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8.30 10:10ㅣ최종 업데이트 26.08.30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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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19혁명 당시에는 '경찰의 힘을 빼라'는 국민적 요구가 거셌다. 일제강점기에 이어 이승만 집권기에도 대중 억압의 선봉에 섰던 경찰이 집중적 질타를 받았다. 이때 극과 극의 장면을 만들어낸 곳 중 하나가 서울 청량리경찰서다. 2006년에 동대문경찰서로 개칭된 이곳은 4·19혁명 3년 전에 신설된 경찰서다.

4·19 당시 언론에 의해 서울 지역의 '고문경관 제1호'로 불린 경찰관은 동대문경찰서(2006년에 혜화경찰서로 개칭) 사찰계의 김용만 순경이다. 1960년 4월 24일 자 <동아일보>는 길이 1미터 곤봉으로 구타하면서 서울수도의과대학생 김한경을 4·19 시위 주모자로 몰았던 김용만이 서울지검에 의해 구속됐다면서 "4·19 사건 고문경관 제1호"라는 표현을 썼다.


그해 5월 6일 자 <부산일보>는 부산진경찰서 탁희봉 형사를 "고문경관 제1호"로 꼽았다. 탁희봉은 갱생청소년원 원생들을 구타하고 이들을 4·19 시위 당시의 경찰서 파괴 책임자들로 몰아세운 일 때문에 기소됐다.

서울 지역 고문경관 제2호를 배출한 곳은 청량리경찰서다. 그달 27일 자 <조선일보>는 청량리경찰서 휘경지서 백경호 경사가 구속된 사실을 전하면서 "고문경관 제2호"라는 표현을 썼다. 백경호는 4·19 다음날 경희대생 이성찬을 연행한 뒤 반공청년단 간부와 합세해 4·19 시위에 대한 보복 폭행을 벌인 일로 인해 구속됐다.

소속 경찰관이 극우 활동가와 함께 그런 보복 폭행을 벌인 사건 때문에 주목을 끈 청량리서는 민주당의 장면이 총리로 선출된 다음 날인 그해 8월 20일에는 정반대 모습을 보였다. 4·19 시위 때 극우 정치깡패에게 죽임을 당한 학생의 한을 풀어주는 일이 청량리서에 의해 일어났다.

8월 21일 자 <조선일보>는 "20일 하오 10시 30분경 청량리경찰서는 4·19 의거 학생을 몽둥이로 때려 죽인 전 화랑동지회 간부인 신정식을 살인 혐의로 검거했다"고 보도했다. 4·19 학생을 죽인 극우 깡패를 한밤중에 당구장에서 격투 끝에 체포하는 극적인 장면을 청량리서가 연출한 것이다.

전직 대공 형사가 간첩으로 몰리다

2023년 3월 민주노총 경남본부 건물 외벽에 "무죄로 판명된 조작사건들"이라고 새겨진 펼침막이 걸려 있다.
▲2023년 3월 민주노총 경남본부 건물 외벽에 "무죄로 판명된 조작사건들"이라고 새겨진 펼침막이 걸려 있다.윤성효

청량리서가 극과 극의 상반된 모습을 보여준 1960년부터 이곳에 몸담은 대공 형사가 훗날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경기연합 고문이 될 석달윤(1932~2022)이다. 전남 진도 출신인 그는 친척인 연희대생 박양민(한국전쟁 중 월북)의 주선에 힘입어 선린상업학교에 보궐 입학을 했다가 한국전쟁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고 진도경찰서 의용대원으로 있다가 입대했다.

제대 후에 고등공민학교(중학교 수준) 교사가 된 그는 2년제 경찰전문학교에 들어갔다. 이곳을 졸업한 해에 배치된 곳이 청량리서다. 석달윤의 아들인 석권호 전 민주노총 국장과의 인터뷰를 담은 2024년 7월 19일 자 <한겨레>에 따르면, 1960년 당시의 석달윤은 서울시경찰국 정보과 청량리분실 대공반 소속이었다. 서울시경이 청량리서에 설치한 대공분실의 형사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 일을 오래 하지 않았다. 37세 때인 1969년에 사표를 내고, 그 뒤 고향에서 해태(김) 양식업을 했다.

국가는 대공 형사에서 사업가로 변신한 그를 그냥 두지 않았다. 1981년에 국가는 이 전직 형사의 이름이 일간지에 나오도록 만들었다. 전두환 대통령이 국정연설을 통해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한 지 8일 뒤에 발행된 그해 1월 20일 자 <조선일보>는 "국가안전기획부는 19일 최근 10여 년간 국내에서 암약해온 3개 지하 고정간첩망 일당 15명을 검거"했다면서 세 사건의 하나인 김정인 사건의 가담자로 석달윤을 거명했다.

"(간첩에게 포섭된 김정인은) 친척 등을 대상으로 친목계를 조직하고 아버지 김양오, 처 한화자, 동생 김정수, 외척 석달윤 등과 같이 간첩 활동을 하다 검거됐다."

