이라, 제가 보기엔 이 책을 두고도 한 달 동안 붙잡고 얘기하실 내용이 있을 거다. 충분히 그러셨을 거다.
특히 (대통령) 재임 중 이야기가 그럴 거다. 어린 시절이야 당신이 옛날에 구술하신 것도 많았고, 정치인 시절 이야기도 그렇다. 그런데 재임 시절은 제가 옆에서 지켜본 걸 중심으로 쓴 게 많았다. 그래서 '자네도 잘 모를 수 있어', '이건 자네가 잘못 본 거 아닌가, 그때 난 그렇지 않았어'라고 하실 수도 있겠다."
- 7년 전인 2019년 5월 노무현 대통령 10주기 때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는 "탈고(脫稿)가 탈상(脫喪)"이라고 했다. 이제 윤태영 개인으로서 노 대통령을 온전히 보내드렸다는 마음이 드나.
"아직은 아니다. 책을 냈으니 대통령님을 (사람들에게) 많이 읽히게 해야 하는 책무가 남아 있어서 한 두세 달은 더 갈 것 같다. 그게 지나면 벗어날 것 같다. 일단은 탈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동안은 쓰는 것도 대통령 말씀을 써야 했고, 읽는 것도 대통령의 말이나 행적에 대한 자료였는데, 이제 그건 안 봐도 되니까. 안 보는 일상이 시작되는 거니까."
- 윤태영에게 <노무현 평전>은 어떤 의미인가.
"제 책꽂이에 제가 쓴 책이 여덟 권인가 아홉 권에서 멈춰 있었다. 그걸 볼 때마다 '아, 마지막을 노무현 평전으로 채워야 끝인데'라고 생각했다. (<노무현 평전>이) 제 글쓰기의 마지막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책으로 뭘 내는 건 내게는 이게 마지막일 수도 있다."

▲<노무현 평전>을 집필한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이 2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한 지인의 자택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삶과 정치적 의미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유성호
- 사람 일은 모르는 건데 그렇게 확답할 수 있나.
"대통령님에 관한 글로 뭘 한다고 하면, 제가 이렇게 (책을) 쓰는 것보다 노무현 아카이브(옛 노무현 사료관)에서 나오는 것이나, 제가 갖고 있는 것 사이에서 연구자들을 위한 날것 그대로의 데이터를 내놓는 작업, 그런 건 할 수 있겠다. 그건 제가 쓰는 일이 아니라 자료를 잘 정리해서 내놓는 거니까. 그 정도의 일은 앞으로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번 <평전>에서도 가급적 대통령의 날것 그대로의 말을 많이 살리려고 노력했다. 제가 대변인 때도 그랬는데, 메신저가 말을 너무 많이 하면 안 좋다고 생각한다. 메신저는 정확하게 옮기는 것에 충실해야 한다. 독자들이 보고싶어 하는 것도 노 대통령의 생생한 워딩이지 제가 윤색하거나 평가하는 글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가급적 (대통령의 말씀을) 많이 담으려고 했다.
그런데 출판사 쪽에서는 '평전이라면 지문이 좀 갖춰져야지, 인용이 너무 많으면 좀 아니지 않느냐'고 하더라. 그래서 어쨌든 지금 같은 형태를 취하긴 했는데, 앞으로는 날것 그대로의 것들을 엮는 작업을 노무현재단과 같이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 <노무현 평전>은 노무현재단이 기획하고, 윤태영이 집필한 첫 공식 평전이다. 노 대통령 서거 다음해 출간된 사후 자서전 <운명이다>와는 어떻게 다른가.
"<운명이다>(2010년)는 유시민 작가의 도움이 컸다. 글쓰기도 그렇고, 감정이 이입된 톤 같은 것도 많이 담겨 있다고 본다. (노 대통령의) 정치인 시절 부분은 제가 갖고 있던 구술 자료를 넘겨드려서 쓴 거다. 그 부분은 거의 자서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제게 그 자료를 받고나서 유 작가가 '이거 자서전 형태로 가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거꾸로 제안을 해왔다. 저도 동의했다.
