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8.20 10:05ㅣ최종 업데이트 26.08.2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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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싱 링은 정사각형이고 네 개의 기둥이 있다. 홍 코너와 청 코너가 있고 중립 코너(경기 도중 다운시킨 선수를 대기 시키거나 상처 입은 선수의 부상 여부를 확인하는 영역)인 두 개의 흰색 코너가 있다.

치열한 싸움은 링 위에 오른 선수들만 하는 게 아니다. 홍 코너와 청 코너 아래에는 세컨드(아래 세컨)가 있다. 세컨의 전략 싸움과 기싸움도 치열하다. 중계 화면이나 녹화 영상에서는 잘 잡히지 않지만, 직관(직접 관람)을 가게 되면 세컨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세컨 싸움을 지켜보는 것도 직관의 묘미다.


세컨은 코너에서 선수를 돕는 코치와 보조 인력을 말한다. 주로 지도자와 훈련 동료가 세컨을 본다. 프로 복싱에서는 전문 컷맨이 동행하기도 한다. 보통 두 명이 세컨을 보고 일부 프로 시합에서는 그 이상이 세컨을 보기도 한다.

세컨은 일반적인 스포츠에서 코치의 역할처럼 경기 중에는 전략을 지시한다. 다른 종목과 차이가 있다면 세컨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선수를 보호하는 것이다. 선수가 위험 상황 등 경기를 지속할 수 없는 상황에서 수건을 던져 경기 포기 의사를 밝히는 역할을 수행한다. 컷맨은 라운드 사이에 외상을 확인하고 응급 대처를 하기도 하며 아이싱을 통해 부상을 방지한다.

복싱은 혼자서 싸우는 종목이 아니다

복싱 시합 중 세컨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
▲복싱 시합 중 세컨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enginakyurt on Unsplash

여러 차례 생활체육대회와 아마추어대회에 참가했다. 그때마다 운동하는 복싱장 관장님께서 매번 동행해 주셨다.

세컨은 시합 시간에만 함께하는 게 아니다. 생활체육과 아마추어 시합은 계체량이 오전 7시에 시작되기 때문에 일출 무렵인 새벽 시간부터 동행한다. 시합은 보통 주말에 펼쳐지기 때문에 주말을 고스란히 반납하는 것이다.

계체량과 검진이 끝나면 시합 전에 선수가 몸을 풀도록 코치로서 보조한다. 미트 훈련을 통해 가볍게 땀을 내게 한다. 이때 선수의 몸 상태를 민감하게 확인하기도 한다. 관장님은 종종 몸이 덜 풀렸다고 힘을 빼야 한다고 조언해 주셨다.

긴장한 탓이었을까. 몇 차례 시합에 나갈 때마다 몸이 뻣뻣해지는 현상을 경험하면서 이제는 미트를 치기 전에 달리기를 통해 몸을 이완시키고 있다. 때로는 선수보다 지도자가 선수 몸 상태를 잘 파악하기도 한다. 3년 반 동안 함께 훈련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경기 시작 직전이 되면 장비를 착용하고 대기한다. 생활복싱대회는 헤드기어를 착용하지만, 성인부 아마추어나 프로 경기는 헤드기어를 착용하지 않는다. 대기하는 동안 세컨은 부상 방지를 위해 얼굴에 바셀린을 바른다. 피부가 긁히는 찰과상은 흔하며, 더러 타격으로 피부가 찢어지는 부상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드디어 두 선수가 링에 올라 맞붙는다. 선수 뿐만 아니라 세컨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비록 몸은 링 아래에 있지만 소속 선수를 유심히 관찰하며 지시를 내린다.

3년 6개월 동안 복싱을 수련하면서 생활복싱대회와 아마추어복싱대회를 열 번 가까이 치렀지만, 여전히 기본기가 잘 지켜지지 않는다. 긴장한 탓인지 매번 치명적인 실수를 하곤 하는데 이때마다 세컨의 목소리는 어김없이 등장한다.

"가드 올려!"
"턱 당겨(숙여)!"

생각보다 많은 선수가 경기에 몰입하여 세컨의 말을 듣지 못할 때가 많다. 다행히 필자는 치명적인 실수는 매번 하지만 세컨 말은 잘 기울이고 바로 이행하려고 노력한다.

세컨은 상대 선수도 유심히 관찰해야 한다. 상대의 빈틈을 찾아내고 공격을 성공시키기 위함이다. 단순히 생각하면 선수가 상대 약점을 가장 잘 파악할 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약점은 링 밖에 있는 제삼자가 잘 포착한다. 결코 복싱은 혼자서 싸우는 종목이 아니다.

생활복싱 우승 당시에 습관적으로 잽을 내는 상대가 있었다. 관장님은 "투(오른손)로 받아쳐"라고 외쳤고, 받아친 결과 상대의 중심이 흔들리면서 연타로 다운을 빼앗은 적이 있다. 훌륭한 세컨의 능력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가장 이상적인 '세컨'은

라운드 중간 쉬는 동안 수분을 공급하고 마우스피스를 세척하는 세컨.
▲라운드 중간 쉬는 동안 수분을 공급하고 마우스피스를 세척하는 세컨.이현우

아마추어 선수로 활동하지만 취미로서 프로복싱 직관을 가기도 한다. 다양한 스타일의 선수를 보는 재미도 있지만, 다양한 스타일의 세컨을 보는 묘미도 있다. 열번 가까이 직관하며 세컨의 유형을 몇 가지로 구분해 봤다. 재미로 읽어주길 바란다.

