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8.17 17:33최종 업데이트 26.08.17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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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이 되면 '한반도'와 '일본'이라는 두 주체를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재일교포들은 한반도·일본에 더해 '재일교포 사회'까지 떠올린다. 식민지배로 인해 한국에서는 더 이상 살기 힘들어 일본으로 이민을 갔거나, 강제징용을 당해 일본에 끌려간 한국인들이 해방 뒤에도 핍박과 구박을 받고 있으니, 친일파 미청산이나 남북분단뿐 아니라 재일교포 문제 역시 광복절과 관련된 주요 현안에 포함된다.

광복절에 재일교포들은 자신들과 고국의 관계, 자신들과 일본의 관계를 생각한다. 2005년 8월 15일 자 재일본대한민국민단 기관지인 <민단신문>에 실린 '광복절 60주년, 슬로건으로 돌아보는 60년'이라는 기사는 그동안의 광복절 슬로건들을 "1. 조국의 평화통일, 2. 재일동포의 권리 획득, 3. 한일관계 개선, 동포사회의 개선, 4. 재일한국인으로서의 긍지를 갖고 일본에서 살아가는 데 있어서의 여러 가지 요구"로 정리했다. 한국 정부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2번과 4번 등을 8월 15일에 많이 생각했던 것이다.

1981년 전두환 정권이 야당지도자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하자 일재일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 회원들이 항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1981년 전두환 정권이 야당지도자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하자 일재일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 회원들이 항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진실위 자료사진

고국이 잘돼야 자신들도 잘되고 진정한 광복도 이룰 수 있다는 재일교포들의 인식은 1973년 광복절 때는 재일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 결성식으로 이어졌다. 한국의 민주회복을 염원하는 교포들의 희망이 광복절 행사와 결합됐던 것이다.

한민통은 유신체제 선포(1972.10.17) 직후부터 일본과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했던 김대중이 주도해서 만든 단체다. <김대중 자서전> 제1권은 "반독재 투쟁을 효과적으로 이끌 구심체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미국에서 한민통을 발족시키고 일본에서 그 지부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의장으로 내정된 그는 결성식 7일 전인 1973년 8월 8일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돼 동해 바다에 수장될 뻔했다가 살아났다. 결성식은 그의 부재 속에서 치러졌다.


김재화 민단 고문과 정재준 민단 도쿄본부 단장 등이 한민통 결성식을 광복절에 거행하는 데 동의한 것은 고국의 부조리가 제거되고 고국의 정치가 잘돼야 교포사회도 잘되고 진정한 광복도 가능하다는 공감대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부조리는 한반도 북부 정권이 아니라 남부 정권의 병폐였다. 조총련도 아닌 민단 쪽이 이 문제를 부각시킨 일은 박정희 정권의 분노를 초래했다. 이 분노로 인한 화를 뒤집어쓴 희생양이 재일교포 유학생 김정사(金整司)다.

뿌리 찾고자 모국 선택한 김정사

도쿄도(都) 바로 위쪽인 사이타마현에서 1955년에 출생한 재일교포 2세인 김정사는 와세다대학에 합격했지만 입학하지는 않았다. 2010년 4월 26일 자 <주간동아> 인터넷판에 실린 전화 인터뷰에서 그는 "조선인으로서 정체성을 찾고자 이를 포기하고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한 일을 소개했다.

자신의 뿌리를 찾고자 모국을 선택한 김정사는 입국 얼마 뒤 '너의 정체성은 무엇이냐?'며 달려드는 국군보안사령부 요원들에게 검거됐다. 김정사는 정체성을 찾고자 휴전선 이남으로 왔지만, 보안사 요원들은 스물둘 된 이 청년의 정체성을 이북에서 찾으려 했다.

사건의 발단은 부산대학교 대학원에 유학 중인 재일교포 유영수가 용공 누명을 쓰고 보안사에 체포된 일이었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제8권은 "보안사 수사관들은 수사 과정에서 유영수의 동생인 유성삼을 1977. 4. 17. 검거하고 유성삼의 가택수색을 하였는데, 이때 유성삼의 하숙집에서 '김지하 법정투쟁기'와 '10장 역사연구'를 발견하였다"라며 "보안사는 이 문건을 준 사람이 김정사라는 유성삼의 진술에 따라 김정사를 체포하였다"고 기술한다.

그런데 보안사는 김정사의 정체성을 '확인'하지 않고 그냥 '조작'했다. 별 증거도 없이 그를 한민통과 연결된 간첩으로 둔갑시켰다. 위 보고서는 "김정사는 재일지도원인 한민통 간부 임계성에게, 유영수는 재일공작지도원 이시다에게, 유성삼은 친형 유영수의 교양과 지령을 받고 각각 지시에 의해 국내에 잠입하여 간첩행위를 하였다"라는 혐의가 씌워졌다고 알려준다.

보안사는 혐의를 꾸며내는 과정에서 한민통과의 관련성을 조작했다. 위 보고서에 따르면, 훗날 국방부 과거사위원회에서 당시 상황을 진술하게 된 김정사는 "보안사에 연행되어 수사관들이 일본에서 만난 사람을 다 적으라고 하여 일본에서 만난 사람을 적었는데, 유학 오기 전에 만난 적이 있는 임계성이라는 이름을 적었고"라고 말했다.

