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가 2016년 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한시대 선생
국가보훈부
한시대가 한국을 떠난 1903년은 일본이 한국 무대의 경쟁자인 러시아를 몰아내기 위해 마지막 일격을 생각하던 시기였다.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 승리를 발판으로 1905년 을사늑약을 성사시켰다. 그는 이 같은 고국의 처지를 마음에 두고 살았을 뿐 아니라 고국을 돕기 위한 구체적 실천에도 나섰다. 그의 이름이 <독립유공자공훈록>에 나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가 대규모 농장사업을 시작한 지 4년 만에 3·1운동이 발생했다. 이때부터 그는 재미교포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후원하는 사람이 됐다. 위 공훈록은 "임시정부를 후원하기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여 송금"했다고 말한다. 그는 사업을 할 때처럼 독립운동 후원을 할 때도 과감했다.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은 "사업과 국권회복운동에서도 항상 대담성을 보였다"고 평한다.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한·중 두 민족의 항일투쟁은 전쟁 단계로 발전했다. 한시대의 기부활동도 이 흐름에 맞춰 전개됐다. 공훈록은 "중일전쟁이 발발한 것을 기회로 항일무장투쟁을 강화하기 위하여 미주 등지에서 산재한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등 6개 단체와 연합하여 한국광복진선(陳線)을 결성하고 진강(鎭江)에 위치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곽단체로서 활동하면서 8년간 적극적으로 임시정부를 후원하였다"고 기술한다.
이런 가운데 그는 대한인국민회 집행위원장, 해외한족대회 부의장,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위원장,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 부위원장 등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재미교포 통합과 독립운동 지원에 헌신했다.
그는 돈뿐 아니라 시간도 얼마든지 고국을 위해 쓸 수 있는 사업가였다. 이 점은 고국 여행이 쉬워진 해방 직후에 증명됐다. 이때 그는 해방 이후의 분열상을 극복하고자 직접 고국에 돌아와 호소 활동을 전개했다.
1945년 11월 4일, 56세 된 한시대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대표단을 이끌고 고국 땅을 밟았다. 그 뒤 그가 중점적으로 전개한 일은 좌우통합운동이다. 국가보훈부가 그를 '2016년 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할 때 배포한 자료에 따르면, 그는 "중립적 입장에서 중간세력들과의 통합운동을 전개해 1946년 9월 15일 천도교 청우당에서 8개 정당 및 단체를 통합한 신진당을 결성"했다. 중간세력의 덩치를 키워 좌우합작을 벌이는 작업이 신진당 결성이라는 성과를 냈던 것이다.
그는 좌우합작을 위해 대중적 홍보활동에도 참여했다. 위 자료는 "한시대는 (1946년) 7월 18일 자와 8월 1일 자 라디오 방송을 통해 좌우합작에 의한 단결만이 목표를 달성하는 유일한 방법이라 역설하고, 이를 성취하기 위해 파당적 논쟁을 버리고 운동의 통합과 정당과 민중 사이의 협동을 재촉하자고 주장하였다"라고 한 뒤 "7월 23일에는 서울 종로의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주최로 대중 강연회를 개최하였다"라고 기술한다.
해방 직후의 좌우대립은 실상은 항일진보진영에 대한 보수세력의 압박이었다. 전부 다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보수진영 상당수가 친일파 혹은 극우세력이었기 때문에, 항일진보진영은 이들과 절대로 타협해서는 안 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런 사정이 있기는 했지만, 미국에서 건너와 민족의 단결을 촉구한 것은 고국에 대한 한시대의 애정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잘나가는 사업가였던 점을 감안하면, 고국의 단결이 그에게 얼마나 소중한 일이었는지를 느낄 수 있다.
좌우합작에 실패하고 돌아간 뒤에도 한시대는 흥사단 활동 등을 통해 교포사회 단결과 민족교육 증진에 이바지했다. 14세 때 아버지와 함께 고국을 떠난 그는 고국의 비참한 현실을 잊지 못해 항상 태평양 건너편에 시선을 고정하고 살았다. 그래서 그가 번 돈들도 그의 시선이 향하는 쪽으로 날아가 고국을 위해 쓰이게 됐다. 그는 고국을 위해 미국 서부에 뛰어든 개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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