첫째, '두려워 말고 전진형'이다. 링 위에서 지면 더 무서운 호랑이가 기다리고 있다고 알려주는 지도자다. 호랑이 지도자라고 무조건 나쁜 건 아니지만, 별다른 전략은 없이 "두려워하지 말고 전진하라"는 호통만 친다.

선수 보호는 남 일이다. 이런 유형은 소속 선수가 전의를 상실한 채 맞기만 할 때도 윽박만 지른다. 선수를 가장 보호해야 할 세컨이 선수를 가장 위험에 빠뜨리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강한 체력과 맷집을 기반으로 한 전진 전략이 먹힐 때도 있지만, 글쎄다.

시대에 맞지 않는 지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다행히 최근에는 '두려워말고 전진형' 지도자는 사라져 가고 있다. 선수가 없으면 세컨도 없기 때문이다.

둘째, '아바타 조종사형'이 있다. 이들은 자신이 승리한 경험과 방법이 전부다. 선수의 상태와 움직임은 중요치 않고 자신이 승리한 방법만 강요한다.

복싱은 상대성이 강한 스포츠다. 동일한 선수라도 상대하는 선수에 따라 전략이 달라져야 하고, 초반 라운드와 후반 라운드의 전략은 달라질 수 있다.

미리 준비한 전략이 있을지라도 그날의 경기 흐름에 따라 전략은 달라질 수 있다. 세컨은 상대 선수와 상황에 맞게 전략을 준비하고 지시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카멜레온형'이다. 가장 이상적인 세컨 유형이라고 생각한다. 훌륭한 세컨은 카멜레온이 되어야 한다. 때로는 선수와 일심동체 되어 선수 몸 상태를 파악하고, 지금 당장 수행할 수 있는 지시를 내려야 한다. 때로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냉철하게 이길 수 있는 전략을 지시해야 한다.

격한 종목 특성상 소리를 지르거나 흥분해야 할 때도 필요하다. 호통치는 세컨이 워낙 많다 보니, 조곤조곤 말하면서도 명확하게 전략을 지시하는 세컨이 눈에 띈다. 따끔하게 호통도 치지만, 선수가 잘한 부분을 발견하고 칭찬해 주면서 사기를 북돋아 주는 것도 세컨의 역할이다.

쉽지 않은 역할

처음 헤드기어를 벗고 아마추어 시합을 출전했을 때 사기가 북돋아진 적이 있다. 라운드 사이 쉬는 시간이었는데 세컨으로 함께 했던 관장님과 친구가 잘하고 있다는 칭찬을 해주기도 했고, 체육관 동료가 바디 공격이 잘 적중 되고 있다고 말해준 적이 있다. 사기가 올라가서 없던 체력도 충전되는 느낌을 받았다.

체육관에 프로 선수와 함께 훈련하고 친밀해진 덕분에 세컨으로 참여해 본 적도 있다. 그때 정말 세컨이 어렵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한 발 더 움직이는 체력이 필요할 때도 있고 적재적소 기술이 떠오르는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평소 선수의 스타일과 맞지 않아 조언하지 않고 선수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그런데 시합 마치고 선수와 얘기를 나누다 보니 의외의 사실을 들을 수 있었다. 선수에게 필요했던 건 사기였다고 말해줬다. 그럴 때 더욱 힘이 난다고 말이다. 선수로서 사기가 올라갔던 경험이 있었음에도 왜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을까.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더니. 어쩌면 상황에 맞는 정확한 전략이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럴지라도 선수의 사기를 올리지 못했으니 전략은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것 아닐까.

좋은 세컨은 내 선수만 챙기지 않는다. 며칠 전 프로복싱을 직관하고 왔다. 한 선수가 카운터 훅을 적중 시키면서 상대 선수는 그대로 실신하며 링 위에 쓰러졌다. 실신 KO였다. 몸의 전원이 그대로 꺼지면서 다리가 풀린 것이다.

시합 직후 세컨이 패배한 상대 선수를 안아주고 있다.
▲시합 직후 세컨이 패배한 상대 선수를 안아주고 있다.이현우

쓰러진 선수 쪽 세컨도 달려 나왔지만 카운터 훅을 적중시킨 선수 쪽 세컨도 달려 나왔다. 수원태풍체육관을 이끌고 있는 최락환 관장님과 복싱계 스타 슈퍼미들급 윤덕노 선수였다. 글러브와 신발을 벗기고 발 마사지를 하면서 상대가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왔다. 열광하던 장내도 쓰러진 선수가 일어날 때까지 고요하다가 선수가 일어서면 박수로 격려했다. 복싱 직관에서만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순간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세컨끼리 오묘한 신경전을 펼치기도 하지만 시합이 끝나면 상대 선수를 안아주고 패배한 선수에게는 고생했다면 격려해 주기도 한다. 필자도 아마추어 시합을 마치고 상대 코너에서 물을 얻어먹은 적이 있다.

링이라는 그림자에 가려져 주목받는 위치는 아니지만, 선수를 위해 희생하는 지도자가 정말 많다. 복싱을 좋아하는 것을 넘어 사랑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 아닐까. 무언가를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복싱을 할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다.

"이 상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함께 고생해 주신 스태프분들께 바칩니다."

영화나 드라마 시상식에서 배우나 감독의 수상 소감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멘트다. 복싱선수가 승리한 후 세컨에게 달려가는 장면을 자주 봤다. 방전된 체력 상태임에도 세컨을 얼싸안고 승리의 영예를 돌리는 선수도 있다. 가족이나 애인이 응원을 왔음에도 말이다. 자신만큼 땀 흘리고 때론 자신보다 더 마음고생한 세컨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적어도 복싱 선수에게 세컨은 '첫 번째 사람'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브런치 계정(@rulerstic)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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