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8.10 11:53최종 업데이트 26.08.10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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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겨울, 1군 리그에서의 첫 시즌을 치르고 어김없이 최하위의 성적표를 받아든 신생구단 KT 위즈가 히어로즈의 외야수 유한준과 4년 60억 원의 자유선수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그 해 유한준은 타격 2위(.362)와 최다안타 1위(188개)에 오른 리그 최고의 타자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야구계의 반응은 썰렁했고, 위즈 팬덤의 공기도 떨떠름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2군 생활과 군 복무를 거쳐 9번의 시즌을 소화한 35세의 노장, 그 긴 선수이력 중 단 두 시즌에만 기록한 3할 타율과 두자릿수 홈런. 그 해에 보여준 정상급의 능력을 최소한 4년 동안 꾸준히 보여줄 가능성을 높게 점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반짝 활약 노장의 대형계약

유신고와 동국대를 졸업한 뒤 유한준이 입단한 현대 유니콘스는 그 해의 우승팀이었고, 당연히 어중간한 신인이 비집고 들어갈 만한 빈틈이 없었다. 그 해 단 한 경기도 1군에서 경험하지 못한 채 2군에서 팀의 우승을 지켜본 그는, 비교적 경쟁이 덜 치열한 자리를 찾아 학생 시절 내내 연습해온 내야수를 포기하고 외야수로 전향했다. 하지만 공수 양면에서 리그 최강의 우익수로 꼽히던 심정수의 자리는 견고했고, 조만간 전성기가 끝날 줄 알았던 송지만이 그 뒤로도 10여 년이나 더 활약하며 92학번 최후의 생존자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니콘스의 막내, 위즈의 리더
유니콘스의 막내, 위즈의 리더유한준은 수원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수원에 임시 연고를 두던 시절의 현대 유니콘스를 거쳐 KT 위즈에서 꽃을 피웠다. 당당한 체구와 나쁘지 않은 센스를 가졌지만, 그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은 차분하게 실패를 복기하며 대안을 찾는 차분함과 그 과정을 무한 반복할 수 있는 성실함이었다. 그의 또 하나의 별명이 '무한준'이다.현대 유니콘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무렵부터 급격히 악화된 모기업의 자금 사정 때문에 해마다 주전급 선수들의 유출이 이어진 덕에 2년차가 되던 2005년부터 1군 경기를 경험하기 시작했고, 심정수가 초대형 FA계약을 맺고 삼성으로 이적한 2006년부터는 주전 자리를 잡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기회는 기회고, 기회를 잡을 만큼의 역량이 그에게 있었느냐는 별개의 문제였다. 2006년과 2007년, 각각 110경기 이상을 치르면서 그가 거둔 성적은 2할 초반대의 타율과 3할에 턱걸이하는 출루율에 서너 개씩의 홈런에 불과했다. 특별히 발이 빠른 것도 아닌 외야수가 출루율도 낮고 장타율도 낮다면, 사실 1군 무대에서 오래 보기는 힘들다고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20대 후반에 상무 팀에서 치러낸 2년간의 군복무가 그의 선수 인생에 전환점이 되었다. 매일의 성적에 압박받지 않는 환경 속에서의 안정적인 출장 기회, 그리고 의미 있는 성적들을 통해 얻은 자신감이 그가 원래 가지고 있던 것들을 스스로 발견하게 했다. 공을 따라다니지 않고 자신의 영역을 설정해 기다리는 마음가짐과 여유가 타격자세를 안정시켰고, 안정된 자세가 배트 중심에 맞히는 확률을 높이는 동시에 타구에 힘을 실어주었다.


2년간 상무 팀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그 사이 해체되어버린 현대 유니콘스 대신 히어로즈로 입단해야 했다. 그리고 유니콘스 시절보다 더 헐거워진 선수층 사이에서 한 단계 올라선 그의 존재감도 더욱 선명해졌다. 타율은 안정적인 2할대 후반을 유지했고 장타율과 출루율도 성장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타석에서의 침착함이 갖춰지며 중요한 순간에 인상적인 한 방을 쳐주는 타자로 기억되기 시작한 것이다.

