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8.10 10:16최종 업데이트 26.08.10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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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농업 연구의 아버지 우장춘 박사. 험상궂게 생긴 얼굴과 무뚝뚝한 표정 때문에 별명이 불독이었다.
한국 농업 연구의 아버지 우장춘 박사. 험상궂게 생긴 얼굴과 무뚝뚝한 표정 때문에 별명이 불독이었다.농촌진흥청

'육종학의 세계적 권위 우장춘 박사 영면, 비보에 침울 주인 잃은 시험장, 분향 속에 애도의 대오, 이 대통령도 금일봉과 조화 보내고, 인간 국보 우 박사의 편모(片貌), 일인(日人)의 조소(嘲笑) 받고 분발하여 성공, 종(種) 합성에 세계적인 원조, 우리나라 채종(採種) 체계 확립…'

1959년 8월 10일부터 나흘간 우장춘의 사망 관련 소식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의 제목들이다. 장례식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유해는 당시 농촌진흥청이 있던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의 여기산에 안장됐다. 이듬해 4월 제막된 묘비에는 우장춘의 흉상과 함께 시인 이은상이 지은 추모 연작시조가 새겨졌다.

불우와 고난 속에 진리를 토파내어
종자 합성 새 학설을 세계에 외칠 적에
잠잠턴 학문의 바다 물결 한번 치니라


온갖 소채 종자 우리 힘으로 길러내어
겨레를 위하시니 그 공로 얼마던고
빛나는 문화포장을 웃고 받고 가니라

흙에서 살던 인생 흙으로 돌아가매
그 정신 뿌리 되어 싹 트고 가지 뻗어
이 나라 과학의 동산에 백화만발 하리라

우장춘 박사 영면
우장춘 박사 영면우장춘의 별세 소식과 함께 빈소 표정, 인간적 면모, 연구 업적 등을 보도한 동아일보 1959년 8월 10, 11, 12, 13일 자 신문.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그로부터 67년이 지났다. 묘비명 구절대로 우장춘의 정신은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어 온갖 꽃을 피웠다. 추모 열기도 지금껏 식지 않고 있다. 우장춘이 원장을 맡았던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농림부 중앙원예기술원 후신)은 5월 20일 개원 73주년 기념식과 함께 67주기 추도식을 열었다. 그의 오랜 근무지 부산 동래구도 부산과학기술협의회와 공동으로 8월 4일 동래문화회관 소극장에서 추모식을 개최하고 9일까지 시민 헌화와 생활과학교실 체험 프로그램 등 추모 주간 행사를 펼쳤다.

10일 기일에는 여기산 묘소 앞에서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원우회 주최로 추모제가 진행된다. 우장춘기념사업회가 지난해 10월 1일 창립총회를 거쳐 올 3월 31일 법인 설립 인가를 받은 데다 일본에 사는 우장춘 손자와 증손자 10명이 처음으로 참석해 의미를 더한다. 일본 도쿄대 농학부는 지난해 9월 17일 '우의 삼각형 모델 구축 90주년 기념 국제 심포지엄'을 열었으며, KBS 1TV '역사스페셜 시간여행자'는 8월 23일 우장춘 발자취와 후손 인터뷰 등을 소개할 예정이다.

‘우의 삼각형’ 심포지엄
‘우의 삼각형’ 심포지엄일본 도쿄대 농학부가 2025년 9월 17일 개최한 ‘우의 삼각형 구축 90주년 기념 국제 심포지엄’ 포스터.우장춘기념사업회

보육원의 기억 때문에 평생 감자 먹기 꺼려

우장춘의 아버지는 1895년 을미사변 때 일본 군인과 낭인들의 길잡이 역할을 한 조선군 훈련대 제2대대장 우범선이다. 우장춘 별세 당시 언론들은 '일본으로 망명한 혁명가'(동아일보), '불우한 한말의 혁명가'(조선일보)라고 표현했으나 명성황후 시해가 패륜적 범죄이고 일본의 한반도 침탈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역적이자 반민족행위자라는 낙인을 벗어날 수 없다.

이듬해 아관파천이 일어나 친러파가 득세하고 친일파가 궁지에 몰리자 처자식을 두고 일본 도쿄로 피신했다. 일본 여성 사카이 나카와 결혼해 1898년 우장춘을 낳았고 뱃속에 둘째 아들이 자라던 1903년 대한제국 군인 출신 고영근에게 암살됐다.

