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운드 중간 쉬는 동안 수분을 공급하고 마우스피스를 세척하는 세컨.
이현우
아마추어 선수로 활동하지만 취미로서 프로복싱 직관을 가기도 한다. 다양한 스타일의 선수를 보는 재미도 있지만, 다양한 스타일의 세컨을 보는 묘미도 있다. 열번 가까이 직관하며 세컨의 유형을 몇 가지로 구분해 봤다. 재미로 읽어주길 바란다.
첫째, '두려워 말고 전진형'이다. 링 위에서 지면 더 무서운 호랑이가 기다리고 있다고 알려주는 지도자다. 호랑이 지도자라고 무조건 나쁜 건 아니지만, 별다른 전략은 없이 "두려워하지 말고 전진하라"는 호통만 친다.
선수 보호는 남 일이다. 이런 유형은 소속 선수가 전의를 상실한 채 맞기만 할 때도 윽박만 지른다. 선수를 가장 보호해야 할 세컨이 선수를 가장 위험에 빠뜨리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강한 체력과 맷집을 기반으로 한 전진 전략이 먹힐 때도 있지만, 글쎄다.
시대에 맞지 않는 지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다행히 최근에는 '두려워말고 전진형' 지도자는 사라져 가고 있다. 선수가 없으면 세컨도 없기 때문이다.
둘째, '아바타 조종사형'이 있다. 이들은 자신이 승리한 경험과 방법이 전부다. 선수의 상태와 움직임은 중요치 않고 자신이 승리한 방법만 강요한다.
복싱은 상대성이 강한 스포츠다. 동일한 선수라도 상대하는 선수에 따라 전략이 달라져야 하고, 초반 라운드와 후반 라운드의 전략은 달라질 수 있다.
미리 준비한 전략이 있을지라도 그날의 경기 흐름에 따라 전략은 달라질 수 있다. 세컨은 상대 선수와 상황에 맞게 전략을 준비하고 지시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카멜레온형'이다. 가장 이상적인 세컨 유형이라고 생각한다. 훌륭한 세컨은 카멜레온이 되어야 한다. 때로는 선수와 일심동체 되어 선수 몸 상태를 파악하고, 지금 당장 수행할 수 있는 지시를 내려야 한다. 때로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냉철하게 이길 수 있는 전략을 지시해야 한다.
격한 종목 특성상 소리를 지르거나 흥분해야 할 때도 필요하다. 호통치는 세컨이 워낙 많다 보니, 조곤조곤 말하면서도 명확하게 전략을 지시하는 세컨이 눈에 띈다. 따끔하게 호통도 치지만, 선수가 잘한 부분을 발견하고 칭찬해 주면서 사기를 북돋아 주는 것도 세컨의 역할이다.
쉽지 않은 역할
처음 헤드기어를 벗고 아마추어 시합을 출전했을 때 사기가 북돋아진 적이 있다. 라운드 사이 쉬는 시간이었는데 세컨으로 함께 했던 관장님과 친구가 잘하고 있다는 칭찬을 해주기도 했고, 체육관 동료가 바디 공격이 잘 적중 되고 있다고 말해준 적이 있다. 사기가 올라가서 없던 체력도 충전되는 느낌을 받았다.
체육관에 프로 선수와 함께 훈련하고 친밀해진 덕분에 세컨으로 참여해 본 적도 있다. 그때 정말 세컨이 어렵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한 발 더 움직이는 체력이 필요할 때도 있고 적재적소 기술이 떠오르는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평소 선수의 스타일과 맞지 않아 조언하지 않고 선수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그런데 시합 마치고 선수와 얘기를 나누다 보니 의외의 사실을 들을 수 있었다. 선수에게 필요했던 건 사기였다고 말해줬다. 그럴 때 더욱 힘이 난다고 말이다. 선수로서 사기가 올라갔던 경험이 있었음에도 왜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을까.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더니. 어쩌면 상황에 맞는 정확한 전략이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럴지라도 선수의 사기를 올리지 못했으니 전략은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것 아닐까.
좋은 세컨은 내 선수만 챙기지 않는다. 며칠 전 프로복싱을 직관하고 왔다. 한 선수가 카운터 훅을 적중 시키면서 상대 선수는 그대로 실신하며 링 위에 쓰러졌다. 실신 KO였다. 몸의 전원이 그대로 꺼지면서 다리가 풀린 것이다.
▲시합 직후 세컨이 패배한 상대 선수를 안아주고 있다.
이현우
쓰러진 선수 쪽 세컨도 달려 나왔지만 카운터 훅을 적중시킨 선수 쪽 세컨도 달려 나왔다. 수원태풍체육관을 이끌고 있는 최락환 관장님과 복싱계 스타 슈퍼미들급 윤덕노 선수였다. 글러브와 신발을 벗기고 발 마사지를 하면서 상대가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왔다. 열광하던 장내도 쓰러진 선수가 일어날 때까지 고요하다가 선수가 일어서면 박수로 격려했다. 복싱 직관에서만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순간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세컨끼리 오묘한 신경전을 펼치기도 하지만 시합이 끝나면 상대 선수를 안아주고 패배한 선수에게는 고생했다면 격려해 주기도 한다. 필자도 아마추어 시합을 마치고 상대 코너에서 물을 얻어먹은 적이 있다.
링이라는 그림자에 가려져 주목받는 위치는 아니지만, 선수를 위해 희생하는 지도자가 정말 많다. 복싱을 좋아하는 것을 넘어 사랑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 아닐까. 무언가를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복싱을 할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다.
"이 상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함께 고생해 주신 스태프분들께 바칩니다."
영화나 드라마 시상식에서 배우나 감독의 수상 소감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멘트다. 복싱선수가 승리한 후 세컨에게 달려가는 장면을 자주 봤다. 방전된 체력 상태임에도 세컨을 얼싸안고 승리의 영예를 돌리는 선수도 있다. 가족이나 애인이 응원을 왔음에도 말이다. 자신만큼 땀 흘리고 때론 자신보다 더 마음고생한 세컨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적어도 복싱 선수에게 세컨은 '첫 번째 사람'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