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전 연습중 로진백을 만지는 나지완중학생 시절 나지완은 전국적으로 손에 꼽히는 투수였고 고등학생 시절에도 투수에 대한 미련이 적지 않았다. 어깨 부상으로 투수를 포기한 뒤 장타를 칠 수 있는 타자로서 성장했고, 그 한 가지 장점을 살려 타이거즈의 한 시대를 버텨냈다.
연합뉴스
베어스의 통산 최다승 투수 장호연은 신일고 감독 시절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때는 3박자(공격, 수비, 주루)를 갖춘 선수들을 선호하던 시절이었어요. 그래서 (김)현수나 (나)지완이가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죠. 하지만 저는 셋 다 잘하지 못하더라도 하나만 경쟁력을 가져도 충분히 통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둘 다 좋은 선수였어요."
김현수는 발이 빠르지 않았고 장타력이 두드러지는 선수도 아니었다. 하지만 좋은 반사신경과 뛰어난 타격 감각이 있었다. 그는 고교야구 최고타율을 기록하고도 신고선수로 프로에 입단해야 했지만, 곧 자신의 강점을 살려 한국을 대표하는 '안타기계'로 성장했다.
나지완의 경우는 좀 더 험난했다. 끝내 프로팀의 지명을 받지 못해 대학으로 진학해야 했다. 하지만 대학에서 정확하면서도 힘 있는 방망이로 이름을 알렸고, 졸업과 함께 기아 타이거즈의 2차 1번으로 지명받았다.
한 가지만 잘하는 선수
나지완에게는 분명한 재능이 있었다. 발은 느렸고 수비 감각도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타격 감각과 힘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장점을 살릴 수 있는 성실함을 가진 선수였다. 그렇게 그는 기아 타이거즈에서만 15시즌을 뛰었고 1473경기, 4561타석에서 타율 .277, 프랜차이즈 역대 최다인 221홈런과 862타점을 기록했다. 결코 평범하다고 할 수 없는 선수의 기록이다.
결정적인 순간에도 강했다. 기아로 이름을 바꾼 뒤 첫 번째이자 타이거즈 통산 10번째가 되는 우승을 만들어낸 2009년 한국시리즈 7차전의 끝내기 홈런은 말할 것도 없다. 2017년 한국시리즈 3차전 9회초에서도 결정적인 투런 홈런을 때렸다. 타이거즈의 두 차례 우승에 자신의 이름을 선명하게 새긴 선수다. 하지만 타이거즈를 대표하는 타자를 꼽을 때 나지완의 이름이 앞쪽에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타이거즈에 너무 많은 강타자가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원년의 김봉연, 김종모, 김성한을 시작으로 이종범, 홍현우, 한대화가 있었고, 또 최희섭과 김상현이 있었으며 지금은 김도영이 있다. 저마다 한 시대를 대표했고, 타이거즈의 울타리를 넘어 한국 야구 전체에서 인정받은 이름들이다.
타이거즈 팬들에게 그들은 자랑이었다. 다른 팀 팬들이 부러워하는 선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팬들의 자존감을 한껏 부풀려주는 일이다. 하지만 나지완에게는 그런 종류의 자랑거리가 조금 부족했다. 그는 타이거즈 팬들이 자랑스럽게 내세울 만큼 압도적인 선수가 아니었고, 다른 팀 팬들이 탐내는 선수도 아니었다. 오히려 특별한 계기가 있을 때마다 함께 지켜보던 다른 팀의 팬들에게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큰 기대, 더 큰 실망

▲타이거즈의 10번째, 기아의 첫번째 우승의 주역SK와 KIA가 만난 2009년 한국시리즈는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대결 중 하나로 꼽힌다. 그 치열했던 승부에 마침표를 찍는 나지완의 끝내기 홈런은 그의 이름과 연관된 기억의 90% 이상을 차지한다.
기아 타이거즈
처음부터 그랬다. 대학리그를 평정하고 입단한 슈퍼루키였던 그는 팀 역사상 최초의 신인 개막전 4번 타자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개막 2연전에서 6타수 무안타로 한계를 드러내며 4번 타순을 반납했고, 전반기 내내 1군과 2군을 오가며 '함평'(타이거즈 2군 훈련장)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각인되고 말았다.
또 2009년 결정적인 한국시리즈 끝내기 홈런을 터뜨리며 다시 전국적인 주목을 받은 이듬해에는 타율이 2할 1푼대로 추락했다. 특히 그해 팀은 16연패의 참사까지 경험하며 하위권으로 떨어져 연속우승의 기대를 저버렸고, 이에 대한 원망을 한 몸에 받아내는 역할이 그에게 떠맡겨졌다. 그해 그는 홈런 15개를 날리며 장타력은 입증했지만 그마저도 '2군 보낼 만하면 하나씩 꺼내는 수명연장용'으로 조롱받고 말았다. 그에게 '공갈포'라는 또 하나의 달갑지 않은 이미지가 따라붙은 계기였다.