우장춘과 부모
우장춘과 부모왼쪽이 을미사변에 가담했다가 일본으로 망명한 아버지 우범선, 오른쪽이 어머니 사카이 나카, 가운데가 어린 시절의 우장춘이다.우장춘기념관

사카이는 유복자가 태어나자 혼자 둘을 키우기 너무 힘겨워 우장춘을 한동안 보육원에 맡겼다. 우장춘이 감자 먹기를 꺼린 것도 그때의 경험에서 비롯됐다. 딸이 "우리에겐 음식 가리지 말라고 타일러놓고 아버지는 왜 감자를 싫어하느냐"라고 묻자 "보육원에서 평생 먹을 양의 감자를 매일같이 먹어서 보는 것조차 싫어졌으니 이것만은 용서해다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우장춘은 가난에다가 조선인의 자식이라는 설움까지 견디며 어렵게 자랐다. 어머니는 그에게 "아버지는 훌륭한 사람이었다. 아버지 나라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인간이 되라"라며 자부심과 조국애를 일깨웠다. 교육열도 남달랐다. 두 아들 교육비를 마련하려고 남편 묘지까지 팔았다. 1910년 한일 강제병합 후 조선총독부가 양육비를 지급하자 형편이 나아졌다.

우장춘은 히로시마현 구레시에서 소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한 뒤 교토제대 공학부에 들어가고 싶었으나 총독부 지시에 따라 도쿄제대 부설 전문학교 농학실과에 입학했다. 훗날 자녀들에게 "공학부에 들어갔으면 무기 제조 연구에 몰두했을지 모르는데 다행이었다"라고 술회했다.

소년 우장춘과 청년 우장춘
소년 우장춘과 청년 우장춘우장춘은 히로시마현 구레시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한 뒤 도쿄제대 농학부 농학실과를 다녔다.우장춘기념관

1919년 졸업한 뒤 농림성 농사시험장에 취직했다. 이웃집 아들의 가정교사를 해주다가 학생 어머니에게서 동생 와타나베 고하루를 신붓감으로 소개받았다. 신부 쪽 부모 형제들은 결혼을 완강하게 반대했으나 고하루가 고집해 성사됐다. 1924년 결혼식을 올려놓고도 2년 뒤에야 신고한 것은 고하루 친정에서 호적등본을 떼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적 문제는 우범선의 은인 스나가 하지메가 고하루를 양녀로 입적하고 우장춘이 데릴사위가 되는 형식으로 정리했다. 이로써 우장춘의 공식 성명은 스나가 나가하루(須永長春)가 됐으나 그는 한국식 성을 그대로 썼다. 육종학 서적에 단골로 등장하는 'UN'이란 표기는 '우 나가하루'의 영문 약자다.

다윈의 진화론 수정 보완한 획기적 업적

우장춘은 1922년 '유전학 잡지'에 나팔꽃에 관한 첫 논문을 발표한 뒤 1924년 사이타마현 고노스시 농사시험장으로 전근을 갔다. 나팔꽃 유전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며 박사 학위 논문을 준비했으나 1930년 가을 도쿄제대에 제출하기 직전 농사시험장 본관에 화재가 일어나 모두 잿더미로 변했다.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논문과 실험 결과를 담은 자료를 들고 나오려는 우장춘을 말리느라 주변 사람들이 애를 먹었다. 논문은 물거품이 됐지만 이를 토대로 1930년 개발한 겹꽃 피튜니아(일명 우장춘 꽃)가 미국과 유럽 시장에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뜻밖의 성과를 거뒀다. 사카타 종묘회사는 떼돈을 벌었고, 우장춘은 '피튜니아의 마술사'란 별명을 얻었다.

우장춘은 배추과(科) 식물을 교배하는 연구에 몰두하다가 1935년 이종(異種) 간 교잡을 통해 새로운 종이 태어난다는 사실을 실험으로 입증했다. 염색체가 10개인 배추와 9개인 양배추를 교배해 19개인 유채를 개발한 것이다. 그는 흑겨자와 배추 사이에서 갓, 흑겨자와 양배추 사이에서 에티오피아 겨자도 만들어 보이는 데 성공했다. 이를 도식화한 것이 '우의 삼각형'(U's Triangle)이다.

