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8.23 10:56ㅣ최종 업데이트 26.08.23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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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4월경부터 7월경까지는 최저임금에 관한 줄다리기가 자주 보도된다. 금년 경우에는 지난 4월 21일 최저임금 심의가 개시돼 7월 14일에 '시간당 1만 700원'으로 하는 의결이 이뤄졌다.

그런데 자본주의 초창기에는 최저임금이 아닌 최고임금이 국가적 화두였다.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잉글랜드의 노동 법제를 설명하면서 "1349년의 노동자 법령 및 그 뒤에 제정된 모든 법령의 정신은 국가가 임금의 최고한도는 제정하지만 결코 그 최저한도는 제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명백히 나타나고 있다"라고 지적한다. 노동자에게 한 푼이라도 더 지급하는 것에 대한 국가와 기업의 거북함을 반영하는 구체적 사례도 <자본론>에 소개돼 있다.


"엘리자베스의 도제법 제18조와 제19조에는 법률로 정한 것 이상의 임금을 지불하는 사람은 10일간의 금고에 처하게 되어 있는데, 그것을 받는 사람은 21일간의 금고에 처하게 되어 있다."

최저임금법이 제정된 1986년 12월 31일 이전의 한국에서는 "최저임금을 정할 수 있다"(근로기준법 제34조 제1항)라는 법조문은 있어도, 제도가 제대로 시행되지는 않았다. 정부가 '저임금' 혹은 최저임금을 정해놓고, 강제성 약한 행정지도를 벌이는 수준이었다. 1978년 1월 30일 자 <동아일보> 톱기사는 박정희 대통령이 최저임금을 3만 원으로 인상하는 문제를 가급적 빨리 해결할 것을 지시했다고 알려준다.

유시민의 <나의 한국 현대사>는 서울대에 입학한 1978년 당시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보증금 10만 원에 월세 2만 원짜리 봉천동 달동네 자취방은 블록벽돌로 지은 집"이었다며 "대한민국 국민의 평균적인 경제생활"을 그곳에서 지켜봤다고 회고한다.

1979년 제헌절의 <동아일보> 7면에는 충남 홍성에서 상경해 구로공단에 취직한 23세 여성이 구로동에서 보증금 10만 원에 월세 3만 원짜리 셋방에 살아왔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의 월급은 4만 원이었다.

위와 같은 터무니없는 최저임금 실태에 맞서 '최저임금 산정을 똑바로 하라'고 촉구한 그룹이 이옥순이 이끄는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같은 1980년대 중반의 노동운동단체들이다. 서노련은 최저임금의 패러다임을 바꾸라는 목소리를 내는 데 앞장섰다.

노동운동가 이옥순의 투쟁

이옥순
▲이옥순민주노총

서노련과 이옥순은 노동자의 생존을 가능케 하는 생활임금을 최저임금의 기준으로 삼을 것을 요구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에 게시된 1986년 당시의 '8시간 노동으로 6천 5백원 확보하자!'라는 서노련 생활임금쟁취위원회 문건은 노동자가 보리밥이나 콩밥과 함께 반찬 네 가지를 매일 먹으려면 27만 6516원의 생활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서노련이 제시한 반찬 네 가지는 비교적 소박했다. 쇠고깃국·북어계란국·갈치튀김이 매주 각각 1번 있을 뿐이다. 나머지는 김치·깍두기·시금치 무침·김구이 등이다. 이 정도로 먹고살면서 연료비·교통비·목욕비·의료비·술값·담뱃값 등을 감당하려면 27만 원 이상이 들므로, 6500원 임금(일당)부터 관철시키자는 것이 서노련의 주장이었다.

1985년 3월 9일 자 <조선일보> 11면은 노동부 조사결과를 토대로 "제조업 근로자의 13.5%인 30만 1천 1백 65명이 월 10만도 받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이런 상황에서 서노련과 이옥순이 생활비 27만 원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것이다.

1979년 4월 10일 자 <매일경제> 7면에 등장한 노동청 관계자는 "저임금 수준은 지역별 동종업종과 개별기업의 지급 능력을 고려(해서 결정)"한다고 밝혔다. 이 돈으로 노동자가 살 수 있나 없나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지 않고, 이 월급을 주고도 기업들이 재정적 여력을 가질 수 있나 없나를 일차적으로 고려하던 시절을 반영하는 발언이다. 그처럼 기업의 입장에서 최저임금이 결정되던 시절에 서노련이 노동자의 입장에서 생활임금이라는 개념을 확산시켰던 것이다.

1980년대 중반의 노동운동이 그처럼 당당해지도록 만드는 데 기여한 이옥순은 1982년 원풍모방 9·27 사건 당시의 원풍모방노조 총무부장이다. 1954년 10월 3일 전북 정읍에서 출생하고 고등학교를 중퇴한 뒤 서울 청계천 봉제공장에서 하루 12시간 중노동을 견딘 그는 열아홉 살 때인 1973년에 방직회사인 한국모방에 입사해 노동운동가로 성장했다.