2014년에는 또 다른 방식으로 부정적인 꼬리표를 늘렸다. 그해 그는 3할대 타율과 19홈런으로 준수한 시즌을 보냈지만, 우여곡절 끝에 합류한 아시안게임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대회 내내 거의 출전조차 하지 못한 그가 남긴 성적은 3타수 무안타. 대표팀은 결코 칭찬받기 어려운 고전 끝에 우승했지만 나지완의 기여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당연해 보였던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천신만고 끝에 따낸 민망한 상황 속에서 환호하며 병역혜택 획득을 자축하는 선수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이 모였고, 그 중에서도 가장 뾰족해진 눈총이 나지완을 향했다. 얼마 뒤 그의 부진이 부상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졌지만, 그것은 그를 향한 비난에 오히려 기름을 붓고 말았다. '완전한 경기력을 발휘할 수 없다면, 대표팀을 자진 하차했어야 했다'는 비판에 맞설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지완에게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겹쳐지고 굳어졌다. 그는 가끔 영웅이었지만 더 긴 시간 동안 미운 오리 새끼였다. 그를 늘 지켜본 타이거즈 팬들은 그의 좋은 모습과 나쁜 모습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다른 팀 팬들에게 나지완은 특별한 순간에만 눈에 들어오는 선수였다. 그런데 하필 그럴 때마다 그는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거나 부정적인 기억을 남겼다. 그래서 타이거즈 1군에서 누구 못지않게 생산적인 기여를 꾸준히 해주었던 그는 '영양가 없는 공갈포 함평 나비' 이미지로 고착되고 말았다.
영웅과 미운 오리 새끼

▲나지완의 은퇴식2022년 10월 7일 챔피언스필드에서 열린 은퇴식. 나지완은 과분한 사랑에 감사했고, 팬들은 충분하지 못했던 사랑에 미안해했다.
기아 타이거즈
하지만 나지완은 15시즌 중 100경기 이상 출장한 10시즌에 해마다 평균적으로 .280의 타율에 19.1개의 홈런과 74.2개의 타점을 생산했고 두 번의 우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완벽한 선수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발휘해 오랫동안 타이거즈의 중심타선 한 자리를 지킨 선수였다.
그래서 나지완을 흔히 '애증의 선수'라고 부르지만, 그것은 정당하지도 정확하지도 않은 표현이다. 또 그에게 붙은 여러 가지 꼬리표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간혹 그를 '아픈 손가락'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그 역시 적절하지 않다. 충분히 지켜봐 온 진지한 타이거즈 팬들이 나지완에게 품은 감정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 나지완은 시간이 지나 기록을 다시 들여다보고 함께 기억의 조각들을 맞춰볼수록 고마워지는 선수고, 그래서 조금씩 미안해지게 만드는 선수다.
그는 어쩌면 키다리 아저씨 같은 선수였는지도 모른다. 늘 눈에 띄지는 않았고 때로는 기대를 저버렸다. 팬들의 속을 썩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돌아보면 늘 그 자리에 있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몫 이상을 해놓고 있었다.
물론 그는 빛을 보지 못한 선수가 아니다. 오히려 가장 찬란하게 빛을 낸 선수이기도 했다. 다만 역설적이게도 그 빛이 만든 그림자 속에 머물 때 더 많은 주목을 받은 선수였다. 그래서 우리는 유독 그의 결정적인 홈런과 타점보다 절박한 기회를 날린 허탈한 삼진과 실책을 더 오래 기억하고 말았다.
떠나고, 오랜 시간 뒤에 기억되는 선수
2009년의 우승 홈런처럼 빛나는 순간도 있었고, 팬들의 속을 뒤집어놓은 더 많은 순간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을 합친, 내내 타이거즈의 유니폼을 입고 버틴 15년의 시간이 있었다. 불운하게도 팬들의 자랑이 되거나 다른 팀 팬들의 부러움을 사지는 못했더라도, 오랫동안 팀에 머물며 이길 때나 질 때나 최선을 다해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선수는 소중하다. 그리고 나지완은 그런 선수였다.
머물 때부터 눈에 띄는 선수가 있고 떠난 뒤 빈자리로 추억되는 선수가 있다. 하지만 어떤 선수의 자리는 떠난 뒤에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비로소 제대로 보인다. 나지완은 그런 선수다. 팬들은 기대했고, 실망했고, 때로는 고마워했지만 더 긴 시간 동안 원망했다. 그러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기록을 들춰보며 되살아난 기억들 속에서 새삼 생각하게 된다. '참 고마운 선수였구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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