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제주에서 인터뷰 기사를 연재하던 당시 글을 쓰던 책상 위 풍경이다.
김지영
AI 덕택에 나는 더 많은 지식과 시간을 향유했다. 그런데 그 향유하는 시간 속에 뭔지 모를 허전함이 은근하게 감돌기 시작했다. 개운치 않은 이 기분의 정체가 뭘까를 생각했다.
스마트폰을 쓰기 시작하면 다시는 폴더폰 시대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이제는 AI가 주는 지식과 편리함을 물리칠 수는 없는 시대다. 지금 이 글도 볼펜과 원고지가 아닌 노트북으로 쓰는 것처럼 0.8배속으로 며칠씩 타이핑을 하고, 인쇄한 녹취록을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어가며 인터뷰이의 진심에 다가가려던 시절은 이제 사라졌다.
하지만 내가 외출할 때 잊지 않고 백팩에 챙겨 넣는 종이책과 전자책, 활자와 스크린, 그 사이 어디쯤에서 나는 여전히 서성인다. 어느 밤은 눈이 침침해 전자책을 켜고, 어느 밤은 손끝에 닿는 종이의 질감과 사각거리는 소리가 그리워 종이책을 든다. 침대맡에는 읽고 있는 종이 책이 늘 몇 권씩 쌓여 있고, 태블릿 안에는 수천 권의 전자책이 저장되어 있다.
그 어느 쪽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채로 십 년을 넘게 살고 있다. 익숙함과 편리함, 질감과 가시광선이 아직 내 안에서 다투고 있다. 4벌식 크로바타자기(초성·받침 없는 중성·받침 있는 중성·종성의 네 벌을 쓴 수동 한글 타자기)와 갱지노트, 볼펜 껍데기에 끼워 쓰던 몽당연필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는 이 감각을 평생 알지 못한다.
나 역시 태어나보니 태블릿과 스마트폰이 있더라는 세대를 이해하지 못한다. 몸으로 익힌 감각은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 않으며, 특정 세대가 통과해 온 경험의 깊이는 말로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허전함의 정체를 좀 더 들여다봤다. 그건 아마 녹취록을 만드는 과정에서 내가 얻을 수 있던 것들과 관련이 있어 보였다. 두 시간 녹음을 텍스트로 옮기며 나는 인터뷰이의 말투를 다시 들었다. 어디서 말이 빨라지는지, 어디서 잠깐 멈추는지. 그 머뭇거림 속에 진짜 하고 싶은 말이 숨어 있을 때가 있었다.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으며 나는 그 사람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AI가 뽑아주는 녹취록은 빠르고 정확하다. 요약본은 순식간에 핵심 문장을 골라내고 주제를 부각해 준다. 어쩔 땐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지점을 상기시켜준다. 하지만 그 녹취록에는 침묵이 없다. "그때는..."하고 한참을 멈췄다가 삼켜낸 마른 숨이나 대답 직전 떨리던 목소리의 떨림 같은 것은 남지 않는다. 말과 말 사이의 그 틈이야말로 인터뷰이의 진심이 담긴 여백이며, 그건 오직 원음을 들을 때만 느낄 수 있는 영역이다. 문제는 그 여백을 우리도 '스킵'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여백 안에 그가 쉽게 뱉지 못한 슬픔과 망설임과 다음 말을 고르는 정갈한 시간이 있었다. AI가 주는 지식과 편리함에 기대는 동안 나는 그 시간을 건너뛰고 있었다. 듣는 감각을 건너 뛰고 나열된 텍스트로 기사를 썼다. 그래도 별 문제는 없었다. 그게 오히려 마음에 걸린다. 벌써 잊히는 감각들이 그 속도로 무디어져 간다.
사람만 아는 감각
다행인 건 변하지 않는 몇 가지가 그래도 있다는 사실이다. 인터뷰이와 마주 앉는 두 시간이다. 눈을 맞추고, 말이 막히면 기다려주고, 어떤 질문은 접어두고 다른 질문으로 돌아가는 그 감각만큼은 어떤 AI도 대신할 수 없다. 녹취와 요약은 도구가 해 주지만, 말의 여백은 현장에 있는 사람만이 아는 감각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결국 세상은 AI가 차지할 것이다. 그건 지금 우리에게 닥친 미래다. 이제 60대에 접어든 내가 그 변화 속에서 겪는 혼란과 적응은 글 쓰는 방식의 변화이기도 하다. 이제 나는 인터뷰를 하러 갈 때 노트북과 DSLR과 디지털녹음기를 챙겨가지 않는다. 한때 필수품이던 장비들은 이제 무겁고 거추장스러워졌다. 고장 난 곳 하나 없지만 은퇴를 앞둔 나처럼 저절로 쓸모를 잃어버린 채 남루해지고 있다.
이제는 자료준비를 위해 도서관에 갈 이유도 사라졌고 언어에 막혀 찾아볼 수 없었던 외국 논문이나 연구 자료도 손쉽게 구해 한글로 읽고 기사로 쓴다. 핸드폰과 태블릿 하나로 해결되는 시대적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 음성을 순식간에 텍스트로 바꾸고 내가 생각지 못했던 주제를 짚어주는 것을 마다할 이유도 없다.
이 편리함을 고스란히 다 받아들이면서도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 인터뷰가 끝나면 AI가 뽑아 준 녹취록과 요약본을 받아들이되 원음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은 다시 듣는 일이다. 시간이 걸려도 그 사람의 목소리가 흐르는 길을 따라가 보는 것이다.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그 정도의 익숙한 수고로움은 내게 남겨두고 싶다.
지금은 AI와 익숙해지는 과정에 있지만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 일부러라도 녹취록을 손수 타이핑하고 귀퉁이가 닳도록 스무 장짜리 녹취록을 읽어가며 인터뷰 기사를 쓰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거스를 수 없는 편리함에 순응하지만 가끔은 불편한 방식으로 되돌아가 보는 것도 386세대였다가 이젠 686세대가 된 나에게는 지나온 내 삶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건 종이책이 주는 질감을 기억하고 그 안에 담긴 활자를 읽을 때의 감각이 체화된, 이젠 늙고 남루해 질 시간 앞에 선, 우리 세대만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불편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