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1년 4월 6일, 미국 버클리대학에서 열린 한반도 통일전망 심포지움에서의 친북 발언 진의를 조사받기 위해 동부서로 소환되는 박형규 목사의 모습.
연합뉴스
국군보안사령부가 서울제일교회와 박형규 목사를 탄압한 일에 대해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지난 7월 9일 서울고등법원 민사6-2부가 그렇게 선고한 사실이 이달 3일과 4일의 언론보도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보도에 따르면, 서울고법은 보안사 요원들이 서울제일교회 내부의 갈등을 조장하고 예배를 방해하는 것은 물론이고 폭력배까지 동원해 폭행·감금 등을 저지른 것에 대해 대한민국이 교회와 교인 95명에게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박형규 목사는 박정희·전두환 정권의 탄압을 받았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오픈 아카이브> 사이트는 "무려 여섯 번이나 구속되었다"라고 알려준다. 그는 50세 때인 1973년부터 64세 때인 1987년까지 6차례 구속돼 3년 남짓을 감옥에서 보냈다.
박정희를 자극한 박형규 목사와 동료들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 사이트에 따르면, 문익환 목사는 여섯 차례 구속돼 10년 3개월간 구금됐다. 박형규보다 다섯 살 많은 그는 58세 때인 1976년부터 73세 때인 1991년까지 6차례 구속됐다. 늦은 나이에 고생한 점이나 구금 기간이 긴 점을 보면, 문익환에 대한 탄압이 훨씬 강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박형규의 경우에는, 짧은 기간에 여러 가지 구속 사유가 '버라이어티'하게 등장한다. 이는 문익환 사례와 대비되는 부분이다.
문익환 목사는 3·1민주구국선언 사건(1976), 유신헌법 비판성명 사건(1978), 김대중 내란음모사건(1980),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활동 및 서울대 연설 사건(1986), 방북 사건(1989), 분신정국 장례위원장 활동(1991)으로 구속돼 인생의 '늦봄' 시기를 '강추위'로 보냈다.
박형규 목사는 남산 부활절연합예배 사건(1973), 민청학련 지원 혐의(1974), 선교자금 횡령·배임 혐의(1975), 불온삐라 제작 배후 혐의(1976), 3·1민주선언 발표(1978), 6월항쟁 주도(1987) 때문에 구속됐다.
문익환의 경우에는 비교적 묵직한 사건명들이 계속 등장했다. 그에 비해 박형규의 경우에는 선교자금 횡령·배임이라는 파렴치한 죄목도 적용됐다. 이른바 불온유인물을 별 증거도 없이 박형규와 연결시켜 용공분자로 만드는 일도 있었다.
아무리 독재정권일지라도 종교인만큼은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은 박형규를 상당히 함부로 다뤘다. 마땅한 시국사건이 없을 때는 횡령·배임·용공 같은 죄목이라도 뒤집어씌웠다.
1973년부터 1978년까지 박형규는 거의 매년 한번씩 구속됐다. 그 기간 중에 있었던 두 차례의 구속은 그를 파렴치범으로 만들거나 빨갱이로 만드는 것이었다. 얼토당토않은 누명까지 씌우면서 거의 매년 구속시킨 일은 박정희 정권이 그를 얼마나 싫어했는지, 그가 얼마나 시련을 겪었겠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그에 대한 탄압은 상당히 이례적인 편에 속한다.
그런데 서울제일교회와 박형규에 대한 탄압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일본제국주의의 탄압을 연상시키는 측면들이 많다. 일제 때의 집요하고 저급한 기독교 탄압 방식이 박형규 탄압에서도 나타난다.
박형규 목사를 향한 독재정권의 '저급한' 탄압
국권침탈 이듬해인 1911년, 일제는 평안도 기독교인들과 신민회 인사들에게 조선총독 암살모의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별다른 단서도 없이 종교인에게 역모죄를 씌우는 양상은 박형규 사례에서도 나타났다.
박형규와 동료들은 1973년 4월 22일 서울 남산야외음악당에서 열릴 부활절연합예배를 위해 "주여! 어리석은 왕을 불쌍히 여기소서" 같은 플래카드들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의 동료들은 그 플래카드를 게시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검찰은 이 플래카드를 제작한 사실 등을 근거로 사건을 박형규를 '내란음모 책임자'로 몰아세웠다(1973.7.6. <동아일보> 7면).
