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8.21 14:15ㅣ최종 업데이트 26.08.21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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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10월 3일 서울 동대문구장에서 열린 3군사관학교 체육대회에 참석한 대통령 전두환씨와 이순자씨.
▲1985년 10월 3일 서울 동대문구장에서 열린 3군사관학교 체육대회에 참석한 대통령 전두환씨와 이순자씨.연합뉴스

'이순자 지키기'는 1979년 12·12 쿠데타 이후부터 시작됐다. 이순자의 존재가 국내외적으로 부각된 것은 전두환이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상임위원장 자격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한 1980년 중반이다. 그 이전부터 신군부는 이순자 지키기에 신경을 썼다.

쿠데타 나흘 뒤인 1979년 12월 16일, 서울극장에서 <순자야 문 열어라>가 개봉됐다. 배우 이영옥·신성일과 진봉진·도금봉·이치우 등이 이 작품에 출연했다. 예전에는 식모로 많이 불리다가 이 무렵에는 가정부로 지칭된 직업이 주인공 순자의 생계 수단이다. 영화 속의 순자는 여러 직업을 거친다. 유곽으로도 흘러들고 유흥업소로도 흘러드는 순자의 인생 역정이 영화에서 묘사된다.


영화 주제곡을 부른 가수는 21세 신예인 김철이다. 훗날 김현준으로 개명할 김철에게는 '순자야 문 열어라'가 데뷔곡이었다. 밝고 경쾌한 음악에 시원스런 남자 목소리가 흡인력을 발휘한다는 느낌을 주는 이 노래에는 순자라는 이름이 많이 등장한다. "순자야 문 열어라 활짝 웃는 얼굴로"로 시작해 "순자야 문 열어라"를 거듭거듭 되풀이한다.

김철은 이 노래를 오래 부르지 못했다. 공개 방송에서는 그랬다. 2006년 3월 21일 자 <조선일보> '김현준, 24년 만에 마이 라이프 발표'는 그의 데뷔곡이 "이순자 씨와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다"라며 "방송 출연은 단 한 차례밖에 하지 못했다"고 전한다. 김철이 데뷔곡을 갖고 대중에게 모습을 나타낸 뒤 그의 노래가 방송 금지곡이 됐다.

전두환은 12·12 쿠데타로 군부는 금방 장악했지만, 여타 분야는 그러지 못했다. 박정희는 쿠데타 당일에 군사혁명위원회(이틀 뒤부터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설치해 군부에 이어 행정부까지 장악했다. 그날 오후 8시에는 참의원과 민의원으로 구성된 국회도 해산시켰다. 반면, 전두환은 광주 학살이 끝난 직후인 1980년 5월 31일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되어 행정권을 차지했다. 박정희가 쿠데타 당일에 한 일을 전두환은 6개월 뒤에 실현한 셈이다.

사정이 그랬기 때문에 1979년 12월 12일 이후와 1980년 상반기의 전두환은 불안정한 가운데서 긴박한 일정들을 소화했다. 그런 시기에 '두환아 문 열어라'도 아니고 '순자야 문 열어라'가 탄압받았다. 신군부가 정신없는 와중에도 '이순자 지키기'에 신경을 썼던 것이다.

이순자의 이미지 지키기 위한 가수 탄압

1979년 당시의 성인 여성 중에는 1920년대~1950년대 출생자가 많았다. 2016년 5월 9일 자 언론들에 보도된 대법원 통계에 따르면, 1940년대 여성 출생자 중에는 영자·정자·순자가 가장 많았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영숙·순자·미숙·미경이 가장 많았다. 이 통계에 따르면, 순자는 1940년대 이후에 4번째로 많이 사용된 이름이다.

그 정도로 순자라는 인명이 흔했기 때문에, '순자야 문 열어라'라는 노래를 들은 당시 사람들이 '순자가 누구야?'라는 궁금증을 가질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 이름은 당대의 가장 대표적인 여성 이름 중 하나로 받아들여질 뿐이었다.

더군다나 1980년 여름이 되기 전까지는 이순자의 존재가 부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 대중이 그 노래를 듣고 전두환 부인을 떠올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이순자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한 가수 탄압이 12·12 이후에 일찌감치 시작됐다.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조금만 더 일찍 발달했다면, 남편이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리스크를 일으킨 김건희처럼 이순자 역시 꽤 일찍부터 구설에 올랐을 가능성이 있다. 영부인이 되기 전의 이순자 역시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큰 인물이었다.

1998년 4월 27일 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노태우 정권의 수석비서관을 지낸 인물은 이순자의 부동산 투기에 관한 제보들이 노태우 정부 때 많이 들어왔다면서 "빨간 바지로 불리기도 했잖아요"라고 말했다. 이순자는 1970년대에 서울 강남의 투기 현장을 빨간 바지를 입고 누볐다고 해서 '연희동 빨간 바지'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런 이순자의 이미지를 관리하는 일이 12·12 쿠데타 이후부터 있었다는 점이 가수 김철의 사례에서 확인된다.

