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8.04 07:09최종 업데이트 26.08.04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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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고 야구부 학생들이 광주일고 학생들을 향해 "스타벅스 가야지" "탱크데이"라고 외친 사실이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10대 학생들이 극우세력·일베발 '혐오'에 물들어가고 있다는 점이 새삼 확인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마이뉴스는 전현직 교사 시민기자들이 필자로 참여하는 <10대 극우화, 해법은 없나> 기획을 통해 '10대 극우화 문제'의 핵심을 짚어내고, 우리 사회와 학교의 변화 방향을 모색해 보고자 합니다.[편집자말]
2025년 3월 29일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너븐숭이 4·3 유적지'에 있는 소설 '순이 삼촌' 문학비를 탐라중학교 학생 등이 탐방하고 있다.
2025년 3월 29일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너븐숭이 4·3 유적지'에 있는 소설 '순이 삼촌' 문학비를 탐라중학교 학생 등이 탐방하고 있다.연합뉴스

10여 년 전 '문학' 수업 시간이었다. 현기영 소설가의 <순이 삼촌>을 가르치던 중이었다. 제주 4·3 당시 학살터였던 '옴팡밭'에서 두 아이를 잃고, 30년 동안 그날의 지옥 같은 기억 속에서 서서히 메말라 죽어간 한 여성의 비극을 담은 소설이다.

수업을 준비하며 아이들과 함께할 다양한 학습 활동을 기획했다. 작가와의 가상 인터뷰를 해보고, 순이 삼촌에게 위로의 편지를 쓰게 했다. 가슴 아픈 역사적 비극을 함께 애도하고, 다시는 이런 참상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교사로서의 소박한 바람이 담긴 수업이었다. 게다가 며칠 뒤면 아이들과 함께 제주 4·3 평화공원으로 수학여행을 떠나 희생자들을 직접 추모할 예정이었기에, 설렘과 기대는 더 컸다.


그런데 갑자기 교실 뒤편에서 한 학생이 거침없는 목소리로 정적을 깨뜨렸다.

"선생님, 빨갱이예요?"

그 찰나의 소리에 어떤 아이는 킥킥대며 웃었고, 어떤 아이는 토끼처럼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으며, 또 어떤 아이는 입술에 손가락을 대며 말조심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너무나 당황스러워 어떤 말도 곧바로 나오지 않았다. 침묵의 대가는 혹독했다. 그날 저녁, 그 아이의 아버지로부터 날 선 민원 전화가 걸려왔다.

"선생님, 역사의식이 편향된 것 같습니다. 소설도 좀 가려가면서 가르치십시오."

<순이 삼촌>은 내가 임의로 가져온 불온한 읽을거리가 아니었다. 국가 교육과정과 교과서 검정 또는 인정 절차를 거쳐 수록된 문학 작품이었다. 교사로서 느낀 무력감과 억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0년 전 교실의 유령, 일상의 유희가 되다

당시에는 한 교사가 감당해야 했던 외로운 수난 정도로 치부되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지금,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역사적 상처를 조롱하고 비하하는 언어들이 일상의 유희처럼 번지고 있다. 특정 역사적 비극을 조잡하게 끌어들여 타인의 아픔을 희화화하는 현상들은 결코 갑작스러운 돌연변이가 아니다. 10년 전, 이미 우리 교실 구석에서 똬리를 틀고 자라나던 그 유령이 몸집을 불려 나타난 것은 아닌지 묻게 된다.

최근 배재고 야구부 일부 학생들이 광주제일고와의 경기에서 5·18 민주화운동을 조롱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응원 구호를 외쳐 논란이 되었다. 학교는 사과했고, 교육청도 사안을 들여다보았다. 이 사건을 특정 학교 학생들의 일탈로만 몰아붙이는 것은 쉽다. 그러나 더 어려운 질문은 따로 있다. 도대체 어떤 언어 환경 속에서 아이들은 학살과 국가폭력의 기억을 '웃기는 밈(meme, 온라인 유행 콘텐츠)'으로 배우게 되었는가.

어떻게 타인의 고통을 조롱하는 말들이 일부 10대들의 자극적인 유희가 되었을까. 역사 왜곡과 혐오 표현에 노출된 아이들 가운데 일부는 이것이 어떤 아픔을 비하하는 표현인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 채, 단지 "재미있어서", "인터넷 밈이라서" 쓴다고 말한다.

이는 참으로 서글픈 고백이다. 많은 경우, 10대들의 혐오 표현은 확고한 이념의 산물이 아니다. 최소한의 역사적 맥락이나 정서적 여과 장치 없이, 그저 '재미있는 놀이'와 '자극적인 소비재'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누군가가 흘린 피눈물을 조롱할 때 오는 짜릿한 반응을 인터넷 밈과 숏폼 영상으로 학습한 결과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정서적 능력을 마비시키는 자극적 디지털 환경이 이 비극을 키우고 있다.