일제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주기철 평양 산정현교회 목사의 입지를 없앨 목적으로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목사와 장로는 설교하거나 기도할 수 없다'라는 평양노회의 결의를 이끌어냈다. 그런 뒤 주기철을 교회 밖으로 밀어냈다.
국가권력이 특정 목사를 탄압하기 위해 교회 내부에 영향력을 투사하는 방식은 박형규 사건에서도 나타났다. 지난 7월 판결에서 서울고법은 보안사가 박형규를 교회에서 축출하고자 반대파 교인들을 포섭해 교회 내부 갈등을 부추기고 폭력배까지 동원한 사실을 인정했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2022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제7권 '서울제일교회 박◯규 목사와 교인들에 대한 정치적 탄압사건' 편에 그 실상이 자세히 적혀 있다.
이 보고서는 "1984년 9월경부터는 박○규 목사의 활동에 반대하는 교인들에 더해 조직폭력배들까지 동원되어 박○규 목사의 활동에 동조하는 교인들이 교회 건물 안에 감금되거나 박○규 목사가 폭행당하여 병원에 입원하는 등의 폭력 사태가 발생하였다"라고 한 뒤, 그 폭력배 중 하나가 1986년에 대한민국을 시끄럽게 했던 서진룸살롱 사건 당시의 서울 목포파 조직원이었다고 기술한다.
교회에서 밀려난 박형규는 1984년 12월부터 1991년 12월까지 서울 중부경찰서 앞에서 노상예배를 올렸다. 이 때문에 그는 '길 위의 목사'라는 별칭을 얻게 됐다.
일제는 경북 경산의 김선암 장로를 비롯한 평사교회 교인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자, 이들을 신사참배 거부자보다는 반역세력으로 몰기 위해 사건을 조작했다. 이것이 평사교회 새벽기도회 강령 사건이다.
국가보훈부가 발간한 <독립유공자공훈록> 제14권 김선암 편은 "김선암 등이 굴복하지 않자, 일제는 급기야 교회 안에 '조천(早天)기도회 강령'이란 제목하에 '조선독립 만세, 일본 타도, 영·미 만세, 비밀 엄수' 등의 글을 써놓은 뒤 이러한 문구가 교인들에 의해 씌여진 것으로 몰아붙이는 간교한 계책을 동원하였다"고 기술한다. 새벽기도 시간에 하나님에게 한국 독립을 간청하고 영국·미국의 승리를 청원했다는 혐의 등으로 인해 김선암은 1943년 11월 17일 체포돼 1944년 11월 11일까지 구금됐다.
박정희 정권은 박정희를 '어리석은 왕'에 비유하는 플래카드를 준비했던 박형규를 선교자금 횡령범으로 조작하고 불온삐라 배후 인물로 몰아붙였다. 사건을 조작해 종교인에게 엉뚱한 혐의를 씌우는 방식은 김선암 사건을 연상시킨다.
1938년에 일제는 기독교 농촌계몽운동단체인 농우회에 항일운동 혐의를 씌웠다. 이런 방식도 박형규 탄압에서 재현됐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정리하고자 홈페이지에 실은 '1970년대 초 한국기독교 에큐메니칼운동의 성격 변화'라는 글에 이런 대목이 있다.
"1976년부터 빈민선교와 산업선교에 대한 용공시비가 보수적 교계를 넘어 정부와 여당의 주도 아래 확산되었다. 정보기관은 빈민선교를 이끌던 박형규 목사에 대한 '빨갱이 만들기'를 집요하게 시도하였고, 도시산업선교회에 대한 용공시비는 동일방직사건, YH사건 등과 맞물려 정부의 공식적인 특별조사까지 진행되었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을 탄압하고자 이런저런 저급한 방식들을 동원했다. 박정희 정권도 박형규를 탄압하고자 온갖 저급한 아이디어들을 짜냈다. 그러다 보니 일제 때와 비슷한 양상이 박정희 집권기에도 나타나게 됐다. 박형규 탄압에서 일제강점기 방식까지 나타난 것은 어리석은 왕을 바른 길로 이끌고자 했던 박형규의 투쟁이 박정희 정권을 얼마나 많이 자극했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