김철은 의지력이 강한 예술가였다. 데뷔하자마자 철퇴를 맞은 그는 얼마 안 있어 정신을 추스르고 재기전에 나섰다. 그 성과물이 1982년 도쿄 FM가요제에서 '캠퍼스의 연인'을 불러 금상을 수상한 일이다. 뒤이어 그는 세 살 적은 민해경과 함께 1983년에 '내 인생은 나의 것'을 불러 히트곡으로 만들었다. 이 노래는 KBS 가요톱10에서 4주 연속 1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김철은 다시 주저앉았다. 이번에도 방송 금지를 당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 교육상 좋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노래에는 "부모님은 나에게 너무도 많은 것을 원하셨어요", "화초처럼 기르시면서 부모님의 뜻대로 된다고 생각하셨나요", "그냥 나에게 맡겨주세요 내 인생은 나의 것" 등의 가사가 수록돼 있다.

방미가 부른 '올 가을엔 사랑할꺼야'도 이순자와 관련이 있다. "묻지 말아요 내 나이는 묻지 말아요/ 올가을엔 사랑할 거야"라는 가사가 있는 이 노래의 원제목은 심수봉이 1979년에 부른 드라마 주제곡 '순자의 가을'이다. 이 노래는 1980년에 금지됐다. 그랬다가 방미가 1983년에 '올 가을엔 사랑할꺼야'로 제목을 바꿔 부른 뒤에 대히트를 쳤다.

일반 대중 사이에 신속히 확산한 이순자 리스크

1986년 3월 27일 대통령 전두환씨와 부인 이순자씨가 제42기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해 임관한 졸업생과 악수하며 격려하고 있다.
▲1986년 3월 27일 대통령 전두환씨와 부인 이순자씨가 제42기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해 임관한 졸업생과 악수하며 격려하고 있다.연합뉴스

'연희동 빨간 바지'로 인한 리스크 발생에 대비하는 정권 차원의 작업은 대중가요뿐 아니라 드라마 분야에서도 나타났다. 이는 매우 과도한 양상으로 전개됐다. 배우 김명덕의 피해 사례가 대표적이다.

1960년에 태어나 1981년에 데뷔한 희극배우 김명덕은 원숭이 흉내와 주걱턱으로 폭발적 인기를 끌다가 1983년 8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방영된 MBC 드라마 <간난이>의 성인 영구 역을 맡았다. 아역배우 김수양이 간난이 역을 맡고 김수용이 영구 역을 맡은 것을 뒤이어, 원미경과 김명덕이 성인 역을 연기해 드라마의 인기를 이어 나갔다.

이 드라마를 통해 절정의 인기를 얻은 김명덕은 얼마 안 가 방송에서 퇴출됐다. 턱이 영부인을 닮았다는 이유였다. 2019년 12월 2일 KBS <아침마당>에 출연한 그는 "내 주걱턱이 그분과 닮아 한동안 방송 일을 하지 못했다"고 과거 방송에서 말한 적이 있다면서, 출연 정지로 인해 생활고를 겪었다고 털어놨다.

프란체스카 도너와 육영수의 영부인 리스크는 알게 모르게 부정적 영향을 낳은 반면, 이순자의 경우에는 그 영향이 매우 요란하게 나타났다. 이순자 측이 연예인들까지 탄압했기 때문에 이순자 리스크는 정치에 관심이 없는 일반 대중 사이에서도 신속히 확산했다.

당사자들의 적극적 부인으로 인해 사건의 실체가 규명되지는 않았지만, 이순자를 둘러싼 'X양 사건'도 1980년대에 널리 회자됐다. 전두환이 유명 영화배우를 좋아하자 이순자가 그 배우를 납치했고 이순자가 그 배우의 몸에 강제 수술을 했으며 그 뒤 그 배우가 미국으로 떠났다는 이야기가 그 시절에 유행했다.

이 의혹은 전두환이 퇴임한 뒤에 발행된 1989년 7월 27일 자 일본 <주간문춘>에도 실렸다. 유명한 시사주간지인 이 출판물은 그해 3월에 개봉된 김호선 감독의 <서울무지개>가 전두환과 X양의 관계를 다룬 실화라고 보도했다. <주간문춘>은 김호선 감독의 발언을 근거로 보도한다고 밝혔지만, 김호선 감독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적극 부인했다.

당시의 국내 언론에 인용된 <주간문춘> 기사에는 "박·전 두 대통령 시대에는 권력자가 강력한 권력을 통해 여배우나 가수를 성적 노리개로 삼는 일이 종종 있었다", "(X양이) 질투심에 사로잡힌 영부인의 명령으로 국군보안사 사람들에 의해 성폭행을 당하고 국외로 추방"됐다는 등등의 풍문이 소개됐다.

배우 본인이 적극 부인했기 때문에 X양 사건의 실체는 확인할 수 없지만, 전두환 집권기에 이 의혹이 널리 퍼진 것은 이순자 측이 정권 출범 이전부터 연예인을 탄압한 것과도 무관치 않다. 이순자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12·12 이후부터 연예계를 억누른 것이 이순자 부부와 연예계의 관계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일으키는 배경이 됐다고 볼 수 있다.

연예계 탄압은 안 그래도 정통성이 취약한 전두환 정권에 대한 세상의 시선을 더욱 싸늘하게 만드는 요인이 됐다. 이는 이순자 부부를 가십거리로 만들고 정권의 권위를 더욱더 떨어트리는 데도 기여했다.



제도 밖의 권력, 영부인 리스크 - 실세 영부인, 인성인가 시스템인가

김종성 (지은이), 내일을여는책(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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