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8.10 10:18최종 업데이트 26.08.10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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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글로색슨족의 미국 서부 개척은 총소리와 유혈을 수반했지만, 피땀에 기반한 한국인 한시대(韓始大, 1889~1981)의 서부 개척은 아름답고 숭고했다. 재정적 토대 없이 하와이로 이민 간 그는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주에서 한형제회사와 한가회사 등을 운영하는 중견 기업인으로 성장했다.

하와이대학 한국학센터가 발간한 <1903-1905 호놀룰루 도착 한국인 승객들(Korean Passengers Arriving at Honolulu, 1903-1905)>은 만 14세 된 한시대(Han, Su Tai)가 황해도 해주에서 살다가 홍콩마루호를 타고 1903년 11월 18일 호놀룰루항에 도착했다고 알려준다. 동승자는 39세 된 아버지 한준상이었다. 어머니와 동생 한영대가 도착한 것은 2년 뒤 5월 8일이다.


이 가족이 한꺼번에 이주하지 못한 것은 경제적 이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일은 이 가족이 하와이에서 미 본토로 이주할 때도 되풀이됐다. 이때도 아버지가 먼저 건너가 돈을 모은 다음에 가족들을 나중에 불러들였다.

성공한 사업가이자, 한인 사회의 지도자

독립운동가 한시대 선생
독립운동가 한시대 선생국가보훈부

한시대의 부모들은 교육열이 높았다. 그런데도 한창 공부할 나이인 한시대는 곧바로 학교에 가지 못했다. 한시대가 하와이 한인기숙학교에 입학한 것은 1906년 9월이다. 부인과 작은아들이 정착한 뒤에 큰아들이 정규학교에 들어간 것은 1905년까지는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한준상이 한국에서 갖고 간 돈을 기반으로 그 아들 한시대가 미국에서 사업을 벌인 게 아님을 보여준다.

미국에서 성공한 한국인 부자들을 소개하는 2016년 1월 17일 자 <미주중앙일보> 기사는 한시대의 일생을 요약하는 대목에서 "1903년 부모와 함께 15세에 하와이로 노동 이민을 왔다"라고 한 뒤 "1950년대에 자본금 40만 달러에 달하는 한가기업회사를 설립해서 크게 성공했다"라고 기술한다.

'40만 달러'는 한국 정부의 발행물에도 등장한다. 국가보훈부가 펴낸 <독립유공자공훈록> 제13권 한시대 편은 "1950년대 중반경 약 40만불에 상당하는 한가기업회사를 설립"했다고 말한다.

40만 달러가 자산인지 납입자본금인지 아니면 각종 재산의 평가액인지는 불확실하지만, 이 돈은 오늘날로 치면 10배 이상의 가치를 갖는다. 미국 노동부 노동통계국이 2024년 11월에 발표한 '전체 도시소비자의 장기 소비자물가지수(CPI)'라는 자료에 따르면, 1955년 6월의 CPI는 26.7이었다. 금년 7월 14일 발표된 CPI는 336.07이다. 다른 변수를 배제하고 CPI 변화만 놓고 보면, 1950년대 중반의 40만 달러는 지금의 500만 달러(약 71억 원)에 근접하는 구매력을 갖는다.

1950년대 중반의 40만 달러를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미국의 소기업 자산 규모밖에 되지 않지만, 1950년대 중반에는 그렇지 않았다. 미국 국세청이 발간한 <소득세 통계 1955>에 따르면, 대차대조표를 제출한 74만 6962개의 법인 중에서 총자산이 25만 달러 미만인 기업은 77.8%이고, 50만 달러 미만인 기업은 87.3%였다. 이를 감안하면 한가기업회사는 상위 12.7~22.2%에 드는 기업이었다.

한시대의 부모는 자녀 교육에 신경을 많이 썼다. 한시대는 당시의 재미교포 자녀 중에서는 이례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동생 한영대는 LA에서 의사가 됐다. 이런 요인은 한시대가 한국인 사회에서 리더십을 갖는 데 도움이 됐고, 그는 한국인들과 협력해 26세 때 사탕무 등을 재배하는 농장 사업을 시작했다.

1909년에 창립된 대한인국민회를 기리는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홈페이지는 한시대를 소개하는 코너에서 "1915년 캘리포니아주 맨티카지방에서 한인 60여 명과 함께 1300에이커의 농지를 조차했다"라고 알려준다. 현지의 사회적 약자인 한국인들이 노동력과 자금을 모아 대규모 농장을 건설하는 큰일을 26세의 한국 청년이 주도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사탕무 재배에 주력하던 한시대는 포도농사가 유망해 보이자 주력 업종을 과감하게 바꿨다. 또 농업생산에만 머물지 않고 농업 유통으로도 사업을 확장했다.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은 "항상 대담성을 보였다"고 평한다.