(대통령) 재임 중 부분은 유 작가의 필체와 생각이 많이 들어가 있다. 유 작가가 노 대통령을 많이 이해하고 잘 아는 분이기 때문에 거의 자서전이라 봐도 무방하지만, 그래도 약간 완벽하지는 않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 (노무현이라는 사람의) 전체를 관통하는 일대기의 책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해왔다.
(노 대통령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남기신 (원고로 만든) <성공과 좌절>(2009년)이 회고록의 뼈대가 되는 책인데, 그건 분량이 너무 적어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재임 중에 구술하셨던 얘기를 뒤에 붙여서 책으로 만들었다. (<성공과 좌절>은) 분량 면에서도 그렇고 일생을 관통한다는 면에서도 부족함이 있어 보여서, 어떤 형태로든 일대기를 한번 정리할 필요는 있다는 생각이었다."
- <노무현 평전>을 "평전과 일대기의 혼합"이라고 규정했는데, 어떤 의미인가.
"어떤 데는 당신의 행적을 그냥 다큐처럼 서술한 대목이 있고, 어떤 대목에는 저자의 생각이나, 저자가 관찰했을 때의 느낌이 들어갔다. 어떤 때는 그것에 대한 평이 들어가고, '왜 그랬을까'하는 원인 분석이 들어갔다. 그런 측면이 평전의 모습이고, 다큐식으로 그려진 건 일대기의 모습이다. (<노무현 평전>에는) 이 두 가지가 혼합돼 있다고 생각한다."
"사방이 벽에 막혔다... 벽을 넘은 방법은 욕심을 내려놓는 것"

▲노무현의 복심(腹心), 노무현의 입, 노무현의 필사라고 불렸던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이 2019년 5월 13일 그의 집필실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진석
- 7년 전 인터뷰 때는 이듬해인 2020년 봄쯤 <평전>을 출간할 예정이고, 원고도 상당 부분 진도가 나갔다고 했다. 예정보다 6년이 더 걸렸다. 책에는 "사방이 벽에 막혀 있었다"고 썼다. 그 '벽'의 정체는 무엇이었나.
"(노 대통령께서)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제가 게을렀고 여러가지로 피폐해져 있다가 몸도 아팠다. 2011년에 아팠는데 그때 정신을 바짝 차렸다. (노 대통령께서) '이 친구가 글을 써야 하는데 안 쓰고 뭐 하고 있지' 하는 경고를 주신 거라고 받아들였다. '빨리 써야겠구나' 싶어서 그때부터 비망록을 3000매가량 썼다. 2011년부터 2013년까지 2년 여에 걸쳐 썼다.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쓰자는 생각이었다.
이걸 책으로 낼까 말까 고민했다. 당시만 해도 노무현의 얘기를 밖으로 내놓는 데 두려움이 있었다. 워낙 (노 대통령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많았고, (책을) 내놓으면 이런 저런 시비가 붙을 것 같다는 우려가 컸다. 제가 걱정이 많은 성격이기도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노무현의 말'을 내놓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2014년 <기록>을 펴낼 때 (정리해두었던) 그 원고에서 일부를 발췌했고, 2015년 <바보, 산을 옮기다>를 낼 때 다시 일부를 발췌했다. 절반 정도가 빠져나간 셈이다.
그래도 남은 게 있으니 평전 쓰기가 쉽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3000매는 다 (대통령) 재임 기간 중의 일이다. 어린 시절이나 정치인 시절을 쓴 게 아니다. 어린 시절과 정치인 시절을 붙여야 하고, 다른 책에 쓰느라 빠져나간 재임 중 부분은 다시 보강해야 하는 숙제가 생겼다. 정치인 시절은 구술받은 게 많으니 살리면 되는데, 재임기간 중 얘기를 다시 정리하다가 굉장히 (높은) 벽에 부딪쳤다. 애초에 비망록은 시계열(時系列)로 썼다. 연대기로 쓰니까 초점이 안 잡혀서 그랬다."