박정희 살해범 김재규의 조직이라는 이유로 전두환의 괄시를 받은 중앙정보부가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로 탈바꿈한 것이 1981년 1월 1일이다. 그래서 이 시점의 안기부는 전두환에 대한 충성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안기부가 공안사건 셋을 묵혔다가 한꺼번에 발표한 데는 그런 사정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전두환이 그달 12일에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한 일은 남한 통일운동권이 움직이게 만들 수 있는 일이었다. 이런 시점에 대규모 간첩사건 셋을 발표한 것은 운동권의 움직임을 사전에 제어하는 의미도 있었다. 전두환의 제의가 대북 제스처의 효과만 산출하고 운동권을 고무시키는 효과는 내지 못하게 만드는 측면도 있었다.

친척들의 친목계가 간첩 네트워크로 둔갑된 석달윤 사건(김정인 사건)의 발단은 중앙정보부의 남파간첩 수사다. 남파간첩으로부터 '박양민이 남파됐다는 이야기를 북에서 들었다'라는 진술을 확보한 것이 계기가 됐다.

억울한 누명을 벗은 석달윤

1981년 1월 20일자 <동아일보> 기사 "안전기획부 발표 고정간첩 3개강15명 검거"
▲1981년 1월 20일자 <동아일보> 기사 "안전기획부 발표 고정간첩 3개강15명 검거"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2007년 상반기 조사보고서'는 "남파 공작원 오○○를 통하여 '박양민이라는 공작원이 남파되어 공작활동을 하였다는 내용을 북한에서 전해 들은 바 있다'는 막연한 진술을 확보하고 이를 근거로 위 박양민의 고향 진도를 중심으로 내사를 하여 위 박양민의 외조카 김정인, 고종10촌 석달윤, 친구 장제영, 여동생 박공심 등을 강제연행"했다고 기술한다.

전직 대공형사 석달윤은 박양민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간첩방조 혐의를 받고 불법 구금을 당했다. 간첩 잡던 형사가 간첩으로 잡히는 극과 극의 경험을 하게 됐던 것이다. 위 보고서에 따르면, 석달윤은 48세 때인 1980년 8월 21경부터 겪은 일을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연행된 첫날 양손에 수갑을 채우고 손과 발을 묶은 뒤 몽둥이를 끼워 책상 사이에 매달리게 한 뒤 물고문을 하였다. 혐의 사실을 부인하자 200, 300와트 밝기의 전구를 눈앞에 켜놓고 전구를 계속해서 쳐다보게 하였다. 전구를 계속해서 쳐다보니 정신이 빙빙 돌면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밤새도록 추궁을 하면서 이틀 동안 한숨도 못 자게 하였다. 25일부터는 담뱃불로 무릎 아래에서 발목 위까지 지져대기, 송곳으로 허벅지 찌르기 등 고문을 했다. 그러다 수사관들이 전선을 연결시키는 모습을 보고 전기고문을 당하면 정말 죽을 것 같아 모든 것을 시인하겠다고 하였다. 그 다음날부터 자필 진술서를 매일 오전과 오후에 한 벌씩 써내고, 한 자라도 틀리면 사정 없이 몽둥이 세례를 받았다."

석달윤이 허위로 진술한 내용은 '박양민으로부터 공작금을 받고 해안가 경비 상황 등을 보고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허구를 바탕으로 서울형사지방법원은 1981년 1월 30일 무기징역을 선고했고, 서울고법과 대법원은 석달윤의 항소 및 상고를 기각했다.

무기징역형을 받은 석달윤은 김대중 정부 1년 차인 1998년 광복절에 가석방됐다. 1980년에 구금돼 18년간이나 갇혔으니 무기징역을 치른 것과 다를 바 없었다.

66세 나이로 가석방된 석달윤은 대공형사 이력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길로 나아갔다. 그는 70세 전후인 2000년대 초반부터 범민련 경기연합 고문으로 활동했다. 김대중 집권기의 남북 해빙기에 가장 강력한 통일운동단체의 일원이 됐던 것이다.

그 뒤 그는 자신을 간첩으로 규정한 1981년의 판결들을 뒤집는 활동에 나섰다. 첫 성과물은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규명결정을 얻어낸 일이다. 2007년 6월 26일 진실화해위원회는 '석달윤에게 사과할 것'을 국가에 권고했다. 뒤이어 2009년에는 서울중앙지법의 재심재판에서 무죄판결이 나왔다. 이 재심은 이 단계에서 확정됐다. 이로써 그는 1981년의 판결들을 합법판결에서 불법판결로 뒤집는 데 성공했다.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아낸 석달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에 나서 2011년에 대법원에서 위자료 25억 원을 인정받았다. 25억 원이 18년간의 옥살이에 대한 보상이 될 수는 없지만, 그는 국가를 상대로 다시 승리했다.

극과 극이 교차하던 1960년의 청량리경찰서에 들어간 석달윤의 인생은 극적 반전의 연속이었다. 2022년 11월 30일 자 <통일뉴스>는 "조작된 이른바 진도 간첩단 사건으로 18년 감옥에 갇혔던 소정(素政) 석달윤 범민련 경기연합 고문이 29일 타계했다"고 전했다. 향년 90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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