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빈치 <쾌락과 고통> 15세기 / 베르니니 <성 테레사의 황홀경> 1652년
퍼블릭 도메인
바로크 시대의 이탈리아 조각가 잔 로렌초 베르니니(1598~1680)의 <성 테레사의 황홀경>도 비록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환희와 고통이 동시에 실현된 순간을 담았다. 테레사 수녀는 자서전에서 자신의 신비 체험을 "웃고 있는 아름다운 천사가 금으로 된 긴 창을 들고 내 심장을 여러 번 찔렀으며, 창을 뺄 때 엄청난 고통과 함께 신에 대한 말할 수 없는 희열과 사랑을 느꼈다"라고 기록했다.
천사가 긴 창을 들고 가슴을 향해 힘껏 찌르는 중이다. 그런데 그녀는 더없이 황홀한 표정이다. 신에 대한 사랑에서 오는 기쁨이긴 하지만, 사랑의 환희와 살을 찢는 고통이 공존한다. 이 조각은 성적인 느낌이 다분하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반쯤 열린 입과 한껏 뒤로 젖혀진 몸이 성애의 절정을 담고 있는, 가장 저속하고 불쾌한 작품이라는 비난이다.
예술가들의 기발한 상상만으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쾌락과 고통의 유기적인 관계를 철학적으로 규명하려는 문제의식도 있었다.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더 영리한 손을 가져다, 더 깊은 행복 더 깊은 불행에 손을 뻗쳐라. (…) 고통을 말한다. '가 버려라! 고통이여!' 그러나 모든 고뇌하는 자들은 살기를 바란다. 성숙하고 쾌락과 동경을 갖기 위하여. 더 멀고 더 높으며 더 밝은 것을 동경하기 위하여. (…) 고통은 동시에 쾌락이고, 저주는 동시에 축복이고, 밤은 동시에 태양이다. (…) 그대들은 고통에 말하라. '가 버려라, 그러나 되돌아오라!' 모든 쾌락은 영원을 원하기 때문이다!"
니체에 의하면 먼저 육욕을 비롯하여 쾌락을 향한 욕구를 긍정하는 태도가 전제되어야 한다. 흔히 사람들에 의해 쾌락은 "지금까지 가장 저주받아 왔고 가장 나쁜 평판을, 그것도 왜곡된 평판"을 받아왔지만, 니체는 이를 "인간적으로 좋은 것" 중의 하나로 간주한다. 세상 사람들의 통념으로는 쾌락을 획득하기 위해 고통이 사라져 버리기를 원한다.
그러나 고통은 곧 쾌락이기에 고통이 사라지는 순간 쾌락도 사라진다. 쾌락은 때로는 모험에 따른 위험을 동반하고, 우연에서 오는 불확실한 길을 헤매야 도달한다. 만약 더 높고 밝은 쾌락을 누리려 한다면, 더 깊은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니체는 "모험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죽음을 걸고 주사위 놀이를 하는 것, 그것도 가장 큰 자의 헌신"이라고 한다.
대신 '더 영리한 손'이 필요하다. 상반되어 보이는 둘 사이에서 유기적인 끈을 찾아내는 섬세한 인식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쾌락주의 선구자인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에게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면 더는 쾌락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라고 한다. 고통과 쾌락은 서로에게 전제다.
쾌락은 선택한다고 쾌락이 찾아오는 게 아니고, 고통을 피한다고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니다. "양자를 비교함으로써 이득이 되는 것과 해가 되는 것을 고려하여, 이런 문제들에 판단을 내려야 한다." 쾌락에서 고통으로 나아가기도 하지만, 반대로 고통에서 시작되어 쾌락을 향하기도 한다. 혹은 쾌락과 고통이 같은 시간과 공간에 섞여 있는 상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므로 행복을 실현하려면 니체가 지적한 영리함처럼 깊은 지혜와 사려가 필요하다.
쾌락과 고통의 뒤섞임은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현상이다. 아주 쉬운 사례로 음식에서 오는 쾌락을 떠올려보자. 고추나 겨자와 같은 매운 재료는 사실 감각에 통증을 유발한다. 하지만 감각의 고통을 통해 전체로서 즐거움과 만족이 찾아온다면 피하기는커녕 적극적으로 찾는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대체로 경험했겠지만, 사랑의 과정은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섞여서 나타난다. 서로 다른 성격과 습관을 지닌 사람들이 만나는 일이니, 갈등도 생기고 부정적인 감정이 나타나기도 한다. 만약 이러한 고통 모두를 거부한다면 사랑은 아예 통째로 거부해야 할 대상이 될 것이다.
사랑하면서 겪는 격한 갈등, 심지어 쓰라린 이별조차도 사랑의 한 과정으로 이해한다면 다른 전망이 열린다. 상대의 변심과 헤어짐이 뭉크처럼 평생을 씻을 수 없는 상처나 공포·혐오로 남는 게 아니라, 더 성숙한 사랑을 위한 토양이 될 수도 있다. 집착이라는 늪에서 발을 뺄 수만 있다면 질투가 새로운 열정을 향한 디딤돌 역할을 한다. 세상의 터부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권태의 직감은 형식적 관계를 넘어서는 자극의 출발점이 된다.
행복을 향한 욕망은 본래 변증법적인 발상과 관계 속에서 실현되는 게 아닐까? 현상적으로 대립하는 쾌락과 고통이 상호작용하고 서로 침투함으로써 새로운 즐거움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 말이다. 쾌락은 오직 즐거움·웃음에 관련된 것들과 관계를 맺고, 고통은 오직 슬픔·두려움·혐오에 관련된 것들과 어울린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역동적인 관계로 받아들일 때 살아 있는 행복이 우리 곁으로 찾아오지 않을까?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