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8.19 18:02최종 업데이트 26.08.19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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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내의 한 대학병원에서 의료진이 이동하고 있다. (해당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서울시내의 한 대학병원에서 의료진이 이동하고 있다. (해당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연합뉴스

2007년 방영된 드라마 <하얀거탑>은 천재 외과 의사 장준혁이 대학병원 외과 과장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벌이는 사투를 그린다. 스승을 밀어내고 동료를 포섭하며, 과장 자리 하나를 두고 병원 전체가 전쟁터로 변모한다. 20년 가까이 흐른 현재, 이 드라마를 젊은 의사들에게 보여준다면 그들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워할 대목은 의국 내부의 암투나 스승에 대한 배신이 아닐 것 같다. 대신 '대학병원 과장이라는 직위와 교수 자리가 과연 목숨을 걸 만큼 가치 있는 것인가'라고 되물을 것이다.

최근 경향신문은 전북대병원 신생아 중환자실을 홀로 지키던 교수의 사직 소식을 계기로,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4명의 인터뷰를 보도했다. 2024년 상반기 소아청소년과 레지던트 충원율은 20.6%(34명)에 불과하며, 비수도권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의 60% 이상이 50대 이상이었다. 인터뷰에 응한 전공의들은 교수가 된 선배들의 삶을 목도하며 '나는 저렇게는 못 살겠다'라고 단언했다.


이러한 보도는 대개 '필수의료의 위기'를 환기하려는 목적으로 생산된다. 하지만 이 현상은 단순한 위기가 아니라, '하얀거탑'으로 표상되던 전통적 의료계 질서가 붕괴했음을 알리는 부고(訃告)에 가깝다.

착취를 정당화하던 세대 간 협약은 끝났다

드라마의 제목이기도 한 하얀 '거탑'은 대학병원으로 대표되는 견고한 위계질서를 상징한다. 이 질서를 지탱하는 핵심 기제는 의사 선후배 간의 암묵적 협약이었다. 전공의는 주 80시간을 상회하는 고강도 노동과 수직적 위계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선지불했다. 그들은 병원 내의 착취를 견디는 대가로 전문의 자격, 대학병원 교수 임용 혹은 성공적인 개원, 그리고 평생 보장되는 안정적인 소득과 사회적 지위를 약속받았다. 즉, 기존의 전문의 양성과 대학병원의 노동은 미래의 보상을 담보로 현재의 헌신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운영됐다.

이러한 위계 구조는 특정한 의사상을 양산해 왔다. 환자에게는 정확한 진단과 치료를 제공하기 위해 밤샘을 마다하지 않는 은인이지만, 간호사나 전공의같이 위계 구조의 하위에 놓인 이들에게는 폭압적으로 군림하는 인물이다. 과거의 탑은 이러한 인물을 처벌하는 대신 가장 높은 곳으로 끌어올렸다. 환자를 향한 헌신과 하급자를 향한 폭력은 모순이 아니라, 탑을 유지하는 일관된 질서였기 때문이다. 명의의 탁월함은 하부 구조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완성되었고, 병원은 위계적 조직에서 성공적으로 착취한 자원을 환자에게 전달하는 시스템으로 기능했다. 이런 시스템이 원활하게 작동할수록 훌륭한 의사와 폭군은 한 개인 안에서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었다. 탑의 붕괴 앞에서 진심으로 애도하는 이가 드문 이유다.