우장춘의 삼각형
우장춘의 삼각형십자화과 배추속에 속하는 배추와 양배추를 교배해 얻은 식물체가 유채와 같음을 증명한 데 이어 배추속 식물 6종의 연관성을 밝혀내 이를 도식화했다.국립원예특작과학원

그는 연구 결과를 토대로 쓴 논문 '배추속(屬) 식물에 관한 게놈 분석'으로 1936년 5월 4일 도쿄제대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석 달 앞서 '곰팡이를 이용한 식품 연구'로 홋카이도제대에서 학위를 딴 임호식에 이어 조선인으로서는 두 번째였다. 우장춘의 '종의 합성' 이론은 다윈의 진화론을 수정 보완한 획기적인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후속 분자생물학적 분석을 통해 타당성이 입증됐으며 지금도 관련 논문에 꾸준히 인용되고 있다.

우장춘은 탁월한 연구 실적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어도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승진하지 못했다. 1937년 다키이 종묘회사의 초대 나가오카 농장장으로 자리를 옮기자 농사시험장은 마지못해 퇴직 하루 전날 기사(技師)로 진급시켰다. 나가오카 농장에서는 고구마를 연구하며 월간지 <원예와 육종>을 발간했다.

"채소 종자난을 해결할 사람은 우장춘밖에 없다"

1945년 광복과 함께 한국 농촌은 위기를 맞았다. 종자, 묘목, 비료, 농약 등을 대부분 일본에 의존해오다가 갑자기 공급이 끊겼기 때문이다. 해마다 3000가마씩 일본산 종자를 수입해 파종하던 채소 농가가 가장 타격이 컸다. 특히 김치는 식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반찬이어서 밀수를 해서라도 배추와 무 종자를 들여와야 했다.

국민의 원성이 높아지자 우장춘과 함께 근무하며 <원예와 육종> 편집을 맡았던 김종이 "이 문제를 해결할 사람은 우장춘밖에 없다"라고 제안했다. '국모 시해범의 아들'이라며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으나 사정이 워낙 절박해 모셔 오자는 쪽으로 중론이 모였다.

우장춘도 귀국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우장춘박사귀국추진위원회가 결성돼 모금 운동을 전개했다. 종자 확보에 애를 먹던 채소 농가들도 앞다퉈 성금을 냈다. 이주형 국회 농림분과위원장과 조봉암 농림부 장관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해 예산을 마련하고 이시영 부통령도 100만 원을 기부했다. 1949년 4월 30일 한국농업과학연구소(1953년 중앙원예기술원으로 개편)를 창설하고 일본인 소유의 부산시 동래구 금정산 기슭 과수원을 시험농장 부지로 확보했다.

우장춘의 아내와 2남 4녀는 물론이거니와 주변 사람 모두 한국행을 만류했다. 일본 정부까지 나서 귀국을 방해하자 강제 퇴거 외국인을 구금하는 오무라수용소에 자진해 들어가 한국에서 보내준 호적등본을 꺼내 보이며 출국을 요청했다. 안정된 생활 기반과 훨씬 좋은 연구 여건을 마다하고 아버지 나라를 택한 것이다.

우장춘 박사 가족 사진
우장춘 박사 가족 사진우장춘 박사는 아내와 2남4녀를 일본에 두고 홀로 한국행을 택했다. 양복 차림의 우장춘 박사가 한국으로 떠나기 직전에 가족과 함께 찍었다. 맨 왼쪽 기모노를 입은 여성이 아내 고하루다.우장춘기념관

1950년 3월 8일 부산에 입항했다. 부산 시민들은 플래카드를 들고 부두에 나와 따뜻하게 맞았다. 열흘 뒤 동래원예고등학교에서 환영식이 열렸다. 한복을 입고 단상에 오른 우장춘은 일본어로 "지금까지 어머니 나라를 위해 힘썼으니 이제는 아버지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약속했다.