1975년부터 원풍모방이 된 이 회사의 노조는 강력한 노동운동으로 인해 회사뿐 아니라 국가권력에도 찍혔다. 이 노조는 국가권력이 노동조합과 사회단체(이른바 제3자)의 결합을 특히 경계하는데도, 도시산업선교회·가톨릭노동청년회·크리스찬아카데미와 연대했다. 거기다가 광주 학살 뒤에는 5·18 피해자들에 대한 성금도 전달했다. 전두환 정권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던 것이다.

이런 일들과 더불어 사용자의 노조 탄압이 가중되던 끝에 터진 것이 1982년의 9·27 사건이다. 사건의 발단은 전날 상황이다. 그달 30일 자 <조선일보> 11면은 "회사 측은 다시 이 태업을 주동한 책임을 물어 일요일인 26일 박순애 양과 이옥순 양 등 노조원 4명을 추가로 해고했다"고 보도했다.

27일에는 남자 관리직 직원들이 주축인 40여 명이 노조원들을 무차별 폭행했고, 회사는 조합원 650여 명을 겨냥해 식당을 봉쇄하고 수돗물을 끊었다. 추석 전날인 30일에는 경찰과 회사가 고용한 폭력배들이 농성장을 기습한 뒤 전경 150여 명이 조합원들을 폭행했다. 추석날 새벽 4시에는 전경들이 노조원 50여 명을 강제 해산시켰다. 도시산업선교회 등의 노조 지원은 제3자 불법개입으로 규정되고 국가의 사용자 지원은 정당한 공권력 행사로 인정되던 시절의 풍경이다.

이옥순은 해고 뒤에도 노조를 도왔다. 이 때문에 그는 노동자가 아닌데도 노사분규에 개입했다는 이유로 제3자 개입금지의 올무에 걸려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듬해 광복절 특사로 석방된 뒤에 인쇄공장에 취업했지만 공안당국의 압력으로 오래 버티지 못했다.

그런데 이옥순을 비롯한 당시의 노동운동가들에게 가해진 그 같은 압력은 한국 노동운동을 새로운 경지로 업그레이드시키는 데 기여했다. 공권력의 훼방으로 노동 현장에 대한 재진입이 어려워진 이옥순은 개별 사업장을 넘어 지역 노동운동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옥순뿐 아니라 많은 운동가들의 시선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이원보 전 전태일재단 이사의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에 이런 대목이 있다.

"1984년 하반기 이후 운동성이 선명한 노동조합들이 공단 지역에서 급속히 확산되면서 정권은 다시 탄압을 가중시켰습니다. 노조 결성이 봉쇄됐고 기존 노조들도 파괴됐으며 해고자가 속출했죠. 이에 따라 노동운동 내부에서 노동조합과는 다른 대중운동 틀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타났고, 또 다른 한편으로 지역 노동운동의 틀이 모색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변화의 결과 중 하나가 1985년 8월 25일의 서노련 출범이다. 위 책은 서노련이 당시 노동운동의 주도적 위치에 있었다고 평한다. 31세 나이로 부의장이 된 이옥순은 민종덕 의장 구속(9.15) 이후로 직무대행이 되어 조직을 이끌었다. 이 시기부터 그는 3년 이상을 수배자로 보냈다.

통일운동까지 참여... 탄압에 맞선 삶

1991년 3월 2일 자 <한겨레> 14면에 보도된 이옥순의 결혼 소식
▲1991년 3월 2일 자 <한겨레> 14면에 보도된 이옥순의 결혼 소식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서노련과 이옥순의 임금투쟁은 최저임금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운동이었다. 사용자가 지불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라 노동자가 살기 위해 받아야 하는 금액이 최저임금이라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 운동은 당시에는 결실을 맺지 못했지만, 당대의 강력한 운동단체가 주도했다는 점 때문에 노동자들이 새로운 인식을 갖도록 하는 데 이바지했다.

최저임금의 패러다임 변화와 지역 노동운동 활성화에 공헌한 이옥순은 나중에는 통일운동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장기수 출신 통일운동가인 권낙기와의 결혼이 그의 운동영역 확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1991년 3월 2일자 <한겨레> 14면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18년 동안 복역한 장기수 출신의 노총각과 70년대부터 노동운동을 해온 노처녀가 백년가약을 맺었다"라며 37세의 이옥순과 44세의 권낙기가 대형 걸개그림을 배경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을 보도했다.

결혼을 계기로 노동운동과 통일운동의 연계에도 관심을 기울인 이옥순은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대외협력위원장직을 수행했고, 방북대표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부당한 노동 탄압에 맞섰던 그는 이 시기에는 국가보안법 철폐운동에도 나섰다. 2001년 2월 23일, 폐암 투병 끝에 향년 47세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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