- 서술 방식이 평면적이어서 인물에 대한 입체적인 느낌이 안 들었다는 건가.
"그렇다. 2003년부터 2007년까지를 시간 순으로 정리하니까 자잘한 에피소드는 재미있게 들어가는데 큰 흐름이 안 보였다. 북핵 얘기가 여기서도 나오고 저기서도 나오고 하니까 산만하더라. 그걸 다시 써야 하는데, 한번 막히니까 잘 안 써지는 거다. 게을러지고, 게을러지니까 다시 책상 앞에 앉는 것도 힘들어졌다. 게다가 비망록은 약간 소프트한 편인데, 평전이라는 무게가 다시 압도하기 시작했다. 완성도가 높아야 하고 놓친 것 없이 다 써야 한다는 압박이 생기니까 점점 그 벽이 높아 보이더라."
- "벽을 넘은 방법은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었다"고 했다. 어떤 욕심이 있었고, 어떻게 그 욕심을 버렸나.
"예를 들면, 지금 <평전>에는 빠져 있는 대목인데, 소위 '황우석 사태'가 언론에 연재되고 있으면 '저것도 참여정부 때 있었던 일 중에 비중이 꽤 컸는데 평전에 넣어야 하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노 대통령) 옆에 있긴 했지만 그 일을 깊이 있게 알지는 못한다. 그런데 그걸 담아야 하나, 담을 정도로 비중이 큰가 고민하다가 '이건 다른 것과 비교할 때 꼭 담아야 하는 비중의 문제는 아니야' 하면서 포기하기 시작했다. '백과사전에도 빠지는 게 몇 개는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어떤 한 가지를 묘사할 때도 그렇다. 다른 평전들을 많이 참고했는데, 이 책은 거의 모든 게 대통령님을 따라가는 글이다. 예를 들어 '노 대통령이 이런 생각을 할 때 민정수석이나 홍보수석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런 걸 입체적으로 그려야 하나 싶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한 사람만 따라가지 않으니까. (그런 걸 담기 위해) 보강 취재를 해야 하나 생각했는데, 그 부분도 포기했다. 그것까지 다 담아내고 압축하려면 보통 일이 아니겠다 싶었다."
"왜 나였을까? '이 친구는 글 쓰는 놈'이라는 첫인상"

▲"자신의 생각을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람은 리더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정치는 돈과 권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말과 글로 하는 것이다." 정치인 노무현은 말과 글을 무엇보다 중요하고 소중하게 여겼다. 사진은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과 윤태영 대변인.
노무현재단
- 노 대통령이 "체력이 허락하는 한 모든 자리에 배석해도 좋다"면서 "본 대로 들은 대로만 쓰라"고 했다고 했는데, 그 사람이 왜 윤태영이었을까.
"그와 같은 인연이 시작된 건 아마, 에세이 <여보, 나 좀 도와줘>(1994년) 책 작업 때부터일 거다. 제가 우연찮게 ('정치인 노무현' 파트를 구술 정리해) 책의 절반을 쓰게 됐다. 노 대통령이 당시 원외였는데, 참모들이 지방자치연구소를 꾸리려면 운영비가 필요해 책을 한 권 펴내자고 했다. 그때는 베스트셀러가 100만 부씩 팔리던 시절이었다. 잘만 하면 연구소 꾸려갈 돈이 벌리겠다고 생각해서 시작한 거다.
구술을 받아 작업을 하는데, 처음엔 잡지사 기자가 (노무현의) 어린 시절을 썼다. 그런데 정치권 얘기 구술이 시작되니까 어렵다고 하더라. 등장 인물이 너무 많고, 그 사람들 캐릭터도 잘 모르겠고, 구술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그래서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인) 제가 대타로 투입돼 절반을 쓰게 된 것이다. 그때 노 대통령께 '이 친구는 글을 쓰는 놈'이라는 인상을 심어준 것 같다. 당신의 글을 받아 쓴 경력자가 된 거다.