협약이 유지되는 동안 병원과 의사들의 질서는 사회의 필수적인 의료를 떠받치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 의료계 내부에는 늘 두 가지 경제 체제가 공존했다. 탑 내부의 '지위 경제'와 탑 외부 개원가의 '시장 경제'다. 수익성이 낮은 진료과에서도 사람을 구할 수 있었던 이유는, 탑이 부여하는 '지위'라는 화폐가 시장의 '자본' 못지않은 교환 가치를 지녔기 때문이다.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피부과 개원의보다 경제적 수익은 적을지라도 더 명예롭고 높은 자리로 인식되곤 했다. 최상층의 권위가 빛을 발하는 한, 구성원들은 탑을 오르고자 했고 그로 인한 경제적 수익 감소를 특별히 손해라고 여기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개원가 시장이 팽창하고 탑 외부의 경제적 보상이 압도적으로 커지면서, 탑 내부의 지위는 과거의 가치를 상실했다. 교수 자리가 보장하는 명예가 개원가의 막대한 수익과 개인적 자유를 상쇄하지 못하게 되자, 탑 내부에는 정당화할 수 없는 수직적 위계와 고된 노동만이 남게 되었다. 폭군을 견디며 언젠가 자신도 그 자리에 오르겠다는 기대는 무망해졌다. 탑의 약속이 '부도 수표'가 되었음을 인지한 후속 세대는 자발적으로 협약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2024년 전공의 집단 사직 사태는 표면적으로는 정부 정책에 대한 반발이지만, 그 기저에는 이러한 '세대 간 협약의 파기'가 놓여있다. 대학병원은 더 이상 희생을 감수하며 오를 가치가 있는 '탑'이 아니며, 과거의 가치를 전제로 한 논의는 성립하기 어려워졌다.

외부를 향한 책임 전가로는 위기를 풀 수 없다

한국판 <하얀거탑> 포스터
한국판 <하얀거탑> 포스터MBC

기존 질서가 무너졌다면 그 잔해를 수습하고 새로운 체제를 구축해야 마땅하지만, 의료계는 몰락의 원인을 끊임없이 외부로 투사하고 있다. 환자와 보호자, 사법부, 그리고 정부 정책에 책임을 묻는 식이다. 외부 요인에 대한 지적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나, 외부 환경이 개선된다고 해서 '필수의료의 위기'라는 내부의 모순, 특히 의료를 생산하는 노동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지금 의료계가 요구하는 것들은 철저히 외부를 향해 있다. 수가 인상, 의료 소송 부담 완화, 정부 내 전담 부서 신설 등이 그 예다. 이러한 요구에 담긴 절박함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으나, 정작 병원 내부의 낡은 질서와 탑이 남긴 폐해를 어떻게 청산할 것인지에 대한 자성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그 '탑'이 남긴 폐해는 시민의 구체적인 삶과 직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철저히 지역적이며, 한국 사회의 공간적 불평등 구조와 깊게 맞닿아 있다. 최근 비수도권 거점 병원들의 응급실 야간 운영이 축소되고, 산부인과와 소아청소년과 인프라가 연쇄적으로 붕괴하여 지역 주민의 '원정 진료'가 일상이 된 현실이 그 증거다. 자원과 인력이 수도권과 고수익 진료과로 블랙홀처럼 집중되는 동안, 낡은 착취 구조의 가장 취약한 고리였던 지역의료가 가장 먼저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문제는 지역의료의 붕괴라는 직접적인 위기 앞에서도 이러한 '외주화'의 관성이 그대로 반복된다는 점이다. 의사 사회는 '현재의 수가와 제도 하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무력한 비관론만 되풀이하고 있다. 주민들의 절박한 요구 앞에서도, 중앙정부의 재정 투입이나 제도적 구제만을 바라보며 방관자적 태도로 일관하거나, 혹은 이미 지역필수의료는 모두 망했는데 사람들이 무리한 요구를 일삼는다며 개탄하는 것이다.

이토록 의사들이 의료의 조직과 노동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외부 탓만 하는 것은 내부에서 문제를 직시하고 책임질 주체가 없기 때문이다. 2024년 의정 갈등 국면에서 어떤 의사 단체도 전공의들을 실질적으로 설득하고 견인하지 못했다. 협상 테이블에 앉은 대표들은 구성원의 동의를 구하지도, 실질적인 결정을 내리지도 못했다. 상명하복식으로 아래를 대변하던 '탑의 의사결정 방식'이 탑의 붕괴와 함께 기능 정지 상태에 빠진 셈이다.

