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8.12 07:05최종 업데이트 26.08.12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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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호프> 스틸 컷
영화 <호프> 스틸 컷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나홍진 감독의 <호프>를 둘러싸고 환호와 비난으로 분분하다. 흥미로운 현상이다. 한 편의 영화를 두고 이렇게 많은 얘기가 나오는 건 드문 일이다. 영화에 대한 평가와는 따로 생각해볼 지점이다.

그러면 이 글은 영화에 대한 찬성/반대, 혹은 지지/비판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글인가? 어떻게 읽든 독자의 자유이지만, 그동안 내가 이 칼럼에서 써온 글의 취지는 작품의 내용과 형식을 이모조모 따지는 내재적인 영화비평, 문학비평이라기보다는, 그런 작품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어떤 지점, 특히 상처와 고통과 억압이 드러나는 징후적 지점(symptomatic point)을 포착하려는 것이었다. 이 글도 호오가 분분한 이 영화가 비록 파편적인 방식으로나마 표현하는 그런 징후적 지점을 생각해보려 한다.

<호프>에서 드러나는 징후적 지점

<호프>를 둘러싼 다양한 의견과 찬반 논란은 결국 영화라는 독특한 매체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시각에서 나온다. 나는 영화평론가가 아니기에 문학과 구분되는 영화만의 '영화적인 것'을 요령 있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학과 구분되는 영화만의 특징이 있다면, 영화는 글이 아니라 이미지의 연결, 이미지의 운동, 이미지들이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리듬과 힘을 표현하는 매체라는 점이다. 한마디로 영화에서도 문학처럼 캐릭터, 플롯, 서사 등의 이야기적 요소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영화들은 이런 문학적인 요소가 약하더라도, 심지어는 거의 없더라도 오직 이미지의 운동과 리듬만으로도 인상적인 영화가 된다. <호프>를 좋게 보는 평들은 이런 점에 주목한 결과이리라. 이런 영화의 비서사적 특징과 관련해 생각해 볼 만한 발언을 읽었다.

"올바른 숏이라는 개념 따위는 성립할 수조차 없고, 이것이라 할 만한 확실한 원리조차 갖추지 못한 채 작가라는 존재의 정통적이고 원천적 서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연속적인 복제와 그것의 무한정한 전파성에 의해 영화라는 집단적 스펙터클은 비(非)정통성 그 자체의 불합리한 힘을 지니고 잠재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이다. 영화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서사' 또한 진실도 아니며 허구도 아니다. 영화의 이미지 역시 스스로 무언가를 재현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확실성과는 일절 무관한 것이다. "그것은 올바른 이미지가 아니다. 단지 이미지다"라고 말한 것은 분명 장뤼크 고다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영화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 <씨네21> 1565호)

일본의 저명한 평론가인 하스미에 따르면 영화는 "무언가를 재현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확실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호프>에서 1980년대의 한국 현실, 냉전 시대, 남북 분단 등의 배경은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그냥 "이미지"가 된다. 이미지에 대해 올바름을 평가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영화를 재미있게 본 이들은 대개 이런 입장에서 영화를 보고 즐긴다.

하지만 영화를 이미지 자체의 연결과 운동만이 아니라 거기서 벌어지는 서사, 주제의식, 캐릭터 형상화 등을 핵심요소로 보는 시각에서는 <호프>를 높이 평가하기 힘들다. 개연성, 이야기의 유기적 연결, 캐릭터의 입체성, 주제 등에서 대체로 납작한 수준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러면 <호프>는 이미지에 제시되는 현란한 액션과 기이한 외계 생명체의 모습, 인간과 비인간의 사투를 강렬하고 박진감 있게 다룬, 2시간 30분짜리 생존 게임에 불과한가? 나는 이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영화가 결코 유기적이고 짜임새 있게 다루지는 못했지만, <호프>의 어떤 장면에서 생각하게 되는 우리 시대를 지시하는 징후적 지점을 주목한다. 인간이 자신과 다른 존재를 바라보는 시각의 문제, 그리고 반대로 다른 존재가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의 문제이다. 우리 시대에 특히 울림이 있는 쟁점이다.

