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8.30 18:14최종 업데이트 26.08.30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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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사람의 기록을 담은 책을 소개한다. 송곳이 되어 준 작가의 경험과 필자의 지금을 들여다보아 변방에서 안방으로 자리를 넓혀 먹고사는 오늘의 온도를 1℃ 올리고자 한다.[기자말]
문화생활의 정의는 무엇일까. 표준국어대사전에선 "문화 가치의 실현에 노력하여 문화 산물을 음미하고 즐기는 생활"이라 하는데, '실현' '노력'이라는 단어에 왠지 새마을운동이 떠오른다. 뿐더러 '문화 산물'이 아니더라도 "예술이야!" 하고 즐겼던 순간은 영화관과 미술관 바깥에도 있었다.

국립미술관 전시를 보고 나온 어느 날, 공사가 중단된 건설현장을 지나는데 모래판 가운데 웬 삽이 꽂혀 있었다. 그 위에 누군가 씌웠을 밀짚모자와 마주쳤고, 순간 참새 몇 마리가 그 위를 앉았다 쉬어갔다. 어떤 전시 목적도 없는 인부의 작업 도구와 참새의 조화로움에, 나도 모르게 감탄했다.

일과 사랑으로 삶을 회복하자는 '선언'

그날, 예술산업 현장이 아닌 다른 분야, 타인의 신성한 일터에서 '아우라'를 느낀 건 경솔한 태도일까. 땀 흘리는 노동현장에 대한 기만일까. 아우라는 "예술 작품에서 흉내 낼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인데, 나는 부지불식간에 매료됐고, 그런 의외의 순간이 때때로 삶 한가운데 무방비하게 온다.

<사랑의 정답>
<사랑의 정답>최종천, 걷는사람 출판사

최종천의 유고 시집 <사랑의 정답>(2026년 7월 출간)을 읽고, 한 시인의 아우라를 벼락처럼 만났다. 1986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한 시인을 이 시집 덕택에 입문했고, 적잖게 시를 읽어왔다고 자만하던 독자로서 '시'의 모양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의 문학적 식견을 화려하게 전시해야 직성이 풀리는 텍스트힙 시대, 시인은 인간 본연의 행위라 할 수 있는 '일'과 '사랑'을 이 시집으로 치열하게 고민한다.

처음엔 시집에 담긴 언어가 낯설었다. 정열적이고 카랑카랑한 음성이 요즘 현대시의 그것과 달랐다. "소외되지 않는 노동으로/자연의 심부름을 하며" 살자고 일관되게 권유하는 화자의 철학 또한 간단치 않았다. 생활 속 위트와 언어 실험이 주를 이루는 요즘 시들 사이에서 색채가 뚜렷했다.


대개의 문학작품은 노동으로 소외된 '인간의 상실'에 초점을 맞추지만, 시인은 좀더 다른 길을 택한다. '노동 회복'을 주장하는데, 다른 말로 하면 원시 노동. 인간이 자연을 앞서가지 않으며, 생산한 상품들이 종국엔 쓰레기통으로 가지 않는 '최소한의 일'과 사랑을 꾸리며 살자는 게 그의 지론이다.

노동계에선 흔히 '노동 해방'을 주창하지만, 시인은 "일하는 사람이 진정한 사제"라고 강조한다. 노동을 예찬한다는 뜻은 아니다. 노동도 본래 자연의 일부였는데, 지금의 노동과 문명은 인간의 본성을 훼손하는 방향으로 산업화되었기에, 그 참혹을 방관하지 않겠다는 것. 그 희망과 달리 수시로 불협화음이 일어나는 인생과 일터에서 시인은 번민한다. 그래도 기어코 계속, 쓴다.

누구나의 일터에도 '불협화음의 미학'이 있다

투박하면서도 평생 치열하게 '사랑과 일'의 상관관계를 탐구해온 시인은 우리에게 몇 가지 장면을 선사한다. 그는 일터에서 쇠락해가는 인간의 고통보다 일터에서 우연히 맞닥뜨린, 그러나 누구나 경험했을 법한 순간을 불러와 '우리의 문화생활'이 이미 노동 안에 스며든 평범한 자산임을 알린다.

저기 저 H빔에 뚫려 있는 구멍 하나는/잘못 뚫어서 메워야 하는 것인데/바빠서 그대로 둔 것이다 (중략) 불협화음 같은 것이다/실수를 즐기는 것은 예술만의 특허가 아니다/노동은 실재의 실수를 즐길 수가 있는 것이다//저 구멍의 내력을 아는 노동자들만이/구멍을 보면서 웃을 수도 즐길 수도 있다
- <사랑의 정답>에 실린 시 <구멍 하나>(최종천) 중에서

시인은 말한다. "이거야말로 예술의 아우라가 아니냐?" 발터 벤야민이 복제할 수 없는 예술 특유의 개성을 '아우라'라고 했듯이, 용접공이 실수로 뚫은 구멍에서 우리는 일말의 유머와 고유한 미적 쾌감을 느낄 수 있다. 재단사가 행로에서 벗어난 재단을 하다가 의외의 패턴을 발견하듯이. 청소부가 갤러리 공간을 쓸다가 잠깐 내려놓은 빗자루가 설치미술 한 점이 되어 골똘한 사유를 부르듯이.

