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은이가 디카로 찍어준 사진 속의 나. 잠시 90년대로 시간여행한 순간.
정다은
그 흐릿함이 무언가를 건드렸다. 사진 너머로 잊고 있던 청춘의 장면들이 먹먹하게 떠올랐다. 90년대 어느 날로 돌아간 듯했다. 집에 와서도 사진과 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봤다. 그날 밤, 오래도록 낭만에 젖어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문득 작은 의문이 남았다. 흐릿한 시절을 지나온 4050세대는 화소 높은 카메라를 반기며 더 또렷한 순간을 남기고 싶어 한다. 그런데 2030세대는 일부러 초점을 흐리고 빛을 번지게 하며, 경험해 보지도 않은 그 시절의 디카를 들고 다닌다. 왜 더 선명한 것을 두고 굳이 흐릿한 것을 택할까.
그 궁금증은 얼마 전 촬영장으로 향하던 차 안에서 더 커졌다. 동행한 장혁진 매니저(1996년생)의 플레이리스트가 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 음악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이적의 '그땐 미처 몰랐지'(2003년 발매)가 흘러나오자 결국 참지 못해 물었다.
"매니저님, 그런데 왜 우리 세대 음악을 들어요?"
그가 잠시 생각하다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저희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아날로그 시대였거든요. 중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스마트폰이 보급되고 디지털 시대가 빠르게 가속됐죠. 변화 속도가 워낙 빨라서, 그 속도에 지쳐 오히려 그 이전 시간을 떠올리게 되는 것 같아요."
그의 기억 한편에는 부모님과 함께한 어릴 적 풍경이 자리하고 있었다. 내비게이션 대신 지도를 펼쳐 길을 찾고, 부모님과 나란히 음악을 듣던 시간들.
"이게 무슨 감정인지는 모르겠는데… 잠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것 같아요. 사는 게 팍팍하니까요. 취업도 안 되고. 그래서 마음 편했던 때로 잠깐 시간여행을 하는 거죠. 음악을 듣는 동안만이라도."
매니저가 어릴 적 들었다는 노래 안에는 그때의 사람과 공기, 시절의 나까지 함께 담겨 있었다. 어쩌면 우리는 노래를 듣는 게 아니라, 그 노래를 듣던 나를 다시 만나고 싶은 게 아닐까.
최근에 다은이에게도 비슷한 질문을 건넸다. 우리는 더 선명하게 주변을 보려 하는데, 너희는 왜 굳이 흐릿하게 보려 하냐고. 잠시 머뭇하더니 다은이가 말했다.
"음… 그때 제 상태가 좋았어서 그런 것 같아요."
다은이도 자신의 어린 시절을 소환했다.
"저희 어릴 때도 스마트폰 없이 놀이터에서 흙 만지며 놀았어요. 중학교 후반쯤부터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정신없이 빨라진 거죠. 지치거나 힘들 땐 옛날 노래를 많이 들어요. 주로 초등학교 때 듣던 노래요. 흐릿한 사진을 보면 그 옛스러운 감성이 좋고, 가족과 찍었던 사진의 느낌도 떠올라요. 그때의 제가 좋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자꾸 그 시절의 것들을 찾게 되나 봐요."
가장 좋았던 시절, 나에게 건네는 위로
그들에게 유년 시절은 단순한 '아날로그 시대'가 아니었다. 디지털이 지금처럼 삶을 빠르게 밀어붙이기 전, 조금은 느리고 마음 편했던 시간이었다. 사전은 낭만을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라 정의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말하는 '낭만'은 조금 다른 의미를 품은 것 같다. 오래된 카메라나 음악 자체가 그리운 게 아니라, 그것들을 통해 그때의 나를 다시 만나는 일. 낭만이 그리운 게 아니라, 환했던 그 시절의 내가 그리운 것이다.
그날 다은이가 찍어준 사진 앞에서 마음이 저릿했던 것도 그래서였다. 삶을 버텨내느라 잊고 있던 젊은 날의 나를 다시 만났기 때문이다. 흐릿한 사진은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그 시절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건네는 위로처럼 느껴졌다. 짧은 시간여행이 그토록 애틋한 낭만으로 다가왔던 이유다.
지친 현실에서 잠시 빠져나와 가장 편안했던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는 것.
▲다은이가 찍은 90년대생 친구들 사진. 디카에 담기자 어느새 90년대의 한 장면이 되었다.
정다은
지금 우리는 낭만을 즐기는 게 아니라, 낭만에 기대어 살아간다. 더 선명한 사진을 원했던 4050세대도, 일부러 초점을 흐리는 2030세대도 사실 같은 것을 찾고 있었다. 고단한 하루 끝에, 가장 나다웠던 시절의 나. 세대는 달라도 그리움의 모양은 닮아 있다.
오늘도 누군가는 흐릿한 디카를 들고, 누군가는 오래된 노래를 듣고, 누군가는 90년대 인테리어를 그대로 간직한 경양식집을 찾아가 크림수프와 함박스테이크를 먹으며 말한다.
"낭만 있다."
그 말에는 어쩌면 다른 속말이 숨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 그때로 잠깐 돌아갔다 올게."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