<곡성>과 <호프>

사실 이런 징후적 지점은 역시 논란이 분분했던 나홍진 감독의 전작 <곡성>에서 제기했던 문제이다. 끈끈한 연줄로 이어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폐쇄적 공동체에 찾아온 낯선 이방인(일본인)이 어떻게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괴물' 혹은 '악마'로 탈바꿈하는가? 나는 이 질문이 <곡성>이 제기하는 고갱이라고 판단한다. 실제 이방인이 괴물, 악마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낯선 존재가 사람들의 의식에서 어떻게 비치는지가 중요하다. 종종 이미지가 실제 사실보다 더 힘이 세다. 이런 점과 관련해서 진화심리학에서 인류가 진화하면서 왜 낯선 존재를 공포와 제거의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바를 새겨볼 필요가 있다.

영화 <곡성> 포스터.
영화 <곡성> 포스터.이십세기폭스코리아

인류가 미지의 존재를 마주했을 때 느끼는 경계심과 두려움은 오랜 진화 과정에서 획득한 생존 본능이다. 예컨대 왜 인류는 어두움을 두려워하는가? 어두움 속에 숨어 있는 존재, 예컨대 <호프>에도 공포의 상징으로 언급되는 호랑이를 겁내지 않고 무모한 행동을 하면, 댓가는 생명을 잃는 것이다. 그렇게 어두움은, 미지의 대상은 두려워해야 할 대상으로 인류의 유전자에 새겨진다.

그렇게 진화 과정에서 인류는 미지의 존재를 무조건 위협으로 간주하는 것이 생존에 훨씬 유리하다는 걸 깨닫는다. 그런 진화의 경험은 인류의 심리에 내재화되고 유전된다는 것이 진화심리학의 설명이다. 이런 심리 기제는 개체로서의 인류만이 아니라 인류가 집단을 이루고 나서도 작동한다. 인류에게 낯선 존재(외부 부족, 미지의 동물, 혹은 <호프>의 외계인 등)는 물리적인 위협일 뿐만 아니라, 면역이 안 되는 전염병이나 기생충을 옮겨올 가능성을 지닌다. 낯선 존재에 대한 혐오감과 적개심은 질병과 미지의 위협에서 종족을 지키기 위한 본능적인 방역 시스템으로 작동한다.

이런 다른 집단에 대한 경계심은 역사에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정당화하는 심리적 무기로 전환하며, 비인류나 외계 존재에 대해서는 본능적 경계심과 적대심으로 나타난다. 고도의 기술력을 지닌 외계인은 인류가 먹이사슬의 최정상에서 밀려나 다시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존재에게 사냥당하는 동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원초적인 생존 공포를 자극한다.

이런 문제의식은 비록 파편적인 방식이지만 <호프>에서도 나타난다. <호프>에서 주민들은 낯선 외계인, 혹은 "괴물"을 어떻게 대하는가? 영화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하는 여자 경찰 성애(정호연)는 아무 주저 없이, 느닷없이 등장한 낯선 존재를 "괴물"이라고 단정한다. "아무리 괴물이라도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잖아요."

영화 <호프> 스틸 컷
영화 <호프> 스틸 컷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호프> 외계인은 공포스러운 미지의 존재다. SF 영화에서 특별한 시각은 아니다. 그런 존재를 우연히 마주하게 된 인간들이 매우 비이성적으로, 본능적으로, 살아남으려고 하는 반응을 2시간 30여 분 보여주는 게 영화의 뼈대다. 인상적인 영화의 전반부는 미지의 존재가 벌이는 행위(action)가 아니라 그에 대한 주민들의 반응(reaction)에 초점을 둔다.