이후 (2002년 대선) '노무현 캠프'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니 '노무현의 글을 쓰는 사람'이 됐다. 그 다음에는 다른 필자를 구해 책을 쓸 때도 그 자리에 제가 계속 배석했다. 그런 일에는 거의 100% 배석했다.
대통령의 머릿속에는 이런 게 있었을 거다. 정치권도 잘 알고, 1988년부터 옆에 가까이 있으면서 <여보, 나 좀 도와줘>도 한 번 썼고, 그 후의 정치권 생활도 쭉 지켜봤고, 대통령 후보 시절에도 옆에 있었으니, '저 친구 머릿속에는 나의 행적과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이 제일 많이 담겨 있다.' 여러 말 안 해도 많이 아니까. 대통령 재임 중에도 본인의 옆에서 지켜보게 하면 그 연장선에서 제일 효율적으로 글을 쓸 수 있는 친구다,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았을까."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2월 25일 취임해 임기를 시작했다. 윤태영 연설담당비서관이 송경희 초대 대변인 후임으로 임명된 것은 그해 5월 7일이었다. 2004년 6월 30일까지 대변인을 맡았다가 제1부속실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2006년 8월 27일부터 2007년 1월 2일까지 다시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총 1년 8개월가량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보다 더 오랜 기간으로 기억되고 있다. 윤태영에게는 '노무현의 필사', '노무현의 복심'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600권의 수첩과 비공식 기록... '기억'과 다른 '기록'도 있다"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이 노무현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노 대통령의 공식·비공식 발언을 기록한 포켓수첩. 윤 전 대변인은 포켓수첩과 업무 노트 등이 600권가량 된다고 밝혔다.
윤태영
- 노무현 대통령이 기록을 중요시한 건 잘 알려져 있다. 퇴임 후 자서전이나 평전을 염두에 두고 재임 중에 별도로 구술을 한 게 있나. 공식·비공식 회의 말고도.
"(그런 내용이 <평전>에) 많이 녹아 있다. 제가 갖고 있는 것들이 비공식 기록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건이 생겼을 때 '밖으로 당장 표출하기는 좀 그렇지만 내 지금 생각은 이랬어, 이건 기록으로 일단 남겨둬'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들이다. '겉으로는 이런 상황이었지만 내 진심은 이랬어', 이런 걸 많이 남겨두셨다. 제가 갖고 있는 '600권의 수첩'에는 포켓수첩도 있고, 초기 대변인 시절 업무 노트도 있다."
- 기록할 때는 알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 잊고 있던 것들도 있었을 텐데, 나중에 다시 보면서 놀랐던 기록은 무엇이었나.
"'당정(黨政) 분리' 같은 게 그렇다. 저는 (노 대통령께서) 임기 마지막까지 당정 분리를 지켜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계신 줄 알았다. 그런데 임기 말 기록을 보니까 당정 분리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으로 (생각이) 바뀌어 있더라. '그렇게 좋은 제도도 아니다'라는 식으로까지 언론사 인터뷰에서 공식적으로 얘기하셨더라. 그리고 임기 초반에 했던 얘기들에 대해 계속 성찰하면서 반성이랄까, 그런 모습이 꽤 있었던 것 같다."
- <평전>의 스토리 전개에 반드시 필요하지만, '빈 퍼즐 조각' 상태인 대목도 있었을 텐데, 그런 부분은 어떻게 처리했나.
"지난해부터 마지막 피치를 올릴 때 도움을 많이 받은 게 (노 대통령에 관한) '연보(年報)'다. 노무현재단에서 연보 작업을 해놨는데, 그게 의외로 거꾸로 추적하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됐다. 원래 노무현 사료관(현 노무현 아카이브)에 계시던 분이 노무현재단에서 일하면서 해놓은 거다. 기본적인 연보 틀이 있으니 거기서 거꾸로 신문기사를 검색하고, 때로는 관련 언론보도를 클리핑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렇게 자료를 다시 모았다."
