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8.24 07:21ㅣ최종 업데이트 26.08.24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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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프로야구 불멸의 4할 타자인 백인천 전 감독이 15일 오전 6시 41분 충남 천안 단국대학교 병원에서 뇌출혈로 치료받던 중 별세했다. 향년 83세. 사진은 지난 2019년 12월 한국프로야구 은퇴선수의 날 행사에서 시상하는 백 전 감독.
▲한국프로야구 불멸의 4할 타자인 백인천 전 감독이 15일 오전 6시 41분 충남 천안 단국대학교 병원에서 뇌출혈로 치료받던 중 별세했다. 향년 83세. 사진은 지난 2019년 12월 한국프로야구 은퇴선수의 날 행사에서 시상하는 백 전 감독.연합뉴스

1960년 1월 동계전국체전 1500미터 스피드스케이팅 남자고등부 1위는 경동고등학교 2학년 백인천이 차지했다. 기록은 2분 52초 92였다. 그는 이듬해 같은 대회에서는 500미터(49.9초)와 1500미터(2분 49초 18) 2관왕에 올랐다.

"야구를 좋아했지만, 그래도 운동선수로서 올림픽에 한 번쯤은 나가보고 싶었어. 야구는 올림픽에 갈 수 없었으니까. 열심히 했지. 그래서 고등부 랭킹 1위가 됐고, 1964년 동계올림픽 출전도 가능했어. 그런데 생각보다 일찍 일본에 가서 프로선수가 되면서 포기했지." (백인천)


기록만으로 따져보면, 그의 기억과 달리 그가 실제로 올림픽 대표 선발에 근접했던 것까지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가 목표로 했던 1964년 인스브루크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1500미터 금메달리스트(안트 안트손)의 기록은 2분 10초 3, 그 대회에 출전한 한국대표(최영배)의 기록은 2분 20초 3이었으며 500미터 금메달리스트(리처드 맥더모트)의 기록은 40초 1, 한국대표(최영배)의 기록은 44초 8이었다. 금메달이 아닌 국가대표 선발을 위해서도 각각 30초와 6초라는 쉽지 않은 기록 단축이 필요했던 셈이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을 막론하고 근력의 중요성에 대해 무지하던, 그래서 오히려 근력 운동을 금기시하던 야구판에서 스피드스케이팅 최상위 레벨의 하체 근력이 발휘한 파괴력은 엄청났다. 그는 대체로 몸집이 큰 선수에게 맡겨지던 포수였고, 한국 일본 대만에서 각각 기념비적인 홈런을 날린 고교생으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당대 최고 수준의 스피드로 2, 3루타와 도루를 양산하는 선수였다.

스케이터 백인천
▲스케이터 백인천올림픽 출전을 꿈꾸던 소년 백인천은 하루 종일 오리걸음을 한 끝에 스피드스케이팅 고교 랭킹 1위에 올랐다. 그리고 그 허벅지 힘이 그를 위대한 타자이자 만능 야구선수로 만들었다.백인천

스케이트, 그리고 일본 야구

그의 몸을 만든 것이 스케이트였다면, 야구선수로서 그의 정신세계를 만든 것은 일본에서의 경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중학생 시절 야구잡지에서 접한 나가시마 시게오의 모습에 반해 일본 프로야구 무대를 동경하기 시작했고, 또 경동고의 일본 방문경기 후 일본 야구계에서 자신을 '일본 프로야구로 온다면 3천만 엔을 받을 수 있는 선수'로 평가했다는 신문 기사를 접한 뒤 도전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1년 뒤인 1962년 일본 프로야구 도에이 플라이어즈에 입단하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그가 가진 엄청난 잠재력 외에도 대단한 행운과 특혜가 겹쳐 가능해진 일이었다. 당시 우리에게 일본은 아직 수교가 이루어지지 않은 적대국이었으며, 그 이후로도 수십 년간 수많은 야구 천재들이 해외 진출의 엄두도 내지 못하게 가로막았던 병역의 의무도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침 그 때 박정희가 군사정변을 통해 최고권력자로 떠올랐고, 그는 백인천이라는 야구선수와 일본 양쪽 모두에 호감을 가진 인물이었다.

하지만 입단한 뒤로는 상황이 달라졌다. 특혜도 행운도 없었다. 그에게 인심 좋은 덕담을 아끼지 않던 일본 야구계의 관심과 호의는, 그의 입단과 동시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팀 내에서 그는 밀어주고 끌어줄 선후배도 아무도 없고 말조차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어리숙한 '조센징'일 뿐이었다.