사업을 불려 나간 그는 캘리포니아 중부에서 농업회사인 한형제회사를 운영하고, 남부에서 부동산 임대업체인 한가기업회사를 경영했다. 한가기업회사가 상위 12.7~22.2%에 들었으니, 그는 성공한 재미교포 사업가였다. 그런데 더 대단한 것은 그가 사업 성공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는 가운데서도 14세 때 떠난 고국의 비참한 사정을 잊지 않고 살았다는 점이다.

독립운동 후원에 앞장서고, 해방 후에는 좌우합작운동까지

국가보훈처가 2016년 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한시대 선생
국가보훈처가 2016년 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한시대 선생국가보훈부

한시대가 한국을 떠난 1903년은 일본이 한국 무대의 경쟁자인 러시아를 몰아내기 위해 마지막 일격을 생각하던 시기였다.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 승리를 발판으로 1905년 을사늑약을 성사시켰다. 그는 이 같은 고국의 처지를 마음에 두고 살았을 뿐 아니라 고국을 돕기 위한 구체적 실천에도 나섰다. 그의 이름이 <독립유공자공훈록>에 나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가 대규모 농장사업을 시작한 지 4년 만에 3·1운동이 발생했다. 이때부터 그는 재미교포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후원하는 사람이 됐다. 위 공훈록은 "임시정부를 후원하기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여 송금"했다고 말한다. 그는 사업을 할 때처럼 독립운동 후원을 할 때도 과감했다.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은 "사업과 국권회복운동에서도 항상 대담성을 보였다"고 평한다.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한·중 두 민족의 항일투쟁은 전쟁 단계로 발전했다. 한시대의 기부활동도 이 흐름에 맞춰 전개됐다. 공훈록은 "중일전쟁이 발발한 것을 기회로 항일무장투쟁을 강화하기 위하여 미주 등지에서 산재한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등 6개 단체와 연합하여 한국광복진선(陳線)을 결성하고 진강(鎭江)에 위치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곽단체로서 활동하면서 8년간 적극적으로 임시정부를 후원하였다"고 기술한다.

이런 가운데 그는 대한인국민회 집행위원장, 해외한족대회 부의장,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위원장,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 부위원장 등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재미교포 통합과 독립운동 지원에 헌신했다.

그는 돈뿐 아니라 시간도 얼마든지 고국을 위해 쓸 수 있는 사업가였다. 이 점은 고국 여행이 쉬워진 해방 직후에 증명됐다. 이때 그는 해방 이후의 분열상을 극복하고자 직접 고국에 돌아와 호소 활동을 전개했다.

1945년 11월 4일, 56세 된 한시대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대표단을 이끌고 고국 땅을 밟았다. 그 뒤 그가 중점적으로 전개한 일은 좌우통합운동이다. 국가보훈부가 그를 '2016년 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할 때 배포한 자료에 따르면, 그는 "중립적 입장에서 중간세력들과의 통합운동을 전개해 1946년 9월 15일 천도교 청우당에서 8개 정당 및 단체를 통합한 신진당을 결성"했다. 중간세력의 덩치를 키워 좌우합작을 벌이는 작업이 신진당 결성이라는 성과를 냈던 것이다.

그는 좌우합작을 위해 대중적 홍보활동에도 참여했다. 위 자료는 "한시대는 (1946년) 7월 18일 자와 8월 1일 자 라디오 방송을 통해 좌우합작에 의한 단결만이 목표를 달성하는 유일한 방법이라 역설하고, 이를 성취하기 위해 파당적 논쟁을 버리고 운동의 통합과 정당과 민중 사이의 협동을 재촉하자고 주장하였다"라고 한 뒤 "7월 23일에는 서울 종로의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주최로 대중 강연회를 개최하였다"라고 기술한다.

해방 직후의 좌우대립은 실상은 항일진보진영에 대한 보수세력의 압박이었다. 전부 다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보수진영 상당수가 친일파 혹은 극우세력이었기 때문에, 항일진보진영은 이들과 절대로 타협해서는 안 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런 사정이 있기는 했지만, 미국에서 건너와 민족의 단결을 촉구한 것은 고국에 대한 한시대의 애정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잘나가는 사업가였던 점을 감안하면, 고국의 단결이 그에게 얼마나 소중한 일이었는지를 느낄 수 있다.

좌우합작에 실패하고 돌아간 뒤에도 한시대는 흥사단 활동 등을 통해 교포사회 단결과 민족교육 증진에 이바지했다. 14세 때 아버지와 함께 고국을 떠난 그는 고국의 비참한 현실을 잊지 못해 항상 태평양 건너편에 시선을 고정하고 살았다. 그래서 그가 번 돈들도 그의 시선이 향하는 쪽으로 날아가 고국을 위해 쓰이게 됐다. 그는 고국을 위해 미국 서부에 뛰어든 개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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