"객관화가 힘들지 않을까 걱정... '대연정' 때는 나도 동화돼 있었다"

▲8월 31일 서울 종로구 노무현시민센터에서 <노무현 평전>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이 책은 노무현재단이 기획하고, '노무현의 필사'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이 집필했다.
장철영
- 경호·의전 파트만큼이나 항상 노 대통령의 지근거리에 있던 사람으로서 '피사체'를 객관적으로 조명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그렇다. 노 대통령께서 (제게) '여린 감성'이라고 표현했듯이 좀 여린 편이라서 대통령이 힘들어하시는 모습을 보면 많이 동화가 된다. (2005년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제안하셨을 때도 '여소야대(與小野大)에서 얼마나 힘드시면 저런 생각을 하실까' 했다. 특히, 2006년 말 임기단축 개헌 얘기를 하실 때는 '임기를 단축 하시고 좀 편해지셨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다른 참모들이 와서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나와는 생각이 너무 다르더라. '내가 너무 일상적으로 대통령님과 있으면서 그 말씀에 굉장히 동화가 돼 있나 보다' 싶었다. 그래서 (평전을 쓸 때) '객관화가 힘들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런데 <기록>이나 <바보, 산을 옮기다>를 썼을 때 몇몇 분들이 '윤태영의 글은 심하게 노 대통령과 동화된 모습이라기보다는 담담하게 쓰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고 평해주셔서 자신감을 얻었다."
- 대통령 임기 후반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제안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책에도 "대통령이 속내를 감추는 법이 없었는데, 유독 그 사안만은 혼자 결론을 내리다시피 했다"고 썼는데.
"제가 보기에 우리(참모들)가 캐치하지 못해서 그렇지, (그런 문제의식에 대한) 뿌리는 대선후보 시절부터 있었다. (여야의) '동거 정부'도 많이 얘기하셨다. 이원집정부제라든가, 대통령 권한을 줄여야 한다는 생각은 후보 시절부터 많이 하고 계셨다. 크게 한번 (정치판을 흔들면) 지역구도도 해소하고 우리나라 정치권도 건전한 보수와 건전한 진보의 구도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이후에는 대화와 타협을 통해 정치를 해나가면 된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초기 단계부터 같이 얘기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갑자기 발표하니까) 주변 참모들은 '대통령이 힘드시니까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을 많이 했다. 얼핏얼핏 던지실 때 '힘드신가 보다' 한 거다. 주변 사람들이 생각할 때는 연정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가도 대부분 '소연정'에 그친다. 민주노동당 정도를 생각하지, 한나라당과의 대연정까지는 참모들도 쉽게 생각하지 못 한다.
(노 대통령께서는) 당연히 (한나라당이) 받아들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셨으니까 공론화하신 거다. 정치 공세로 한 게 아니다. (2004년) 탄핵 국면에서 워낙 역풍이 셌기 때문에, 노 대통령이 무슨 커다란 전략을 갖고 뭘 제안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분위기가 일부 있었던 것 같은데 그건 아니었다. 실제 (선거제도 개편을 전제로 한나라당에) 총리 지명권을 주겠다는 거였다. 국회 권력을 그만큼 존중하니까, 국회 다수당에 총리를 줘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걸 확대해보면 대연정이다."
- 2007년 노 대통령이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대연정'에 대해서 "수류탄 핀을 뽑아 적진을 향해 던졌는데 데구르르 굴러와 우리 진영에서 터져버렸다"고 비유하면서도 굉장히 아쉬워했는데.
"제가 책에도 썼지만,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했던 것처럼,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대연정은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다."
- 노 대통령의 재임 기간의 결정 가운데 당시나 지금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게 있다면.
