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과 오스트리아 출신의 부인 프란체스카 도너.
국가기록원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1900~1992)의 이미지는 이순자나 김건희에 비해 나쁘지 않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프란체스카는 오스트리아인이고 지구 반대편에서 영부인 생활을 했다. 그래서 이순자나 김건희처럼 친정 식구들과 함께 뭔가를 도모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이승만 집권기에는 대통령 인척 비리가 생길 여지가 거의 없었다.
서른네 살 때인 1934년 10월 8일, '돌아온 싱글'인 프란체스카는 25세 연상의 동양 유부남과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상대가 유부남이므로 합법적인 결혼은 아니었다. 프란체스카는 한국 쪽에서 보면 이승만의 첩이었다. 그가 정식 부인이 된 것은 한국전쟁 2개월 전이다.
이승만이 사망(1965.7.19)한 뒤에 발행된 1965년 8월 10일 자 <조선일보>는 "1949년 6월 4일 본부인 박승선(91. 생사불명) 여사를 비롯, 호적상 장남으로 되어 있는 이은수 씨 내외 및 그의 손자녀 등 7명을 모조리 호적에서 삭제해버리고 다음해 4월 프란체스카 여사와의 결혼신고를 냈었다"라고 보도했다.
본부인을 두고 결혼했기 때문에 프란체스카는 남편과 남편 가족·친족의 접촉을 매우 경계했다. 이승만 대통령 비서관이었던 박용만(1924~1996) 전 의원의 <제1공화국 경무대 비화>에 따르면, 프란체스카는 대통령 친척을 면회시키지 말라고 비서실에 지시했다. 주오대학·와세다대학에 이어 서울대에서 공부한 박용만이 비서실에서 쫓겨난 것은 '어떻게 그렇게까지 하느냐?'라며 먼 친척을 면회시켰기 때문이다.
프란체스카가 이승만과 이승만 친족을 철저히 차단했기 때문에, 제1공화국 때는 대통령 인척 비리는 물론이고 대통령 친척 비리도 생길 여지가 거의 없었다. 전기환·전경환·전우환 등이 구속된 전두환 집권기의 현상은 이 시기에 나타나지 않았다.
국정의 한 축을 직접 장악
그러나 그렇다고 영부인 리스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프란체스카 리스크는 이순자·김건희 리스크에 뒤지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명확히 능가했다.
프란체스카는 남편의 인사권을 사실상 전횡했다. 일례로, 박용만은 그 일 때문에 중앙청 대통령비서실에서 경무대 비서실로 좌천됐다가 외무부로 쫓겨났다. 이 인사 조처는 영부인이 이기붕 비서실장에게 일방적으로 지시하는 방식, 영부인이 장택상 외무부 장관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형식으로 단행됐다. 이기붕은 꼼짝도 못 한 채 지시를 이행했고, 장택상은 반가운 마음으로 영부인의 일방통행을 받아들였다.
연이은 인사 조처에 분노한 박용만은 이승만을 찾아가 '저를 외무부로 보내셨느냐'라며 항의했다. 타이핑을 하던 이승만은 무슨 소리냐며 어리둥절해하다가, 잠시 뒤 박용만에게 이해를 구했다.
이런 식의 인사 개입은 한둘이 아니었다. 국제적인 뉴스 배급사인 북미신문연맹이 작성하고 1960년 5월 19일 자 <경향신문>에 실린 '12년 폭정을 지배한 두 여인'이라는 기사는 "정부 관리로 임명되는 사람들은 그녀가 그들에게 개인적인 호의를 갖고 있기 때문에 임명되는 수가 많았다"고 지적했다.
프란체스카는 남편의 인사권을 가로채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훨씬 더 나아가 국정의 한 축을 직접 장악했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직능단체 대표들을 묶어 파시스트대평의회를 구성한 뒤 이를 통해 1928년 이후의 이탈리아를 지배했다. 이승만은 사회와 국가를 일체화시키는 그 같은 조합국가 시스템을 차용했다. 남한 단독 총선과 정부수립 과정에서 진보 진영을 제도권 밖으로 몰아낸 이승만은 우파로 구성된 국민회·대한청년단·대한노동조합총연맹·농민조합연맹·대한부인회를 자유당 조직에 포섭하는 방법으로 조합국가 체제를 한국에 정착시켰다.
프란체스카는 집권당과 직능단체들이 일체화된 이 구조 속에서 대한부인회를 맡았다. 1949년 5월 13일 자 <동아일보>는 대한부인회 제1회 전국총회의 임원선임 결과를 보도하면서 "총재 리 푸랜세스카"라고 전했다.