이 사유는 그의 전작 <인생은 짧고 기계는 영원하다>에 실린 시 <노동의 십자가: 현악사중주>에서도 드러난다. 시인은 "예술은 허구이기 때문에 실수와 실패를 즐길 수" 있지만, "노동은 질료와 실체를 다루기"에 "실패가 용납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인간은 노동에 몰두할 수 없다는 것. 예술마저 가격으로 평가되는 오늘, 시인은 "사랑하기와 일하기"가 전부인 "에덴"을 시에 소환한다.

"에덴", 그러니까 시인의 이상향 그리기는 허황되지 않다. 시집 1부에 실린 <어떤 새끼야, 이거?>에선 용접기가 엉키면서 전류가 나가고,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용접공들은 누구의 용접기가 사고를 일으켰는지 추적한다. 핏대가 올랐다가 서서히 긴장을 푼 노동자들은 이내 "곰처럼 웃"으며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찰나이지만, 본래 모습으로 돌아와 고향을 묻고 '사람'을 궁금해한다.

왼쪽부터 고 최종천 시인의 시집들. <인생은 짧고 기계는 영원하다>(2018), <용접의 시>(2013), <그리운 네안데르탈>(2021), <나의 밥그릇이 빛난다>(2007). 최종천 시인의 1주기인 2026년 7월 18일 출간된 <눈물은 푸르다>, <사랑의 정답>(2026).
왼쪽부터 고 최종천 시인의 시집들. <인생은 짧고 기계는 영원하다>(2018), <용접의 시>(2013), <그리운 네안데르탈>(2021), <나의 밥그릇이 빛난다>(2007). 최종천 시인의 1주기인 2026년 7월 18일 출간된 <눈물은 푸르다>, <사랑의 정답>(2026).걷는사람 출판사 외

인간의 실패를 외면하지 않기

시인이 꿈꾸는 낙원은 어쩌면 '사람'을 궁금해하는 생활이 아니었을까. '문화생활'과 '노동'을 구분하지 않고, 같은 계급과 동료 사이에서 때때로 파도처럼 밀려드는 '고독'을 우롱하지 않는 것. 2부에 수록된 시 <작고 조용한 것들>에서처럼, "거대한 것이 무너"져도 구두 수선공의 노동으로 우리의 걸을 수 있음을 가만히 직시하는 것. 인간의 반복되는 실패와 그러함을 외면하지 않는 것.

최종천 시인은 오랜 세월, 비트겐슈타인과 조르주 바타유 등의 철학서를 탐독해왔다. 정규 교육과정을 밟지 않았고, 시를 쓰는 내내 용접일을 멈추지 않았다. 시인은 노동을 떠난 예술은 없고, 예술이 떠난 노동이 없음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시로 드러내며 말한다. "아름다운 사랑을 해 보지 못한 내가/사랑의 시를 쓰고 있다." 이제 시인이 남긴 사랑의 정답을 독자가 구할 차례다.

고백하면, 시집 <사랑의 정답>을 읽고 노동시에 관한 생각이 달라졌다. 문화생활이란 말을 구태여 쓰는 게 의미 없듯, 노동시와 현대시 구분 또한 의미 없다는 것. 예술하는 마음이 월요일 회사원의 책상이나 공사장 거푸집에도 흐를 수 있다는 것. 실수 범벅이인 우리 인생에 구할 최대치의 가치가 '사랑'이라는 것. 연애시 같다가도 인류애를 어떻게 가질 것인가 고민케 하는 시가 여기 있다.

사유 없이 '출력값'만 빈번한 AI 시대, 다음 증상을 호소하는 독자에게 최종천 시집 읽기를 권한다. 첫째, 화제의 전시와 문학작품 그리고 범람하는 굿즈보다 현실의 내 삶을 이루는 알맹이를 요모조모 탐구하고 싶은 사람. 둘째, "사유하는 사람이자 동시에 노동하는 사람(<프롤레타리아의 밤>, 자크 랑시에르)"으로 균형을 맞추며 잘 살고 싶지만 왠지 노동이라는 단어에 편견이 박힌 사람.

마지막, 예술이 근사한 갤러리나 공연장에서 일어나는 무형의 독점물인 것 같아 섭섭한 그대에게 풋풋함 한 스푼 끼얹은 시집 <사랑의 정답>을 내민다. 기계보다 퇴화할 수밖에 없으나 실패하는 경험으로 전진하는 보통 사람, 보통의 노동자이자 예술가의 천진함과 위대함을 만날 수 있다.

어쩌면 미학이란, 맑은 마음으로 아침에 일어나고 싶은 인간의 오랜 견딤에게서 시작된 공부임을, 한 시인에게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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