상대 팀 선수들은 그를 조롱했고 선배들은 무시하거나 허드렛일을 강요하며 그의 연습을 방해했으며, 심판들은 노골적인 편파 판정으로 그의 신경을 긁었다.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는 포기 대신 어떻게든 성공하는 쪽을 선택했고, 그렇다면 오직 성적을 내는 것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결론 내렸다.

"다른 길이 없었어. 어떻게든 1군에 올라가서 뛰지 못하면, 나는 살길이 없다. 뭐가 옳고 그르고 누구한테 하소연 해봐야 소용도 없는 거고. 무조건. 어떻게든. 그러려니까 뭐 밥만 먹고 잠만 자면서 그냥 (배트를) 휘둘렀다고. 어떤 때는 잠도 안 자고 휘둘렀고." (백인천)

살아남기 위해 매달리는 그의 훈련량은 '돈을 벌기 위해' 혹은 '스타가 되기 위해' 야구를 하는 이들의 훈련량을 압도했고, 그런 훈련량이 어느 정도의 고통과 인내심을 요구하는 것인지 잘 아는 동료와 경쟁자들의 말문을 틀어막았다. 먼저 재일동포로서 이미 일본 야구의 전설적 존재로 자리잡아가던 장훈이 그를 인정했고, 그를 따라 백인천을 동료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조금씩 늘어갔다. 우호적으로 바뀌는 분위기 속에서 일취월장하던 백인천이 지도자들의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입단 2년 차인 1963년부터 1군 무대를 조금씩 경험하기 시작해 1964년부터는 1군에 상주하며 주전 경쟁을 벌이게 됐다. 1965년에 그는 주전이 되어 14개의 홈런을 날렸고 1975년에는 타격왕에 올랐다.

그렇게 죽을힘을 다해 노력함으로써 활로를 열었던 경험은, 그가 팬들에게 사인을 해줄 때마다 그의 이름과 함께 적었던 '노력자애(努力自愛)'라는 문구에 응축되어 있다.

"노력이라는 건 그야말로 죽을힘을 다하는 거거든. 그냥 대충 힘들 때까지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죽기 직전까지 하는 거지. 뭐든 하나 이루어내려면 그렇게 노력하는 걸 스스로 즐기는 수밖에 없다는 얘기야." (백인천)

노력자애
▲노력자애생전의 백인천이 사인볼에 함께 써주던 글귀 '노력자애'. 그 네 글자 속에 그의 성공과 실패의 역설적이고 복합적인 사연들이 숨어있다.김은식

노력자애(努力自愛)

그런 재능과 그런 노력으로 백인천은 최고의 야구 선수가 됐다. 고교 3학년이던 1960년 경동고의 32승 2무 무패 전관왕 신화를 이끌었고 일본 프로무대에서도 20년간 209홈런 212도루를 기록한 정상급 타자로 활약했다. 그리고 40세가 되던 해 한국에서도 프로야구가 시작되자 귀국해 전무후무한 4할 타율의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지도자로서도 그의 경력은 대부분 성공적이었다. LG 트윈스의 초대 감독으로서 창단 첫 해 우승을 이끌었고 삼성 라이온스에서도 비록 우승을 하지는 못 했지만 1990년대 중반 팀의 침체기를 끝내고 대세상승기로 이끄는 대대적인 타선 리빌딩을 성공시켰다. 단단한 하체 근력과 그에 기반한 스피드를 강조하는 훈련 지도, 그리고 오랜 세월 생존경쟁 속에서 관찰하고 연구해 온 기술과 요령 전수가 주효한 덕분이었다.

"뛰는 데는 자신이 있었어. 1982년도에 프로가 시작되고도 그냥 뛰면 살았지. 그런데 딱 후반기로 넘어가면서 MBC 투수들의 타이밍이 달라지더라고. 백인천 감독이 투수들을 다시 지도한 거지. 그때 내가 처음으로 공부하고 연구를 하기 시작했어. 투수들마다 습관이라는 게 있는데, 그걸 다 분석하고 기록해서 스타트를 할 타이밍을 다시 찾아야 했던 거야." (김일권)

한국 프로야구 초창기에 5번이나 도루왕에 오르며 '대도(大盜)'로 불렸던 김일권의 회상이다. 원년 OB 베어스의 우승을 이끈 최강 에이스 박철순의 이야기도 비슷하다.