임계성은 김정사가 참석한 강연회의 연사였다. 김정사는 "강연회에 참석하여 임계성의 강연을 들은 뒤 묻고 싶은 바가 있어 임계성을 찾아갔었고"라고 진술했다. 지인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임계성까지 적어낸 것을 보면, 보안사의 고문이 얼마나 혹독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그런데 강연을 들을 당시의 김정사는 임계성을 다른 단체 간부로 알고 있었다. 2011년 7월 15일의 CBS 라디오 인터뷰에 따르면, 김정사는 임계성을 민단 소속인 재일한국청년동맹 간부로 인식했다. 김정사가 한민통 간부로 생각되는 인물을 접촉한 일은 없었다.

그 점은 보안사 수사관들은 물론이고 중앙정보부도 알고 있었다. 위 보고서는 "1977. 6. 16. 중정에서 보안사로 회신한 '대일 사실조사 결과 통보'에는 김정사의 재일지도원인 임계성의 신원 성분에 대해 '한청(재일한국청년동맹) 간부직을 역임하고 있는 자로 개인적으로 조총련과의 연계 및 기타 불순단체 가입사실 확인할 수 없음'이라고 통보"했다고 알려준다. 임계성이 한민통 간부도 아니고 북한과의 연계도 없다는 것을 보안사와 중앙정보부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속좁은 박정희 정권이 빚어낸 인권탄압

2011년 9월 23일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한 원인을 제공했던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던 김정사(오른쪽)씨와 유성삼씨가 34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고 서울고등법원에서 소회를 밝히고 있다.
2011년 9월 23일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한 원인을 제공했던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던 김정사(오른쪽)씨와 유성삼씨가 34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고 서울고등법원에서 소회를 밝히고 있다.연합뉴스

김대중과 연계된 한민통은 박 정권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였다. 그래서 보안사·중앙정보부·검찰은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엮을 기회를 보고 있었다. 2018년 12월 15일 자 <한겨레>에 따르면, 훗날 국방부 과거사위에 출석한 고병천(당시의 보안사 수사관)은 김정사 사건이 그 실마리가 됐다고 진술했다. 이 사건 담당자였던 고병천은 "당시 한민통은 언제 누구라도 반국가단체로 만들어야 했었다"고 한 뒤 "김정사 사건을 통해 반국가단체가 될지 기대만 했었다"고 말했다.

김정사 사건을 발판으로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만드는 데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보안사 수사관들의 기대감은 결국 실현됐다. 1977년 10월 30일 자 <조선일보>에 이런 보도가 실렸다.

"일본에서 활동 중인 이른바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약칭 한민통)가 처음으로 우리 법원에 의해 반국가단체로 판결됐다. 서울형사지법 6부(재판장 허정훈 부장판사)는 28일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인정하고, 동 단체의 간부로부터 지령을 받고 국내에서 간첩 활동을 해온 재일교포 유학생 김정사(21·서울대 사회계열 1년) 피고인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고병천 수사관의 진술에 따르면, 사건 초기에 검찰은 고병천에게 '이 정도로는 사건이 안 된다'고 조언했다. 그랬던 사건을 키워 한민통이 반국가단체로 규정되는 '쾌거'도 이루고 김정사를 거물급 간첩으로 둔갑시키는 실적도 거뒀던 것이다. 진실을 만들어내기 위한 보안사 요원들의 '고충'을 느낄 수 있다.

김정사의 형량은 서울고등법원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됐다. 이것이 1978년 6월 13일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그는 1979년 8월 15일까지 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한편, 유영수는 무기징역을 받고, 유성삼은 징역 6년을 받았다.

박 정권은 1973년 광복절을 무대로 민주화운동을 벌인 한통련을 공격할 빌미를 교포 유학생에게서 억지로 찾아냈다. 고국이 잘돼야 우리도 잘 된다는 인식을 광복절을 통해 표출했던 재일교포들의 충정을 그런 식으로 매도했던 것이다. 김정사 사건을 계기로 반국가단체로 매도된 한민통이라는 존재는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때는 김대중의 혐의를 입증하는 유력한 증거로 활용됐다.

한통련과 아무 관계도 없고 접촉한 일이 없는데도 한통련 하수인으로 매도돼 징역살이를 했던 김정사의 억울함은 2013년 5월의 대법원 재심판결에 의해 풀렸다. 이때 유성삼도 함께 무죄 확정을 받았다. 한민통이 북한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점은 2009년에 진실화해위원회에 의해 밝혀졌다.

김정사 사건은 김대중과 손잡고 광복절에 민주화운동을 벌인 민단 교포들에게 앙심을 품은 박정희 정권의 속좁음이 빚어낸 인권탄압이다. 민족적 정체성을 찾겠다며 와세다대학을 버리고 과감하게 고국을 선택한 교포 청년의 꿈과 열정은 그 때문에 매정하게 짓밟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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