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 5일 중국에서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했던 문명금 할머니가 정부에서 받은 생활보조지원금 4천300만원 전액을 베트남전쟁 피해자들을 위해 써달라며 '베트남 민간학살 진실위원회' 이해동 공동대표에게 기증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 사회에서 그같은 반성의 기운이 고조될 무렵에 잔잔한 감동을 일으킨 인물이 있다. 열여덟 살 때인 1935년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중국 헤이룽장성(흑룡강성)에서 무려 10년간이나 성노예 생활을 했던 2000년 당시 83세의 문명금이 그 주인공이다.
그해 6월 5일, 문명금은 정부 지원금과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의기억연대) 후원금 등으로 모은 4300만 원을 베트남전쟁 피해자들을 위해 내놓았다. 위안부 피해자가 베트남전쟁 피해자들을 돕겠다고 나서는 이례적인 상황이었다.
2020년을 100으로 하는 금년 7월의 소비자물지수는 119.77이고, 통계청(국가데이터처)이 발표한 '2021 한국의 사회지표'에 따르면 2000년의 연평균 소비자물가지수는 63.151이다. 이처럼 지금의 물가가 2000년의 1.9배이므로, 평균적인 물가변동만 놓고 보면 2000년의 4300만 원은 지금의 8155만 원 정도다.
문명금이 기부하는 현장을 취재한 2000년 6월 5일 자
<오마이뉴스> 기사는 4300만 원이 그가 받은 지원금·후원금 전액이자 그가 가진 "전 재산"이라고 전했다. 이날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나도 어렸을 적에 고생 많이 하고 전쟁 겪으면서 컸어요. 국가에서 해준 돈을 함부로 쓸 수 없죠. 나보다 더 고생하는 친구들에게 전달되면 좋겠어요. 베트남 사람들 고생 많이 했다고 들었는데 그곳의 전쟁 피해자들을 위해서 쓰여졌으면 합니다."
기부금을 전달받은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진실위원회'(대표 강정구·이해동)는 그 돈을 선뜻 받지 못했다. 위 기사는 "문 할머니의 안정된 노후 생활을 위해 여러 차례 만류했지만, 할머니 본인의 뜻이 확고해 오늘 기금 전달식을 갖게 됐다"는 진실위원회 관계자의 말을 전했다.
문명금은 제2차 세계대전의 일환으로 전개된 태평양전쟁의 피해자다. 거기다가 식민지배의 피해자다. 남성 중심 사회구조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이처럼 이중·삼중의 수난을 겪은 위안부 피해자들은 일본의 배상을 받지 못했음은 물론이고 한국 정부로부터도 제대로 된 보호를 받지 않았다.
그런 피해자가 베트남전쟁 피해자들을 위해 "전 재산"을 기부했다. 이를 통해 그는 '미안해요'라는 메시지를 베트남인들에게 전했다. 이중·삼중의 피해자가 베트남 피해자들에게 공감과 연대를 표시한 이 일은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에 힘을 북돋워 주는 일이었다.
문명금은 3·1운동 2년 전인 1917년에 전남 광양군 진상면 구황리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직업은 머슴이었다. 동학혁명과 갑오경장의 영향으로 노비제도가 공식 해체된 뒤에는 농업 노동자 다수가 자유계약제 머슴의 형태로 고용됐으므로, 당대의 일반적인 서민 가정에서 출생한 셈이다.
농업 노동자의 집에서 태어난 그는 농민 자녀들이 선망하는 대상 중 하나였던 공장 취직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열여덟 살 때 친구들과 함께 경남 하동에 놀러 간 그는 "공장에 취직시켜 주겠다"는 일본인을 만났다. 감언이설에 속은 그는 부산항을 거쳐 헤이룽장성의 중·소 국경지대에서 위안부 생활을 하게 됐다. 일제 패망 때까지 10년간 그는 그곳에서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했다.
그의 고향에서 발행되는 <광양뉴스>의 2021년 11월 8일 자 기사에 따르면, 일제가 패망한 직후에 그는 위안소에서 종적을 감췄다. 그래서 일본군이 위안부들을 연행한 상태로 그곳을 철수할 때 뒤따르지 못했다. 그는 한국인들이 모여 사는 인근 마을에 정착했고, 이는 그가 곧바로 귀환하지 못하는 원인이 됐다.
생의 마지막, '평화운동'에 헌신한 문명금
그의 존재가 한국 시민사회에 알려진 것은 80세 때인 1997년이다. 1999년 2월 13일 자 <한겨레>는 "97년 말 이곳을 방문한 한국정신대연구소 조사팀에 의해 생존 사실이 확인됐다"고 전했다.
1998년 4월에는 혜진 스님이 양로원에 있는 그를 방문했고, 1999년 2월 12일에는 그가 경기도 광주 나눔의집의 초청을 받아 김포공항 입국장에 들어섰다. 위 신문은 그가 감격에 벅차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면서, "몹시 좋아 눈물이 많이 나네요"라며 "빨리 부모님 산소에 찾아가 한없이 울고 싶습니다"라는 그의 소회를 전했다.
64년 만에 귀국한 그는 나눔의집에 기거하면서 평화운동가로 신속히 변신했다. 그에 대한 추모 내용을 담은 2022년 11월 2일 자 목포MBC 뉴스는 "수요집회에 매주 참석하고 평화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힘을 다했습니다"라고 전했다.
▲2015년 4월 4일 평화박물관(베트남전 진실위원회 후신, 대표 이해동 목사) 초청으로 '빈안학살' 생존자 응우옌 떤 런(NGUYEN TAN LAN), '퐁니퐁넛학살' 생존자 응우옌 티 탄(NGUYEN THI THANH), 호찌민시 전쟁증적박물관(증적은 증거와 흔적이라는 뜻) 후인 응옥 번(HUYNH NGOC VAN) 관장이 방한했다.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학살 피해자가 방한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방한 후 첫 일정으로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을 방문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묘비에 헌화한 뒤 기도하고 있다.
권우성
그가 베트남전쟁 피해자들과의 연대에 나선 것도 같은 시기다. 2017년 7월 25일 자 언론보도에 따르면,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는 정의기억연대가 수여하는 제1회 길원옥여성평화상을 수상하는 소감을 밝히면서 "'피해자가 피해자의 마음을 알지'라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대속하는 마음으로 베트남 피해자들을 위해 전 재산을 기탁하셨던 문명금, 김옥주 할머니의 말씀도 생각이 난다"라는 말을 했다. 문명금이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대신 속죄하는 마음으로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에 동참했음을 보여주는 발언이다.
그는 귀국한 지 1년 9개월인 2000년 11월에 향년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길지 않은 그 기간, 위안부운동에 참여하고 베트남전쟁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구했다. 생의 마지막 1년 9개월을 인류를 위한 평화운동에 헌신했던 것이다.
그의 기부금은 '미안해요 베트남운동'을 계승하는 서울 구로구의 평화박물관 조성에 사용됐다. 그의 출생지인 광양시는 매년 11월 3일 문명금 추모제를 연다. 그의 숭고한 삶과 정신은 우리 사회에서 그렇게 소중하게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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