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 품질 조사하는 우장춘우장춘 박사(가운데 안경 쓴 인물)가 김해시험장에서 시험재배한 배추 품질을 조사하고 있다.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이듬해 6월 진도를 둘러보고 원종 생산지로 결정했다. 적절한 자연 조건과 이길성 원예조합장의 열성이 더해져 배추와 무 우량종 개발에 성공했다. 요즘 배추는 잎이 동그랗게 안쪽으로 말려 속이 꽉 차 있지만, 예전의 토종 배추는 그렇지 않아 키울 때 손으로 일일이 묶어줘야 했다. 노동력을 줄인 것은 물론이고 생산 시기, 저장성, 맛 등도 획기적으로 개선해 배추김치를 대중화했다. 오늘날 김치를 앞세운 K푸드가 세계에서 각광을 받는 것도 우장춘 덕이다.
대관령 시험장에서 개발한 무병(無病) 씨감자는 '강원도 감자'의 모태가 됐고, 고추·양파·양배추·오이·토마토·참외 등도 그의 손을 거쳐 우량종으로 개선돼 우리나라는 자립 농업을 넘어 종자 수출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장미·카네이션·국화 등의 품종도 개량하고 코스모스를 전국의 철로변과 길가에 심게 한 것도 우장춘이었다.
권력 눈치 안 보고 권력 탐하지도 않아
그는 술은 못 마셨지만 바둑, 장기, 마작, 화투 등 잡기는 즐겼다. 게임에 활용되는 수학 원리는 육종학 연구에도 유용하다. 우장춘은 화투의 확률에 관한 책을 쓰려다가 상사한테 혼난 적도 있었다. 우장춘은 2명이 하는 일본 화투놀이 코이코이를 응용해 3명이 즐기는 고스톱을 창안하기도 했다.
그밖에 다른 관심사는 없었다. 예산이 확보되면 직원들의 복지보다 연구시설 확충에 썼다. 직원들도 소장이 검소하게 사는 걸 잘 알고 있어 불만을 털어놓지 못했다. 공사(公私) 구분도 명확했을 뿐 아니라 권력 눈치를 보지도 않고 권력을 탐하지도 않았다.
6·25 전쟁 중에 우장춘은 군 고위층에 요청해 연구원들의 입영 연기를 허락받았다. 이복누나 우희명이 농업과학연구소에서 일하던 아들도 부탁하자 "그 직원들은 연구소에 없어서는 안 될 인력이고 조카는 그렇지 않으니 입영시키라"라고 말했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자신의 생일 축하 모임 때 주일극동사령관이 보내온 수경 재배 딸기를 우장춘에게 보여주며 "재배할 수 있겠느냐"라고 물었다. 보통은 최고 권력자에게 인정받으려는 마음에 해보겠다고 했겠지만 그는 "막대한 비용이 들기 때문에 청정 재배를 보급하는 것이 낫다"라고 일축했다. 농림부 장관 제의도 거절했다. 고관대작이 연구소를 방문해도 작업복에 고무신 차림으로 맞기 일쑤여서 '고무신 박사'로 불렸다.
후진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평소 제자들에게 "교과서에서 배운 것만으로는 안 되고 직접 실험을 반복하고 실패도 경험해야 비로소 자신의 지식이 된다"라고 역설했다. 누누이 강조한 것은 관찰의 중요성이었다. "안광(眼光·눈빛)이 지배(紙背·종이 뒷면)를 철(徹)한다"라는 말을 본떠 "안광이 엽배(葉背)를 꿰뚫으라"라고 가르쳤다.
우장춘은 1953년 6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일본을 방문하려 했으나 정부는 돌아오지 않을 것을 염려해 출국을 불허했다. 결국 임종하지 못한 채 연구소 강당에 분향소를 마련하고 어머니를 떠나보냈다. 각계에서 조위금이 답지하자 그 돈으로 식수 부족에 시달리는 주민을 위해 우물을 파고 '어머니의 젖줄 같은 샘'이란 뜻으로 '자유천(慈乳泉)'이라고 이름 지었다.

▲효심으로 만든 우물우장춘 박사는 모친상 때 들어온 조위금으로 우물을 파고 자유천(慈乳泉)이라고 명명했다. 부산시 동래구 우장춘기념관 앞에 유적이 보존돼 있다.
우장춘기념관
우장춘이 필생의 과업으로 삼은 것은 이기작(二期作)이 가능한 벼의 개발이었다. 십이지장궤양이 악화해 서울 국립중앙의료원에 입원한 뒤에도 병상의 링거병 옆에 벼를 비닐봉지에 담아 걸어놓고 관찰할 정도로 열의를 보였으나 끝내 결실을 보지 못했다. 그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다면 보릿고개란 말이 일찍 사라질 수도 있었다.
▲학위기와 문화포장1936년 5월 4일 도쿄제대가 수여한 박사 학위기(위)와 1959년 8월 7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여힌 문화포장증.
우장춘기념관
1959년 8월 7일 이근식 농림부 장관은 병실을 찾아 우장춘에게 문화포장을 수여했다.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1955년)에 이어 두 번째 영예였다. 그는 기념 메달을 목에 걸고 "마침내 조국이 나를 인정했다"라며 눈물을 흘렸다. 그로부터 사흘 뒤 눈을 감았다. 그에 앞서 1954년 초대 학술원 회원으로 뽑힌 데 이어 1957년 제1회 부산시 문화상(과학상)을 받았고, 2017년 대한민국 과학기술(생명과학 분야) 유공자로 선정됐다.
여기산 묘소에 추모객 발길이 끊긴 까닭
우장춘이 잠들어 있는 여기산은 한국 농업 연구의 성지나 다름없다. 농촌 진흥사업의 기틀을 마련한 정남규 초대 농촌진흥청장과 통일벼 보급에 힘쓴 김인환 제5대 농촌진흥청장 묘소도 자리 잡고 있다. 농촌진흥청과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도 지척에 있다가 각각 전북 전주와 서울 관악캠퍼스로 옮겨갔다.
지금은 백로 서식지이자 청동기 유적이 발굴된 야생동물 및 문화재 보호구역이어서 철제 울타리를 치고 '출입 금지'를 알리는 푯말도 달아 놓았다. 한일 간의 불행한 역사 탓에 가족과 떨어져 살며 가슴 아파한 그에게 지금도 추모객이나 일반 시민이 가깝게 다가가지 못하도록 장벽을 세운 것 같아 안타깝다.
▲우장춘 박사 묘소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여기산에 있는 우장춘 박사 묘소. 울타리를 쳐놓아 일반인이 쉽게 접근할 수 없다.
경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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