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9.05 18:48ㅣ최종 업데이트 26.09.05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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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7대 대선에서 연설 중인 김대중 당시 신민당 후보.
▲1971년 7대 대선에서 연설 중인 김대중 당시 신민당 후보.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고 김대중 대통령은 서른 살 때 치러진 1954년 제3대 총선에서 낙선했다. 1959년 재보선과 1960년 총선에서도 낙선한 그는 1961년 재보선에서 당선됐지만, 이틀 뒤 5·16 쿠데타가 일어나 1963년 총선에 당선된 이후에야 의정 활동을 하게 됐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예측할 수 없었던 1955년 당시의 김대중은 다음 선거를 위해 목포를 떠나 서울 용산구 남영동으로 향했다. "순전히 정치 때문이었다"고 <김대중 자서전> 제1권은 말한다.


그런데 순전히 정치를 위해 서울로 이사한 그는 정치와 거리가 있어 보이는 일들을 문어발식으로 벌였다. 자서전에서 그는 "나는 삼각지 근처에 있는 한국노동문제연구소에 출근했다", "나의 글은 <동아일보>와 월간지 <사상계>에 실렸다", "나는 월간 잡지 <신세계>의 주간도 맡았다"고 회고한다. 연구소 활동과 기고 활동과 잡지 제작을 함께 수행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쓰리잡러'에 그치지 않고 '포잡러'가 됐다.

"이와는 별도로 동양웅변전문학원이란 이름의 웅변학원을 운영했다. 당시 웅변은 정치인의 최대 무기였다. 50명 안팎의 원생들을 가르쳤는데, 그중에는 웅변 강사도 더러 있었다. 직장인, 정치 지망생들이 많았다. 야망을 웅변에 담은 연습이었다. 목소리 높낮이, 제스처, 원고 내용까지 세심하게 연마했다. 나는 목포상고 때부터 웅변에는 소질이 있었다. 훗날 정치적 동지 김상현, 김장곤 의원도 이때 학원에서 만났다."

동양웅변전문학원은 연구소에도 출근하는 저널리스트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수강생 중에 웅변 강사들까지 있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으니, 이 시절 김대중은 웅변계의 '일타 강사'였다.

이처럼 김대중이 여러 일들을 하던 시기에 웅변학원 수강생으로 들어갔다가 동지 관계로 발전한 인물이 위의 김상현(1935~2018)이다. 김대중보다 열한 살 적은 김상현은 19세 혹은 20세 때 이곳을 노크했다. 이 인연을 계기로 그는 김대중의 핵심 참모가 되고 그 자신도 서른 살 때인 1965년의 재보선을 통해 국회의원이 됐다.

그런데 그 인연은 김상현에게 시련과 고통도 안겼다. 그것은 그가 국가폭력 피해자가 되는 계기로도 작용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2025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제32권 '국회의원 불법구금 등 인권침해사건(고 김○현)' 편은 3선 의원인 그가 유신체제 선포 때 겪은 일을 이렇게 기술한다.

"대상자는 1972.10.17. 박정희 대통령의 위헌적인 국회 해산으로 국회의원직을 박탈당함으로써 직업 선택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침해당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대상자는 1972.10.17 비상계엄 직후 유신체제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육군 보안사령부에 의해 1972.11.21. 강제 연행되어 같은 해 11.29.까지 9일간 불법구금되었고, 조사 과정에서 맨몸 구타, 전기 고문 등 가혹행위를 당한 것으로 판단된다."

공안기관들의 창작 스토리

2025년 4월 23일, 진실화해위원회는 고인이 된 김상현의 유족에게 사과하고 화해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그런데 국가가 사과할 일은 또 있었다. 1972년뿐 아니라 1980년에도 김상현에 대한 국가폭력이 있었다.

광주가 수난을 당하던 그해에 김상현은 김대중과 함께 내란음모 사건에 엮었다. 유신체제가 선포된 뒤 징역형을 받고 원외 정치인으로 활동하던 김상현은 전두환 신군부의 두 번째 쿠데타인 5·17 비상계엄확대조치의 피해자가 됐다.

1988년 11월 19일 국회 광주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그는 스포츠 해설위원 출신인 오경의 통일민주당 의원으로부터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 때 언제 누구에게 어디로 연행됐나?"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했다.

"당시 운영하던 한국정치문화연구소 행사로 제주도에 내려왔다가 5월 18일 새벽 4시쯤 친지 집에서 자다가 연행됐다." - 11월 20일 <한겨레>

45세의 김상현은 사복 요원 3명에게 붙들려 중앙정보부 제주지부로 끌려갔다. 그런 뒤 "당일 첫 비행기로 서울에 도착, 남산으로 갔다"고 그는 진술했다.