"제가 당시에는 근접해 있지는 않았지만, 사안을 보면서 선뜻 이해가 안 됐던 건 (취임 직후인 2003년 3월) '대북송금 특검법'을 받아들인 거다. 처음에는 이해를 못 했다. 한미FTA는 대통령이 워낙 많이 설명을 하셔서 국가 경쟁력을 키우는 차원에서 저는 동의가 됐던 것 같다."
"말 한마디의 힘을 아는 분... '침묵'은 제목을 뽑는 시간이었다"

▲<노무현 평전>을 집필한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이 2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한 지인의 자택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삶과 정치적 의미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유성호
- 저도 여러 차례 인터뷰를 하면서 느낀 건데, 노 대통령은 질문을 받으면 몇 초간 침묵한 뒤 답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침묵이 상황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고 있지 않나.
"1차적인 건 (노 대통령이) '카피라이터' 성향이 있어서 (머릿속으로) 제목을 뽑는 거다. 말 한마디 하실 때도 '일단 어떻게 표현하지' 생각하신다. 말 한마디가 갖는 힘을 아시는 분이라 '이걸 어떻게 정리해서 말하지' 하는 생각이 있으셨던 것 같다. 순발력은 확실히 있다. 외국 정상들과 회담할 때는 사전에 깊이 연구를 하고 가신다. '이건 뭐라고 얘기해야 되겠다' 하고 미리 준비를 하고 가신다."
- 대화나 강연을 할 때는 심지어 미리 유머를 섞을 대목까지 준비했다고 하던데.
"(2006년 12월) 호주 총리를 만났을 때 '당신 나라에서 생산된 철광석으로 우리나라에서 자동차를 만들었는데, 이 자동차들이 고향으로 가고 싶어 합니다'라고 하셨다. 자동차 좀 사달라는 얘기다. 그게 순발력이 아니라 연구하신 거다. 그런데 기자들과의 일문일답은 오늘같이 사전에 질문지를 안 주고 하니까, 콘셉트와 카피를 순간적으로라도 생각하셔야 하는 거다."
- 노 대통령이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9시 뉴스'를 생방으로 모니터링하는 걸 중요하게 여겨 가급적 그 전에 일정을 마쳤다고 하는데, 지근거리에 있는 참모로서 곤란한 사안은 주로 어느 시간대에 보고 드렸나.
"제1부속실장을 할 때인데, 부속실은 대통령 옆에 있으니 말씀드릴 기회가 많을 것 같지만 진짜 없다. 행사가 끝나면 다음 일정을 안내해드려야 하고, 일정이 거의 5분 단위로 있으니까 일정과 일정 사이에 차분히 앉아서 말씀드릴 기회가 거의 없다. 좀 길게 드려야 할 말씀은 저녁 일정 끝나고 (관저로) 들어가실 때 보고드린다. 다소 불편한 얘기도 보고드려야 할 때가 있는데, 대부분 '알았네' 하고 들어가신다. 책에도 썼지만 '내가 잘못 말씀드렸나' 싶을 때도 있는데, 그것에 대해서 밤새 생각을 하시더라. 그리고 (아침에) 답을 주신다."
☞ [윤태영 심층인터뷰 ②] "'초선의원 노무현' 영화 만든다... 이해찬·정동영 등 '인물편' 빠진 까닭"(https://omn.kr/2joeg)로 이어집니다.
[관련기사]
☞ 2019년 윤태영 인터뷰 ①|https://omn.kr/2gkqp
"<노무현 평전> 탈고가 내겐 탈상... 자책감, 노무현의 말과 글 속에서 치유"
☞ 2019년 윤태영 인터뷰 ②|https://omn.kr/2gkrv
"노무현은 제 인생의 절반... 윤태영의 정치? 고민중이다"
▲8월 29일 제17회 봉하음악회(노무현 대통령 탄생 80주년 기념 음악회)가 열린 날,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이 <노무현 평전>을 노무현 대통령 묘역 앞에 헌정하며 인사를 드렸다.
노무현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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