"백인천 감독은 안 속거든. 배트를 요렇게 쥐고 있다가 고르고 커트하고, 그러다가 하나 몰리면 간결하게 휘두르면서도 넘겨버리거든. 백 감독 본인도 그렇고, 청룡 타자들이 쉽지 않았어. 그걸 또 가르쳐주잖아. 경기를 계속해 가면서 분석을 해가지고." (박철순)

거칠 것이 없었던 압도적인 투수에게도, 주자에게도, 백인천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한 수 위의 고수였고 거슬리는 방해꾼이었다. 감독 겸 선수로서의 부담감에 얇은 선수층의 한계를 미처 넘어설 수 없었던 청룡 시절과는 달리, 조금 더 준비하고 대비한 트윈스와 라이온스 시절에 감독으로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만들 수 있었던 이유였다.

다만 그의 마지막 현장 경력이 되고 만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으로서 처참한 실패를 경험했고, 더 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에 그는 좋은 결말을 남기지 못한 야구인으로 흔히 기억되곤 한다. 그를 감독으로 선임했지만 충분히 뒷받침하지 않는 구단과 불화를 겪었고,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확고한 지도철학과 어긋나는 선수들과 불화를 만들었다.

나름의 방식으로 리그를 농락할 수 있던 투수 손민한의 '노력하지 않는' 모습을 못마땅해했고 물러 보이는 하체와 둔한 스피드를 방치하는 이대호와 최준석의 몸매에 고개를 저었다. 또 자신의 지도 철학에 이래저래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거나 선수단의 자율성을 요구하던 그 팀의 상징적인 선수들에게 혀를 찼다. 그리고 정리되지 않은 채 표류하던 팀을 어느 순간부터 방치하는 듯 보였고, 자이언츠는 우리 프로야구에서 전무후무한 암흑기로 빠져들고 말았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절대 성공할 수 없다는, 그 유일한 길을 거부한다면 더 어쩔 수 없다는 듯한, 그를 살게 한 오기가 오히려 그를 주저앉힌 역설이고 비극이었다.

노력과 성공, 성공의 역설

선수로서, 지도자로서, 해설가로서 모두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일본의 명장이며 잠시 백인천과 한솥밥을 먹기도 했던 노무라 카츠야 감독은 자신이 뒤늦게 발견한 특이한 선수의 유형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열심히 하는 모습을 쑥스러워하는 선수'다. 훈련장에서는 느슨하게 보이지만 실전에서 최고의 플레이를 보여주는 선수들을 흔히 '천재형'이라고 분류하지만, 그 중에는 남에게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쑥스러워 남 몰래 노력하는 유형도 분명히 있더라는 이야기다.

'노력하지 않는 재능은 무의미하다'는 확신 이전에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하는 경우도 있다'는 생각을 그가 할 수 있었다면. 혹은 '말을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물을 먹일 수는 없다'는 마음으로 노력 여부는 선수에게 맡기고 그 결과만 평가하자고 한 걸음 물러날 결심까지 그가 할 수만 있었다면. 그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엄청난 허벅지 근육을 만든 특효약 '오리걸음'을 과용할 때 어떤 부작용이 있을 수 있는지에 관한 의학적인 조언에도 귀를 기울여 볼 수 있었다면. 어쩌면 그의 야구인생 마지막 장도 조금은 달라질 수 있지 않았을까.

그 거대한 실패를 통해 그가 또 어떤 교훈을 얻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에게 더 이상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고, 짧지 않은 야인의 세월을 거쳐 이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떠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최고의 선수, 대단한 지도자. 하지만 마지막 순간 오점을 남기고 흘러간 옛 이름. 하지만 그가 떠난 자리에서 팬들은 그의 위대한 기록과 그에 대한 이런저런 평가를 넘어 또 하나를 기억해야 한다. 그의 성공 너머에 존경할 만한 노력이 있었음을. 하지만 때로는 노력을 통해 얻은 성공이 시야를 좁히면, 세상에 또 다른 방식의 노력과 성공들이 있음을 부정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사실을.

LG 트윈스의 초대 감독이자 첫 우승감독
▲LG 트윈스의 초대 감독이자 첫 우승감독1983년, 사생활 문제로 MBC 청룡에서 불명예퇴진했던 백인천은 1990년 LG 트윈스로 바뀐 그 팀으로 돌아와 초대감독에 올랐고, 창단 첫 해 우승이라는 기적까지 만들어냈다.LG 트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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