<호프>의 도드라지는 점은 집요하게, 숨 가쁘게, 그리고 그 안에 파편적으로 묘사되는 인간들의 여러 반응(때로는 코미디로 전달되는)을 집어넣어 보여준다는 점이다. <호프>는 유기적 통일성이 아니라 인간들이 보여주는 리액션의 파편과 파편을 헐겁게 짜 맞춘 영화다. 그 점을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파편적이고 현실과의 연관성을 의도적으로 지우려고 해도, 그런 파편 속에서 표현되는 사람들의 숨겨진 내면과 정념은 눈에 띈다. 자연스럽게 영화 제목 '호프Hope'와 연결되는 호포항(號浦港) 마을은 근거 있는 희망이 아니라 근거 없는 소문, 두려움, 그리고 기이한 믿음이 떠도는 곳이다. 그렇게 호포는 '虎浦'(호랑이 마을)가 된다.

영화의 첫 부분에 등장하는 죽은 소의 모습을 보고 파출소장인 주인공 범석(황정민)과 성기(조인성)를 비롯한 마을 청년들은 별다른 의심 없이 북한을 지나 비무장 지대 철책을 넘어 들어온 호랑이의 소행일 거라고 단정한다. 나중에는 그게 아니라 외계인의 짓일 거라는 소문에도 모두 동의한다. 그리고 그런 믿음의 근거는 다소 코믹하게 그려지는 해술 아저씨(임현식)의 말이다. 그 말을 모두 믿는다. "해술이 아저씨가 그런 거면 맞아." 왜 맞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냥 그렇게 사람들이 믿을 뿐이다. 그리고 뜻밖에도 그게 자주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다.

영화 <호프> 스틸 컷
영화 <호프> 스틸 컷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인상적인 한 장면

<곡성>에서도 확인했듯이 사람들은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고 충동적이다. 차분하게 사안을 따지는 게 아니라 어떤 권위 있는 존재가 '그렇다'라고 규정하면 그냥 추종한다. <곡성>에서는 무속인이 그런 역할을 한다. 곡성 마을이 그랬듯이 호포 마을 사람도 그렇다. 맹목의 공동체가 형성된다. 그런 맹목에서 마을에 들어온, 더 나아가 마을을 공격하는 자는 무조건 제거해야 하는 괴물이 된다.

<호프>의 인상적인 한 장면은 괴물이 사실 괴물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보여준다. 외계 존재의 공격 이후 범석은 마을을 공격한 외계인 바미기르(카메론 브리튼)를 추격하며 총을 난사한다. 추격전 끝에 바미기르와 나란히 달리던 순간에 범석은 문득 바미기르의 얼굴을 보고 당황한다.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바미기르가 흘리는 눈물을 느리게 보여준다. 그러나 영화는 거기서 멈춘다. 그리고 다시 숨 가쁜 액션으로 넘어간다. 바미기르는 뜻밖의 방식으로 제거된다. 범석이든 누구든 다른 종을 이해할 마음이 없다. 호랑이처럼 그들은 두려움과 제거의 대상일 뿐이다.

그렇다면 외계인에게 인류는 무엇인가? 그들은 왜 호포 마을을 무자비하게 공격하나? 실종되었다가 어이없이 살해된, 외계 문명의 왕자를 찾기 위한 절박한 표현인가? 그러나 그런 외계 존재의 내면은 영화의 막바지에서 다소 뜬금없이 드러나고 급하게 막을 내린다.

그들은 어떤 이유로 지구에 왔는가? 그들이 말하는 구원과 희망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외계인들은 숲과 도로에서 마베이요(마이클 패스벤더)가 성기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장면에서 드러나듯이 맹목적인 살해 욕구를 지닌 동물적 존재인 것처럼 묘사된다. 역시 개연성 면에서 문제가 있는 장면이다.

하지만 <호프>는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다른 종들 사이의 거리감을 드러낸다. 내 판단으로는 <호프>를 걸작이라고 평할 수는 없다. 하지만 파편적으로나마 생각해 볼 만한 문제를 던지는 특이한 작품인 건 분명하다. 우리 시대의 어떤 (무)의식을 건드리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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