환영하는 부산시민들
환영하는 부산시민들1950년 3월 8일 수송선 신코마루(新興丸)를 타고 온 우장춘 박사가 부산항에 내리자 부산시민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환영하고 있다(왼쪽). 3월 18일 동래원예고등학교에서 열린 환영식에서 한복 차림의 우장춘 박사가 인사하고 있다. 왼쪽은 우 박사 귀국 추진에 앞장선 김종 한국농업과학연구소 부소장이다(오른쪽).우장춘기념관

그는 육종학 서적, 실험 기자재, 각종 종자도 잔뜩 갖고 왔다. 귀국추진위가 우장춘 가족 생활비로 보내준 100만 엔을 국내 연구에 필요한 물품 구입에 몽땅 써버린 것이다. 석 달 뒤 6·25가 터졌으나 다행히 부산까지는 전쟁의 불길이 미치지 않아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일본에 남았다면 독창적인 연구로 노벨상을 탈 가능성도 컸으나 한국에서는 당장 필요한 채소 종자 개발에 온 힘을 쏟느라 그럴 여유가 없었다.

배추와 무 원종(原種) 생산 후보지를 고르려고 1951년 10월 제주를 찾았다. 제주는 장마가 빨라 개화기와 겹치는 데다 평탄한 지형 탓에 곤충에 의한 교배가 많아 부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대신 식용유를 생산할 수 있는 유채와 기후에 적합한 감귤을 보급했다. 우장춘은 "지금은 배불리 먹는 것이 급선무지만 비타민이 풍부한 과일을 값싸게 먹는 것도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예산 낭비라는 주장을 물리치고 초창기부터 농업과학연구소에 화훼과를 설치한 것도 "꽃은 인간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준다"라는 지론 때문이었다.

배추 품질 조사하는 우장춘
배추 품질 조사하는 우장춘우장춘 박사(가운데 안경 쓴 인물)가 김해시험장에서 시험재배한 배추 품질을 조사하고 있다.국립원예특작과학원

이듬해 6월 진도를 둘러보고 원종 생산지로 결정했다. 적절한 자연 조건과 이길성 원예조합장의 열성이 더해져 배추와 무 우량종 개발에 성공했다. 요즘 배추는 잎이 동그랗게 안쪽으로 말려 속이 꽉 차 있지만, 예전의 토종 배추는 그렇지 않아 키울 때 손으로 일일이 묶어줘야 했다. 노동력을 줄인 것은 물론이고 생산 시기, 저장성, 맛 등도 획기적으로 개선해 배추김치를 대중화했다. 오늘날 김치를 앞세운 K푸드가 세계에서 각광을 받는 것도 우장춘 덕이다.

대관령 시험장에서 개발한 무병(無病) 씨감자는 '강원도 감자'의 모태가 됐고, 고추·양파·양배추·오이·토마토·참외 등도 그의 손을 거쳐 우량종으로 개선돼 우리나라는 자립 농업을 넘어 종자 수출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장미·카네이션·국화 등의 품종도 개량하고 코스모스를 전국의 철로변과 길가에 심게 한 것도 우장춘이었다.

권력 눈치 안 보고 권력 탐하지도 않아

그는 술은 못 마셨지만 바둑, 장기, 마작, 화투 등 잡기는 즐겼다. 게임에 활용되는 수학 원리는 육종학 연구에도 유용하다. 우장춘은 화투의 확률에 관한 책을 쓰려다가 상사한테 혼난 적도 있었다. 우장춘은 2명이 하는 일본 화투놀이 코이코이를 응용해 3명이 즐기는 고스톱을 창안하기도 했다.

그밖에 다른 관심사는 없었다. 예산이 확보되면 직원들의 복지보다 연구시설 확충에 썼다. 직원들도 소장이 검소하게 사는 걸 잘 알고 있어 불만을 털어놓지 못했다. 공사(公私) 구분도 명확했을 뿐 아니라 권력 눈치를 보지도 않고 권력을 탐하지도 않았다.

6·25 전쟁 중에 우장춘은 군 고위층에 요청해 연구원들의 입영 연기를 허락받았다. 이복누나 우희명이 농업과학연구소에서 일하던 아들도 부탁하자 "그 직원들은 연구소에 없어서는 안 될 인력이고 조카는 그렇지 않으니 입영시키라"라고 말했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자신의 생일 축하 모임 때 주일극동사령관이 보내온 수경 재배 딸기를 우장춘에게 보여주며 "재배할 수 있겠느냐"라고 물었다. 보통은 최고 권력자에게 인정받으려는 마음에 해보겠다고 했겠지만 그는 "막대한 비용이 들기 때문에 청정 재배를 보급하는 것이 낫다"라고 일축했다. 농림부 장관 제의도 거절했다. 고관대작이 연구소를 방문해도 작업복에 고무신 차림으로 맞기 일쑤여서 '고무신 박사'로 불렸다.

