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대 대법원장이 2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으로 출근하고 있다. 2026.8.21
연합뉴스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 대한 기억이 다소 흐릿해질 정도로 조희대 대법원장의 리스크가 커지고 있다. 조희대발(發) 리스크는 파괴력뿐 아니라 범위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6·3 대선 1개월 전인 지난해 5월 1일 이재명 선거법 사건에 대한 항소심 무죄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되돌려보냈다. 이로써 그는 대선에 개입했다는 비판을 자초했다. 그는 금년 2월 23일에는 법왜곡죄·재판소원 신설 및 대법관 증원을 담은 사법 3법에 대해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이달 18일에는 대법관 임명제청에 관한 관행을 깨고 서면 제청을 함으로써 행정부와의 갈등을 증폭시켰다. 서면 제청 자체가 법적으로 문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그 자신의 선례와도 어긋나기 때문에 행위의 동기를 의심케 만들 만했다. 그는 자신을 대법원장으로 임명해준 윤석열 대통령의 재임기에는 사전 조율을 거쳐 엄상필·신숙희·노경필·박영재·이숙연·마용주 대법관에 대한 임명을 제청했다.
지난해 9월 12일 '제11회 대한민국 법원의 날' 기념식에 참석한 그는 "사법부가 그 헌신적인 사명을 온전히 완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재판의 독립이 확고히 보장돼야 한다"라며 "법관 여러분은 어떤 어려움에도 흔들림 없이 오직 헌법을 믿고 당당하고 의연하게 재판에 임해달라"고 당부했다.
사법부 수장이 재판 독립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발언 시점을 놓고 보면 심상치 않은 측면이 있었다. 이 발언은 사법개혁과 내란전담재판부 설치가 추진되는 과정에서 나왔다. 그것은 내란재판에 대한 사법부의 태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발언이었다.
역대 대법원장들이 일으킨 논란
위와 같이 굵직한 사안들만 놓고 봐도, 조희대 대법원장의 발언과 행보는 상당히 큰 그림의 소재가 될 만하다. 그가 영향을 미친 범위는 사법개혁, 대법관 임명 방식, 대선, 내란재판 등에 걸쳐 있다.
대법원장이 사법개혁이나 대법관 임명을 놓고 행정부와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대선에 영향을 미칠 만한 행보를 하는 것은 대법원장과 어울리지 않는다. 재판에 관한 일이기는 하지만, 내란재판에 영향을 미칠 만한 발언을 하는 것 역시 문제의 소지가 있다. 그가 일으킨 갈등들은 일반적인 삼권분립 구도에서 나타날 만한 갈등의 범위를 넘어섰다.
대선 직전에 파기환송심 판결을 내놓은 일은 그가 사법체제뿐 아니라 민주주의체제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역동적'인 인물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사법부 지도자보다는 행정부나 의회 지도자에 어울리는 모습이다.
그의 행보는 현행 헌법에 기초한 1987년 체제하의 역대 대법원장들과 비교해도 차원을 달리한다. 이 체제하에서 리스크를 일으킨 김용철·김덕주·최종영 대법원장을 뛰어넘을 뿐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양승태 대법원장도 능가한다.
87체제하의 첫 대법원장인 김용철은 본의 아니게 리스크에 휘말렸다. 전두환 집권기인 1986년에 취임한 그는 현행 헌법 시행일인 1988년 2월 25일 이후로 자동적으로 대법원장 직을 유지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는 원칙에 따라 노태우 대통령이 신임 대법원장 임명을 서둘렀다면, 혹은 대법원장 자신이 신속히 물러섰다면, 김용철 리스크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둘 중 어느 쪽에서도 그 같은 선제적 대처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노태우는 김용철 유임 방침을 세웠고, 이는 법조계와 소장 판사들과 야당이 사법파동을 일으키는 원인이 됐다. 결국 김용철은 그해 6월 17일에 사퇴 기자회견을 열었다. 2월 25일경에 했어야 할 사퇴를 4개월 정도 뒤늦게 한 셈이다.
김용철이 물러난 뒤, 여론의 지지를 받는 이일규 대법원장이 취임해 1990년 정년퇴임 때까지 직을 수행했다. 그런 다음에 취임한 김덕주 대법원장은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1993년에 사법 리스크의 진원지가 됐다.