사회와 맺은 약속을 이행할 권위 있는 대표가 사라진 집단은, 내부 문제를 주체적으로 해결할 역량을 상실하고 그 결과 문제 해결을 외부에 의존하게 된다. 그러나 고장 난 기계에 연료만 쏟아붓는다고 기계가 고쳐지진 않는다. 내부 질서의 혁신 없이 외부 자원만 투입된다면, 그 자원은 여전히 수익성이 높은 곳으로만 편중되어 양극화를 심화시킬 뿐이다. 외부로 향한 책임 전가를 멈추고, 스스로를 규율하던 내부의 합의를 어떻게 새로 쓸지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내부 혁신 없이는 해결도 없다

탑이 남긴 유산은 자산이라기보다는 부채에 가깝다. 그리고 탑의 상속인은 부채를 청산할 책임이 있다. 그렇다면 누가 그 상속인인가? '탑'의 최고 권력인 대학병원 원장 자리에 의사만이 올라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가장 가까운 상속인이 의사라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 부채를 의사 사회가 풀어나가야 하는 이유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의료계가 스스로 풀어야 할 과제이자, 사회가 의료계를 향해 던져야 할 핵심 질문은 다음 세 가지다.

첫째, 노동의 공정한 분배다. 과거의 병원은 직급이 올라갈수록 실무 노동은 줄고 권한만 비대해졌으며, 그 기저에는 전공의의 저임금 노동이 깔려 있었다. 전공의를 착취하지 않고서는 단 하루도 유지되지 않는 병원은 정상적인 수련 기관이 아니다. 낡은 노동 관행 속에서 지역필수의료를 책임질 역량이 길러질 리 만무하다. 신생아 중환자실을 전문의 한 명이 밤새워 지키는 현실은 미담이 아니라 명백한 조직의 실패다. 병원이 개인의 헌신에 기대지 않는 지속 가능한 일터이자 교육 기관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조직 전체를 아우르는 합리적인 노동의 재배분이 필수적이며, 이런 조정을 해낼 책임은 의사와 병원에 있다.

둘째, 엄격한 자율 규제의 확립이다. 전문직에 부여된 자율권은 스스로를 엄격히 통제하여 좋은 의료를 제공할 것이라는 사회적 합의와 기대를 전제로 한다. 과거의 탑은 권력을 쥔 자들에게 무비판적으로 면죄부를 내어주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동료의 비윤리적 행위를 징계하지 못하고, 내부의 잘못된 결정에 침묵하는 것은 자율이 아니라 배타적 특권이며, 망설였다 하더라도 그 관행을 지속하며 조직의 일원으로 지낸다면 그 자체로 적극적 공모다.

셋째, 실질적 대표성의 복원이다. 전공의, 봉직의, 개원의뿐만 아니라 병원 시스템을 함께 지탱하는 간호 인력 등 다양한 주체의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사회적 합의를 책임지고 이행할 수 있는 거버넌스를 재구축해야 한다. 스스로를 규율하고 대표하여 총의(總意)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집단만이 국가 및 사회와 대등하게 마주 앉아 제도를 논의할 자격을 얻을 수 있다.

부고가 전해졌다면 합당한 장례를 치르고 새로운 사회적 계약서를 준비해야 한다. 이 장례의 상주는 의료계지만, 사회 역시 단순한 조문객으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사회가 의료계에 자율성을 위임했다면, 우리 사회 또한 책임을 공유하는 당사자다. 신생아중환자실을 떠맡아 온 소아과 의사처럼 과도한 책임을 맡아온 개인의 희생적 미담을 소비하며 개인의 헌신에 무임승차해 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동시에 내부 혁신에 대한 청사진 없이 끝없이 보상만 요구하는 일방적 청구서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장준혁이 목숨 걸고 오르던 계단도, 그 탑을 경외하며 올려다보던 시선도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남은 과제는 단상에서 내려와 서로를 평등하게 직시하는 것이다. 의사와 의사가, 그리고 의료계와 사회가 동등하게 마주해야 한다. 새롭게 작성될 의료 질서의 첫 문장은 시민과 환자로 시작해야 한다. '하얀거탑'이 붕괴한 이후의 세계가 반드시 비극일 이유는 없다. 비로소 의료계와 사회가 합리적인 질서를 함께 다시 쓸 수 있게 된, 새로운 시작이 되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Health Socialist Club 팀블로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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