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1월 20일자 <동아일보> 기사 "안전기획부 발표 고정간첩 3개강15명 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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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2007년 상반기 조사보고서'는 "남파 공작원 오○○를 통하여 '박양민이라는 공작원이 남파되어 공작활동을 하였다는 내용을 북한에서 전해 들은 바 있다'는 막연한 진술을 확보하고 이를 근거로 위 박양민의 고향 진도를 중심으로 내사를 하여 위 박양민의 외조카 김정인, 고종10촌 석달윤, 친구 장제영, 여동생 박공심 등을 강제연행"했다고 기술한다.
전직 대공형사 석달윤은 박양민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간첩방조 혐의를 받고 불법 구금을 당했다. 간첩 잡던 형사가 간첩으로 잡히는 극과 극의 경험을 하게 됐던 것이다. 위 보고서에 따르면, 석달윤은 48세 때인 1980년 8월 21경부터 겪은 일을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연행된 첫날 양손에 수갑을 채우고 손과 발을 묶은 뒤 몽둥이를 끼워 책상 사이에 매달리게 한 뒤 물고문을 하였다. 혐의 사실을 부인하자 200, 300와트 밝기의 전구를 눈앞에 켜놓고 전구를 계속해서 쳐다보게 하였다. 전구를 계속해서 쳐다보니 정신이 빙빙 돌면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밤새도록 추궁을 하면서 이틀 동안 한숨도 못 자게 하였다. 25일부터는 담뱃불로 무릎 아래에서 발목 위까지 지져대기, 송곳으로 허벅지 찌르기 등 고문을 했다. 그러다 수사관들이 전선을 연결시키는 모습을 보고 전기고문을 당하면 정말 죽을 것 같아 모든 것을 시인하겠다고 하였다. 그 다음날부터 자필 진술서를 매일 오전과 오후에 한 벌씩 써내고, 한 자라도 틀리면 사정 없이 몽둥이 세례를 받았다."
석달윤이 허위로 진술한 내용은 '박양민으로부터 공작금을 받고 해안가 경비 상황 등을 보고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허구를 바탕으로 서울형사지방법원은 1981년 1월 30일 무기징역을 선고했고, 서울고법과 대법원은 석달윤의 항소 및 상고를 기각했다.
무기징역형을 받은 석달윤은 김대중 정부 1년 차인 1998년 광복절에 가석방됐다. 1980년에 구금돼 18년간이나 갇혔으니 무기징역을 치른 것과 다를 바 없었다.
66세 나이로 가석방된 석달윤은 대공형사 이력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길로 나아갔다. 그는 70세 전후인 2000년대 초반부터 범민련 경기연합 고문으로 활동했다. 김대중 집권기의 남북 해빙기에 가장 강력한 통일운동단체의 일원이 됐던 것이다.
그 뒤 그는 자신을 간첩으로 규정한 1981년의 판결들을 뒤집는 활동에 나섰다. 첫 성과물은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규명결정을 얻어낸 일이다. 2007년 6월 26일 진실화해위원회는 '석달윤에게 사과할 것'을 국가에 권고했다. 뒤이어 2009년에는 서울중앙지법의 재심재판에서 무죄판결이 나왔다. 이 재심은 이 단계에서 확정됐다. 이로써 그는 1981년의 판결들을 합법판결에서 불법판결로 뒤집는 데 성공했다.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아낸 석달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에 나서 2011년에 대법원에서 위자료 25억 원을 인정받았다. 25억 원이 18년간의 옥살이에 대한 보상이 될 수는 없지만, 그는 국가를 상대로 다시 승리했다.
극과 극이 교차하던 1960년의 청량리경찰서에 들어간 석달윤의 인생은 극적 반전의 연속이었다. 2022년 11월 30일 자 <통일뉴스>는 "조작된 이른바 진도 간첩단 사건으로 18년 감옥에 갇혔던 소정(素政) 석달윤 범민련 경기연합 고문이 29일 타계했다"고 전했다. 향년 90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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