후진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평소 제자들에게 "교과서에서 배운 것만으로는 안 되고 직접 실험을 반복하고 실패도 경험해야 비로소 자신의 지식이 된다"라고 역설했다. 누누이 강조한 것은 관찰의 중요성이었다. "안광(眼光·눈빛)이 지배(紙背·종이 뒷면)를 철(徹)한다"라는 말을 본떠 "안광이 엽배(葉背)를 꿰뚫으라"라고 가르쳤다.

우장춘은 1953년 6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일본을 방문하려 했으나 정부는 돌아오지 않을 것을 염려해 출국을 불허했다. 결국 임종하지 못한 채 연구소 강당에 분향소를 마련하고 어머니를 떠나보냈다. 각계에서 조위금이 답지하자 그 돈으로 식수 부족에 시달리는 주민을 위해 우물을 파고 '어머니의 젖줄 같은 샘'이란 뜻으로 '자유천(慈乳泉)'이라고 이름 지었다.

효심으로 만든 우물
효심으로 만든 우물우장춘 박사는 모친상 때 들어온 조위금으로 우물을 파고 자유천(慈乳泉)이라고 명명했다. 부산시 동래구 우장춘기념관 앞에 유적이 보존돼 있다.우장춘기념관

우장춘이 필생의 과업으로 삼은 것은 이기작(二期作)이 가능한 벼의 개발이었다. 십이지장궤양이 악화해 서울 국립중앙의료원에 입원한 뒤에도 병상의 링거병 옆에 벼를 비닐봉지에 담아 걸어놓고 관찰할 정도로 열의를 보였으나 끝내 결실을 보지 못했다. 그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다면 보릿고개란 말이 일찍 사라질 수도 있었다.

학위기와 문화포장
학위기와 문화포장1936년 5월 4일 도쿄제대가 수여한 박사 학위기(위)와 1959년 8월 7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여힌 문화포장증.우장춘기념관

1959년 8월 7일 이근식 농림부 장관은 병실을 찾아 우장춘에게 문화포장을 수여했다.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1955년)에 이어 두 번째 영예였다. 그는 기념 메달을 목에 걸고 "마침내 조국이 나를 인정했다"라며 눈물을 흘렸다. 그로부터 사흘 뒤 눈을 감았다. 그에 앞서 1954년 초대 학술원 회원으로 뽑힌 데 이어 1957년 제1회 부산시 문화상(과학상)을 받았고, 2017년 대한민국 과학기술(생명과학 분야) 유공자로 선정됐다.

여기산 묘소에 추모객 발길이 끊긴 까닭

우장춘이 잠들어 있는 여기산은 한국 농업 연구의 성지나 다름없다. 농촌 진흥사업의 기틀을 마련한 정남규 초대 농촌진흥청장과 통일벼 보급에 힘쓴 김인환 제5대 농촌진흥청장 묘소도 자리 잡고 있다. 농촌진흥청과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도 지척에 있다가 각각 전북 전주와 서울 관악캠퍼스로 옮겨갔다.

지금은 백로 서식지이자 청동기 유적이 발굴된 야생동물 및 문화재 보호구역이어서 철제 울타리를 치고 '출입 금지'를 알리는 푯말도 달아 놓았다. 한일 간의 불행한 역사 탓에 가족과 떨어져 살며 가슴 아파한 그에게 지금도 추모객이나 일반 시민이 가깝게 다가가지 못하도록 장벽을 세운 것 같아 안타깝다.

우장춘 박사 묘소
우장춘 박사 묘소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여기산에 있는 우장춘 박사 묘소. 울타리를 쳐놓아 일반인이 쉽게 접근할 수 없다.경기도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우장춘 박사 일대기 나의 조국>
<우장춘 박사의 생애와 학문적 업적의 재조명>
<대한민국 과학기술 유공자 백과>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국립원예특작과학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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