현대에서 상무 거쳐 히어로즈로

그리고 2014년과 2015년, 그의 잠재력이 만개하며 3할대 타율과 20개 이상의 홈런을 곁들인 5할대 장타율을 기록하며 정상급 타자로 올라섰고, 그 성적을 바탕으로 KT 위즈와의 대형 FA 계약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 해 전 수원 출신 역대 최고의 스타 최정이 영입될 거라는 은근한 기대를 품었다가 헛물 켰던 위즈 팬들의 눈높이에는 미치기 어려웠다. 30대 중반에 다가선 나이에 정점을 찍고 거액의 다년 계약을 맺은 뒤 곤두박질쳤던 이들의 모습을, 너무 자주 보아온 때문이기도 했다.

61번 유한준
61번 유한준61번은 박찬호의 등번호지만 KT 팬들은 그 숫자에서 유한준을 먼저 떠올린다. 2010년 6월 1일에 태어난 딸의 생일을 담은 그 번호를 유한준은 2011년부터 달기 시작했다.KT위즈

결국 2015년이 그의 선수인생의 최정점이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4년의 계약기간 내내 그 정점 언저리에서 머물렀고, 추락은 없었다. 2016년부터 2019년까지 그는 거의 전 경기를 소화하며 확실한 3할 타율의 중거리 타자로 활약했고, 동시에 수준급 이상의 수비력으로 외야의 한 자리를 안정적으로 지켜냈다. 그리고 2019년 말 다시 2년간 20억 원 규모의 재계약을 맺는 데도 성공했다.

그리고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는 타고난 재능으로 성공한 선수가 아니었고, 실패를 모르는 선수도 아니었다. 재능이 없지는 않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실패와 재도전을 거치며 찾아낸 좋은 습관들을 체화한 끝에 묻혀있던 재능을 끄집어내 활용했고, 그렇게 비로소 성공에 닿은 선수였다. 그는 감각적으로 풀리지 않는 문제를 분석하고 준비하고 연습함으로써 해결해가는 선수였고, 매일 그런 과정을 실천하고 실증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고 입증했다.

특히 그가 패배와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소화해서 활용할지 아는 선수였다는 점이 중요했다. 도무지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던 패배의 수렁 속에 있던 그 팀의 선수들이, 유한준을 통해 조금씩 승리로 다가가는 길을 찾았고, 또한 그와 함께 조금씩 이기기 시작했다. 특히 2016년, 팀의 주포 장성우와 김상현이 경기장 밖에서 벌인 문제들로 경기장 안에 들어오지 못하던 어수선한 시절에 선수단에 합류한 유한준은 그들의 공백을 차고도 넘치게, 그리고 근본적으로 메우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런 흐름 속에 2018년 강백호와 로하스가 합류하고, 현대 유니콘스 시절의 오랜 동료 황재균이 가세하며 경쟁력 있는 전력이 구축됐고 2021년의 첫 우승도 그 연장선에서 만들어진 사건이었다.

'좋은 선수'를 넘어 '좋은 선배'로

'좋은 선수'를 꼽아보라면, 야구팬이라면 누구나 A4 용지 한 장을 빼곡하게 채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좋은 선배'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선수를 꼽아보라면 열 손가락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좋은 선수'란 선수라면 누구나 목표로 삼게 되는 것이지만 '좋은 선배'는 그렇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좋은 선배'가 된다는 것은 자신에게 별로 남는 것 없는 일이고, 보람 없는 노력이며, 잠재적 경쟁자들을 키우며 영업비밀을 노출하는 위험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일을 하기에 적절한 경험과 성찰을 가진 선수가 기꺼이 좋은 선배의 역할을 맡아주었을 때 KT는 약체에서 강팀으로 올라섰고, 첫 우승의 경험과 그로부터 싹튼 자신들만의 문화와 전통을 가지게 됐다.

팬들은 그래서 유한준을 그저 '의외로 대성공한 FA 영입 사례' 로만 기억하지 않는다. 그는 위즈의 창단을 함께 한 선수는 아니었지만, 그 팀을 프로팀으로 만든 선수로 기억된다.

리더 유한준 2019년 이강철 감독 시대와 함께 유한준 주장 시대가 열렸다. 그리고 KT 위즈가 강팀으로 올라섰고, 우승을 경험했다.
리더 유한준 2019년 이강철 감독 시대와 함께 유한준 주장 시대가 열렸다. 그리고 KT 위즈가 강팀으로 올라섰고, 우승을 경험했다.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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