그의 죄목은 내란 선동 및 계엄법 위반이었다. 그가 폭력적 방법으로 대한민국을 전복할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 중앙정보부와 검찰의 주장이었다. 그해 8월 14일 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검찰 공소장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전국 대학교에서 어용교수 축출, 족벌체제 타파 등 학내 문제로 농성시위 중인 학생들을 선동·자극하여 그들을 교외 시위로 유도하고 종교계 및 청년당원 등의 세력을 규합, 4·19 때와 같은 폭동을 야기하며 정부를 전복시킨 후 동(同)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옹립하여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심하고 국헌을 문란하여 정부를 전복할 목적으로"

공안기관들은 김상현이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에게 김대중 자금을 전달했다는 혐의를 꾸몄다. 이 기관들은 1980년 5월 5일에 김상현이 '김대중을 추대할 테니 자금 지원을 해달라'는 정동년의 부탁을 받고 그런 일을 했다고 공소장을 꾸몄다.

"동일(同日) 19시 50분경 위 정동년을 대동, 위 김대중 집에 가서 정동년을 응접실에 대기시켜놓고 내실에서 동(同) 김대중에게 위 정동년의 위 구상을 설명·전달하고, '민중봉기 자금으로 요구받은 돈을 지원해주는 것이 좋겠다'고 제의하여 동 김대중으로부터 3백만 원을 교부받아 소지한 다음, 동 정동년을 내실로 불러들여 동 김대중에게 인사시킨 후, 3백만 원을 꺼내주면서 '책임감을 가지고 학생회가 주체가 되어 활발히 일을 할 수 있도록 잘하고, 금주 내에 다시 한번 상경하라'고 지시하고, 이를 목격하고 있던 동 김대중도 위 정동년에게 '자네 구상은 김상현으로부터 들어서 잘 알았다. 열심히 활동하라'라고 말하며 광주 지방의 폭력시위 구상을 지지·격려하고"

국가데이터처가 운영하는 'CPI소비자물가지수' 사이트에 따르면, 2026년 7월의 물가는 1980년 5월의 5.799배다. 다른 변수를 배제하고 물가상승만 감안하면 1980년 5월의 300만 원은 지금의 1739만 7000원이다. 김대중이 준 이 금액이 정동년을 통해 운동권에 건네졌다는 것이 공안기관들의 창작 스토리였다.

재심 재판에서 무죄 선고

1974년 12월 10일 밤 서울 명동성당에서 인권회복을 위한 기도회에 나온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가석방된 김상현 전 신민당 의원.
▲1974년 12월 10일 밤 서울 명동성당에서 인권회복을 위한 기도회에 나온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가석방된 김상현 전 신민당 의원. 연합뉴스

중앙정보부는 그 스토리대로 김상현이 진술하도록 하기 위해 불법감금은 물론이고 고문과 가혹행위까지 가했다. 1988년 11월 20일 자 <한겨레>는 "그는 중앙정보부에서의 고문에 대해 완전히 발가벗겨 인간적인 수모감을 주었으며, 2개 조의 조사팀이 교대로 조사해 며칠 동안 잠을 재우지 않으면서 자술서를 반복해서 쓰도록 강요했다고 밝혔다"라는 내용을 보도했다.

광주청문회장에서 자신의 고문 경험을 진술하는 김상현을 상대로, 김종필이 이끄는 신민주공화당의 의원이자 유신 선포 당시의 공군참모총장이었던 옥만호(1925~2011) 의원이 던진 질문이 있다. 돈을 준 사실이 없다면 계엄사가 왜 그렇게 발표했느냐는 물음이었다.

이에 대해 "완전히 조작된 각본"이라고 답한 김상현은 노태우가 이끄는 민주정의당(민정당)의 권해옥(1935~2025) 의원으로부터 비슷한 질문을 받았다. 훗날 한국자유총연맹 고문이 될 기자 출신의 권해옥은 "증인이 자술서 쓴 것도 있는데"라고 말했다. 그러자 김상현은 "1백% 조작이다"라면서 "권 의원은 고문 안 당해 모르는데, 고문 당하면 항우 같은 장사라도 못 당한다"라며 고문 때문에 허위 진술을 했음을 강조했다.

1980년 9월 17일, 군법회의는 김상현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1981년 1월 23일, 전두환은 국무회의에서 그의 형량을 징역 7년으로 낮췄다. 1987년 7월 9일, 전두환 정권은 김대중·김상현 등에 대한 사면·복권을 발표했다. 6월항쟁 직후의 전두환 정권은 그해 12월 대선에서 김대중·김영삼이 각각 출마해 야당표가 분산되게 만들 목적으로 이 시점에 사면·복권을 단행했다.

김상현이 웅변 선생님 김대중과 함께 민중봉기를 기도한 일도 없고 김대중 자금을 운동권에 준 일도 없다는 점은 훗날 재심 재판을 통해 법적으로 확인했다. 그가 68세 때인 2003년 1월 21일, 서울고등법원은 김대중 내란 음모에 연루된 김상현 등에 대한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신군부에 저항한 행위는 헌정질서 파괴 범죄를 저지하고 헌법의 존립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행위였던 만큼 원심을 파기하고 모두 무죄를 선고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검찰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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