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들도 위험이 감지됐을 때 불안을 느낀다.
픽사베이
알 수 없는 세계를 통제하려는 '예기불안'
반려묘 두 마리와 함께하다 첫째 고양이를 먼저 보냈다는 한 내담자는 첫째가 떠난 지 1년이 지났는데도 너무 불안하다며 상담실을 찾았다. 그러고는 이렇게 호소했다.
"선생님! 남겨진 둘째 치로가 말을 할 수 있으면 정말 좋겠어요. 어디가 아픈지, 기분은 어떤지 몰라서 늘 마음이 불안해요. 치로가 밥을 조금만 남겨도 어디 아픈 건 아닌지 걱정돼서 잠을 못 잘 때도 있어요."
이 말에는 반려인들이 느끼는 '예기불안'의 특징이 모두 들어있다. 예기불안은 일어나지 않은 상황을 예측하고 불확실한 것들을 통제해야 한다는 마음에 생겨나는 불안이다.
반려인으로 산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종'과 함께 사는 것이다. 반려동물을 향한 반려인의 사랑은 지극하지만,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반려동물의 마음은 정확히 알 길이 없고 모든 것은 불확실하기만 하다. 게다가 반려인은 반려동물을 대신해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한다.
식사 메뉴부터 산책은 언제 나갈지, 아플 때 어떤 처치를 해야 하는지 등 일상의 대부분을 당사자인 반려동물과 상의 없이 결정해야 한다. 이런 반려인-반려동물 관계의 특수성은 불확실성과 통제에 대한 감각을 더 예민하게 할 수밖에 없다. 그만큼 불안은 커져만 간다.
과거에 반려동물을 상실하거나 반려동물이 크게 아팠던 경험이 있다면, 불안은 더욱 증폭된다. 나 역시 첫 반려견 은이를 떠나보낸 후, 맞이한 라온을 더 예민하게 살피고 있다. 특히, 떠나기 직전 빈혈로 고생했던 은이의 모습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어 수시로 라온이의 혈색을 살핀다. 잇몸이나 귀 안쪽 색이 조금이라도 창백해지면 가슴이 둥둥 뛴다. 일종의 불안반응이다.
이럴 땐 불안이 '현실'이 아닌 '마음속의 일'임을 인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과거와 현재의 반려동물을 분리하고, 지금 곁에 있는 반려동물과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는 것이 도움이 된다. 나는 불안이 엄습할 때 라온이가 신나게 우다다 뛰어 노는 영상과 '이상무'였던 동물병원 검진 자료를 다시 펼쳐보곤 한다.
고양이와 살면서 불안해하던 내담자와도 함께 행복한 순간들을 떠올려봤다. 창가에 앉아서 조용히 그루밍하는 모습, 집에서 일하는데 노트북 옆에 살포시 앉아 바라보던 눈길, 보드라운 털을 기대 와 만져주면 '골골골' 소리를 낼 때. 내담자는 이런 순간들을 묘사했고, 이를 휴대폰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안이 엄습할 때 사진들을 꺼내보며 '불확실한 미래'가 아닌 '평화로운 현재'로 돌아올 수 있었다.
피할 수 없는 실존적 불안
예기불안은 생각을 조절하고 현재에 집중하거나 마음챙김 명상 등으로 옅어지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로 피할 수 없는 불안이 있는데 바로 '실존적 불안'이다. 실존주의 심리학의 중요한 개념인 '실존적 불안'은 인간의 존재 자체가 가지는 불안감이다. 삶의 끝에 죽음이 있음을 인식하면서 무언가를 늘 선택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하는 인간 생존 조건 자체가 불안을 피할 수 없게 한다는 것이다.
특히, 반려인들은 늘 죽음과 맞닿아 있다. 우리가 반려하는 동물들의 수명이 대부분 인간에 비해 턱없이 짧기 때문이다. 개와 고양이는 15년~20년, 반려조로 인기 있는 앵무새의 수명은 7년~20년 정도다. 우리는 이 동물들의 평생을 함께하지만, 동물들은 인간의 삶의 일부분에 함께 머물 뿐이다.
그런데 그 친밀도는 어느 관계보다 강하다. 조건 없는 사랑이 오가고, 감정이 교류되고, 함께 지내는 시간도 웬만한 가족 구성원보다 길다. 반려인으로 살면서 '상실'을 떠올리지 않고 마냥 기쁨으로 충만한 이들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반려동물 에세이들에는 반려동물과의 행복한 순간들이 가득하면서도 동시에 슬픔이 흐른다.
<어린 개가 왔다>를 쓴 소설가 정이현은 반려견과 함께하는 행복을 이렇게 표현했다.
루돌이의 눈과 마주치는 짧은 순간에 나는 살아 있음을 느낀다. 압도적인 기쁨과 어렴풋한 슬픔이 밀려든다. 사랑하는 개를 내가 행복하게 해주고 있다는 것은 압도적인 기쁨의 영역이다. 어렴풋한 슬픔은 이 순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알기에 온다.
고양이, 반려식물, 강아지를 반려하고 있는 저자들이 쓴 <반려인의 하루>에서 정우열도 '세 필자의 글 모두를 관통하는 정서가 상실감'이라며 이렇게 적었다.
셋이 모여 작당을 하거나 편집자가 모종의 지령을 내린 것도 아닌데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나. 그건 반려인으로 살아가는 일이 실은 끊임없이 죽음과 마주하는 과정이라는 현실과 관련 있는 것 같다.
죽음에 대한 감각이 일깨워지고 모순적인 감정을 동시에 간직한 채 살아가는 반려인들에게 실존적 불안은 늘 활성화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중요한 건 이런 불안은 밀어낼 수 없기에 수용하고 감내해 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함께 행복한 것에 집중
▲현재를 즐기는 고양이. 미리 걱정해 불안해지는 반려인의 마음을 평화롭게 해준다.
픽사베이
그렇다면, 이 불안을 어떻게 바라봐야 좀 더 잘 수용해 낼 수 있을까? 정신과 의사 하주원이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는 법>에서 기술한 다음 문장을 기억하기를 추천한다.
불안은 잘해보고 싶다는 마음의 신호다.
생각해 보면 정말 그렇다. 앞서 언급한 반려인들의 댓글도 어떻게든 불안을 끌어안고 반려동물과 오래오래 함께하고픈 노력의 일환이다. 고양이의 작은 신호에도 불안한 내담자나, 라온의 혈색을 매일 살피는 나 역시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크기에 더 불안한 것일 테다.
그러니 불안을 '잘하고 싶은 마음'으로 바꿔 읽어보면 어떨까. 그렇다면 예기불안을 내려놓기도, 실존적 불안을 감내하기도 조금은 덜 힘이 들지 않을까. 더욱이 우리 곁엔 이런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그래서 현재의 평화를 일깨워주는 반려동물이 함께 있지 않은가.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