"여성의 대소 단체는 전부 대한부인회에 합류하라"고 명령하는 대통령 담화가 나온 상태에서 영부인이 대한부인회를 이끌었다. 프란체스카는 이승만 정권이 여성들을 통제하고자 만든 단체를 지도했다. 그래서 그는 사실상 '절반의 대통령', '국가 속의 국가를 다스리는 소통령'이었다.
프란체스카의 대한부인회 운영은 '국가 속의 국가'를 연상케 했다. 정부가 설립과 운영 및 자금 지원에 관여한 대한부인회는 정부를 제치고 독자적으로 사실상의 세금을 징수했다. 1950년 2월 26일 자 <조선일보>는 "부인회 회비, 학교 후원회비 등 기외(其外) 허다한 기부 징수는 생활난에 신고(辛苦)하는 국민대중에 정치상 일대 문제"라고 지적했다. 대한부인회의 회비 징수가 국민 생활난을 가중시키는 요인 중 하나라는 보도였다.
'학교 후원회비'라는 말은 특정 학교를 지칭하지 않는다. '부인회 회비'라는 표현은 명확히 대한부인회를 가리켰다. 이렇게 대한부인회 회비를 꼭 집어 지칭한 것은 그 부담이 적지 않은 데다가 사실상 강제적이었기 때문이다. <한국학논총> 2010년 제34집에 실린 양동숙 한서대 강사의 논문 '대한부인회 결성과 활동 연구(1948~50)'는 대한부인회 기부금이 "반공식적인 세금"으로 발전했다고 지적한다.
프란체스카의 대한부인회는 여성 권익 향상을 표방했지만, 이 단체는 실제로는 이승만의 장기 집권을 보조하는 곳이었다. 사실상의 내란인 1952년 비상계엄 선포 뒤에 이 단체가 벌인 일은 이승만의 재선 운동이었다.
그해 7월 17일 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대한부인회는 대한노총·대한청년단·의용소방대·자유당 등과 함께 '제2대 대통령 추대 서울특별시 애국단체 대표자대회'를 열고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했다. 대한부인회는 3선 개헌이 강행된 1954년에도 장기 집권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순자나 김건희 능가한 프란체스카

▲1957년, 경북 영주 부석사를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 부부가 손을 맞잡고 기둥을 껴안으며 즐거워하고 있다.
위키미디어 공용
프란체스카는 대한부인회뿐 아니라 남편도 확실히 장악했다. 그는 이승만이 어떤 말을 듣고 어떤 말을 듣지 말아야 할지도 결정했다. 위 북미신문연맹 기사는 "그녀는 측근자들 및 비서들에게 대통령에게 하는 보고에는 정계의 동향 중에서 불쾌한 진실이나 암울한 사실 등을 넣지 말라고 명령함으로써 연로한 대통령을 실제로 일종의 침묵의 벽 속에 가두어놓고 있었다"고 평했다.
프란체스카는 남편의 건강을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이는 자신의 권력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불쾌하게 하거나 암울하게 만들 만한 보고가 이승만에게 들어가면, 국정에 대한 이승만의 관심도나 관여 수준이 높아질 수 있었다. 이는 프란체스카의 국정 개입을 위축시킬 만한 것이었다.
제1공화국의 투톱은 이승만-이기붕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질적 투톱은 이들의 부인인 프란체스카와 박마리아였다. 북미신문연맹도 이 둘을 '12년 폭정을 지배한 두 여인'으로 지칭했다. 이승만의 등 뒤에서 항상 프란체스카가 움직인 점을 감안하면, 프란체스카 역시 4·19혁명의 원인 제공자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그동안 프란체스카에 대한 평가가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이뤄지지 않은 것은 4·19혁명이 1년 만에 뒤집혔기 때문이다. 이승만에게 향수를 느끼고 이승만기념관을 서울 한복판에 짓고 싶어 하는 세력이 아직도 건재한 것은 이승만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인물들이 1961년부터 한국을 또다시 지배했기 때문이다. 4·19가 허망하게 뒤집히지 않았다면, 프란체스카가 '대한민국 초대 경국지색'이라는 사실이 1960년대부터 널리 인식됐을 것이다.
프란체스카는 이순자나 김건희 못지않게 나라를 기울게 만든 영부인이다. 독자적으로 국정의 한 축을 담당하고 남편의 장기 집권을 도왔다는 점에서는 이순자나 김건희를 능가한다. 프란체스카는 1960년 판 빛의 혁명을 초래한 원흉 중 하나다. 이승만뿐 아니라 프란체스카도 함께 직시해야 제1공화국의 문제점과 모순을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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