사법부 개혁세력은 김영삼 정부 첫해에 사법개혁을 요구했다. 1993년 7월 1일 자 <서울신문>에 따르면, 소장 판사 28명은 "판결로 말해야 했을 때 침묵했고, 판결로 말해선 안 되는 걸 말했고, 판결 뒤에 숨어 진실에 등 돌렸다"라며 대법원장 인사권을 분산하고 법관인사위원회에 힘을 실어주며 전국법관회의를 설치하는 등의 개혁을 요구했다.
자신의 기득권과 연관된 사법파동 앞에서 김덕주 대법원장은 미온적인 모습을 보였다. 개혁이 아닌 개선책을 내놓는 수준에 그친 그는 부동산 투기 의혹까지 불거지는 바람에 그해 9월 10일 스스로 물러났다.
김덕주 퇴임 이후에 윤관 대법원장이 나오고, 그 뒤 최종영 대법원장이 김대중 정부 2년 차인 1999년에 취임했다. 노무현 정부 1년차인 2003년에 사법파동을 맞이한 최종영 대법원장은 대법관 구성을 다양화하고 기수·서열을 타파하라는 요구에 대해 처음에는 맞서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다가 반발이 거세지자, '앞으로는 그렇게 하겠다'라며 상황을 진정시켰다. 그 뒤 그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약속을 상당 부분 지켰다. 전효숙 부장판사를 헌법재판관으로 지명하고 김영란 부장판사를 대법관으로 제청했다. 대법원뿐 아니라 헌법재판소에도 여성이 진출할 토대를 만든 것이다.
민주주의 위협하는 '조희대 리스크'

▲더불어민주당 김민석 대표와 한병도 원내대표를 비롯한 의원들이 20일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조희대 대법원장 사퇴를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남소연
김용철·김덕주·최종영 대법원장이 일으킨 리스크도 결코 가볍지 않지만, 그들의 리스크를 조희대 리스크와 비교할 수는 없다. 그중 어느 누구도 대선에까지 직접적 영향을 주는 모험은 시도하지 않았다.
2011년부터 2017년까지 재임한 양승태 대법원장은 김용철·김덕주·최종영을 명확히 뛰어넘는 리스크를 일으켰다. 그는 사법행정권을 남용해 구체적인 재판에 개입하고,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정부와 협력하고자 재판 거래를 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또, 비판적인 판사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인사상 불이익 조치 등을 검토했다는 의혹도 있었다. 거기다가 전범기업인 미쓰비시중공업이 관련된 강제징용 손해배상소송을 한일관계 개선 및 상고법원 추진을 목적으로 지연시켰다는 의혹까지 받았다.
양승태가 일으킨 리스크와 조희대가 일으킨 리스크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양쪽 다 중차대하다. 하지만 한 군데에서는 후자의 우열이 확실하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벌인 일들은 2016년 촛불혁명 이전의 일들이다. 촛불혁명을 목격한 직후에 그 같은 사법농단을 일으켰다면, 그는 '매우 간 큰 대법원장'으로 역사에 길이길이 남았을 것이다. 그는 시민혁명에 정면으로 맞서는 무모함은 보이지 않았다.
이에 비해 조희대 대법원장은 빛의 혁명 5개월 뒤부터 리스크를 일으켰다. 일반적인 경우에, 시민혁명 직후에는 사법부가 대중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하기 마련이다. 이런 시기에 적극적 행동을 보이는 쪽은 일반적으로 사법부 내의 소장 개혁세력이다. 조희대처럼 시민혁명 직후에 시민혁명 주체세력을 거스르는 행보를 걷는 사법부 지도자는 희귀하다. 이 점에서 그는 양승태를 명확히 넘어선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우리 사회에 충격을 준 지 10년도 되지 않아 조희대 대법원장이 또다시 충격과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이는 87체제 하의 한국 민주주의가 그만큼 약해졌음을 의미한다. 국민들이 직접 나서 2016년에 이어 2024년에도 민주주의를 지킨 것은 한국인들의 민주주의 역량을 보여주는 것이지 한국 민주주의 체제의 건강성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조희대 리스크는 군대나 행정부 혹은 입법부가 아닌 사법부의 수장이 얼마든지 흔들 수 있을 정도로 민주주의 체제에 문제가 생겼음을 경고해 주는 '사인'이다. 그래서 조희대 리스크는 그 개인에 대한 대응의 차원이 아니라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대응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사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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