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산동도서관마을전경비가 그친 맑은 하늘
이인자
이곳을 찾아온 데는 이 도서관만의 특별한 서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때 초등학교가 10개 넘게 있었지만 근처에 제대로 된 도서관 하나 없던 동네였다. 결국 주민들이 직접 나섰다. 2006년 주민 2천여 명의 서명 운동으로 물꼬를 텄고, 2012년 서울시 주민참여예산 사업으로 선정되며 길이 열렸다. 그리고 마침내 2015년 11월 13일, '구산동도서관마을'이 세워진 것이다.
머리를 맞대며 미래를 향했던 주민들의 10년이 눈앞에 그려졌다. 어쩌면 이 공간이야말로 온 마을이 품었던 '지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세워 올린 도서관이 아닐까 싶었다. 설립 배경만큼 외관도 독특했다. 전부 허물고 새로 짓는 신축 대신 기존의 빌라 3채와 단독주택 5채를 리모델링했다. 일부는 허물어 여백으로 남기고, 빌라 3채는 하나로 이었다. 왜 이름이 '구산동도서관'이 아니라 '구산동도서관마을'인지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었다.
처음 도서관에 들어서면 조금 어리둥절하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몇 계단 오르면 서가가 된 긴 골목이 나오고, 몇 계단 내려가면 로비가 나타난다. 길눈이 밝지 않은 나로서는 길을 헤매기 딱 좋은 공간이었다. 하지만 길을 잃는 건 나뿐만은 아니었을 듯싶다. 수십 가구가 살았던 세 채의 빌라를 허물지 않고 그대로 살려낸 공간이니 복잡한 미로일 수밖에 없었다. 도서관을 세 바퀴쯤 돌고 나서야 비로소 공간의 구조가 대략 읽히기 시작했다.
그때 로비에
적힌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신영복 선생님의 '서삼독(書三讀)'. 독서는 세 번 해야 한다는 뜻이다. 텍스트를 읽고, 필자를 읽고, 마지막으로 독자 자신을 읽는다는 의미다. 문득 그 말이 독서에만 해당하는 말은 아닌 듯싶었다. '구산동도서관마을'을 탐색하는 과정과도 참 많이 닮아 있었다.
세 번 읽은 도서관

▲도서관로비좁지만 아름다운 도서관 로비
이인자
나는 이 도서관을 세 번 읽었다. 처음에는 이 복잡한 공간을 걸으며 구조를 익히는 데 눈을 반짝였다. 두 번째에는 이 공간을 만들어 낸 사람들의 마음에 내 마음이 머물렀다. 수많은 커뮤니티 공간을 둘러볼수록 주민들의 간절함이 느껴졌다. 막 경기를 끝낸 운동선수의 푹 젖은 유니폼을 본 것처럼 마음이 찌글찌글 해졌다.
그리고 마지막은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내 마음이었다. 글을 쓰는 것은 마음속에 있는 수십 개의 불 꺼진 방에 스위치를 켜는 일과도 같았다. 그런데 너무 오래 어둠에 잠겨 있던 방은 좀처럼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럴 때면 나 역시 미로에 갇힌 기분이었다.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동공을 한껏 확장했더니 오른쪽 눈에서 고장 신호를 보내왔다. 왜 이 힘든 걸 다시 시작했을까, 후회가 들기도 했다. 그래도 아직은 좋으니까. 부끄러운 글이라도 끊임없이 끄적이는 것이다.
'구산동도서관마을'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청소년 자료실이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도서관을 다녔지만 그 어디에서도 만나지 못했던, 참으로 진귀한 공간이었다. 이곳에서는 청소년들이 직접 아이디어를 내고 자신들의 손으로 공간을 꾸며 나간다고 했다. 사서가 정제해 놓은 추천 도서가 아니라 아이들이 직접 고르고 추천한 책들이 벽면 가득 붙어 있었다. 시간만 허락된다면, 그 책들을 한 권 한 권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만화 자료실도 이색적이었다.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 까치 캐릭터가 큼직하게 그려진 벽면을 마주한 순간, 너무 반가워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까치 옆에는 황미나의 순정만화나 <베르사이유의 장미> 속 주인공도 보였다. 이 도서관의 만화 자료실은 딱 그 시절 동네 만화방 같은 정겨운 온기를 품고 있었다. 게다가 평일 낮이어서였을까, 만화 자료실에는 아이들보다 내 또래의 중년들이 더 많이 눈에 띄었다.
50개가 넘는 방
▲50개가 넘는 방주민들이 직접 만든 공간
이인자
'구산동도서관마을'에는 50개가 넘는 방이 있다. 그 방들은 이 마을 사람들의 의견에 따라 하나하나 필요한 커뮤니티 공간으로 채워졌다. 한때 누군가의 방이었고, 거실이었으며, 주방이자 욕실이었을 공간이 도서관이 된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평생을 바쳐 일군 생애 첫 집이었을 것이다. 둘로 시작해 셋이 되고 넷이 된 부부에게는 사랑의 집이었고, 가족들을 위해 온종일 지지고 볶고 끓여 내던 엄마에게는 왁자지껄한 풍요의 집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이들의 삶이 켜켜이 얹혀 있던 공간이 이제는 모두의 도서관이 되었다. 내가 쓴 <삶은 도서관>이라는 책 제목은 어쩌면 이곳 '구산동도서관마을'에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이름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옛빌라의 흔적들화강석, 벽돌 등 옛 집의 다양한 외벽들
이인자
서쪽 창문으로 늦은 오후의 빛이 들어왔다. 이제 동쪽에 있는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다시 32km, 대중교통으로 꼬박 2시간이 걸리는 길을 가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도서관 문을 나서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오래간만에 따뜻한 온기를 가득 채운 덕분일까. 이 온기라면 아무리 멀고 고단한 길이라 해도 끄떡없이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며칠은, 아니 어쩌면 더 오래오래 지지 않는 사람이 될 것 같았다.
비에도 지지 않고
미야자와 겐지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보라에도
여름의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과
욕심 없는 마음으로
(중략)
동쪽에 아픈 아이가 있다면
가서 돌보아 주고
서쪽에 지친 어머니가 있다면
가서 볏짐을 날라 주고
남쪽에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면
가서 두려움을 달래주고
북쪽에 다툼이나 소송이 있다면
의미 없는 일이니 그만두라 말하고
(중략)
모두에게 바보라 불려도
칭찬에도 미움에도 휘둘리지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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