어른들의 적대적 언어가 만든 '혐오의 놀이터'

<순이 삼촌> 표지
<순이 삼촌> 표지창비

그러나 우리는 이 아이들을 온전히 탓할 자격이 있는가. 아이들이 뛰노는 '혐오의 놀이터'를 만들고, 그곳에 가장 파괴적인 언어적 무기를 쥐여준 장본인은 다름 아닌 기성세대다. 특히 정치권과 미디어, 그리고 온라인 공간에서 반복되는 거친 공적 언어는 아이들의 언어 감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국회와 미디어에서 어른들이 서로를 향해 쏟아내는 온갖 멸칭과 조롱은 사이버 레커의 자극적인 가공을 거쳐 10대들의 스마트폰 속으로 실시간 복제된다. 특정 진영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 전체의 공적 언어가 거칠어지고, 상대를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 조롱과 낙인의 대상으로 대하는 문화가 넓게 퍼지고 있다. 어른들의 적대적 정치 문화와 자극적인 미디어 생태계는 아이들의 공감 근육을 약화시킨 중요한 배경 중 하나다.

진영 정치의 언어는 나와 다른 상대를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하거나 침묵시켜야 할 적으로 규정할 때 가장 효율적으로 작동한다. 이 대립적 언어 구조는 고스란히 학교 현장에 스며든다. 대화와 타협이 사라진 자리를 증오와 조롱으로 채운 어른들의 세계는, 교실 안의 아이들이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친구나 교사를 향해 손쉽게 낙인을 찍게 만드는 배경이 된다.

상대를 존중하는 문화가 살아 숨 쉬어야 할 공간에서조차 타인을 흔들어 웃음을 얻고, 조롱을 통해 우위를 확인하려는 아이들의 일탈은 결국 어른들이 보여준 적대적 언어문화의 서글픈 복사판이다.

독일식 '초기 엄정함'과 공교육의 '회복탄력성'

어른들이 방조한 혐오의 밈을 단지 '철없는 장난'이나 '해프닝'으로 묵인해서는 안 되는 엄중한 역사적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독일 형법은 나치식 경례 등 위헌 단체의 상징을 공공연히 사용하는 행위에 대해 3년 이하의 자유형 또는 벌금형을 부과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 독일 사회가 이런 기준을 세운 이유는 분명하다. 사소해 보이는 조롱과 상징의 방치를 통해 혐오가 일상화될 때, 그것이 어떤 역사적 파국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뼈저리게 경험했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은 멀리 있지 않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무사유'가 어떻게 거대한 악을 완성하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미국 반비방연맹(ADL)이 제시한 '혐오의 피라미드' 역시 같은 경고를 담고 있다. 이 모델은 편견 어린 농담과 조롱을 사소한 장난으로 방치할 때, 차별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문화적 토양이 만들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교육적 경고다.

이 피라미드의 연쇄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초기 단계의 단호한 개입'이다. 작은 균열이 거대한 댐을 무너뜨리기 전에, 혐오의 첫 단추부터 엄격하게 멈춰 세워야 한다. 우리 사회 역시 아이들의 조롱과 혐오 표현을 '철없는 장난'이라며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 공동체의 존립을 흔드는 언어적 폭력에 대해서는 학교와 사회가 분명한 기준을 세워야 한다. 혐오에 타협하지 않는 엄정함이 전제될 때, 비로소 아이들이 더 깊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는 울타리가 만들어진다.

다만, 이 엄격함의 목적은 아이들을 사회 밖으로 밀어내는 '단죄'가 아니라, 교실 안에서 성찰을 이끌어내는 '교육적 해결'이어야 한다. 처벌 그 자체가 목적이 되면 아이에게는 낙인만 남고 반성은 사라진다. 혐오 표현이 나왔을 때 학교는 즉시 멈추게 해야 한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서는 안 된다. 그 말이 어떤 역사적 상처를 건드렸는지 배우게 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관련 증언을 함께 읽고, 성찰문을 쓰고, 사과와 회복적 대화의 과정을 마련해야 한다.

진정한 교육적 해결은 혐오 표현이라는 잘못된 행동에는 엄중한 책임을 묻되, 아이가 자신이 저지른 조롱이 누군가에게는 지울 수 없는 학살의 기억임을 철저히 직시하게 만드는 것이다. 스스로 사유하여 부끄러움을 깨닫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회복의 기회'를 주는 것, 그것이 엄정한 기준의 바탕 위에서 공교육이 발휘해야 할 진정한 회복탄력성이다.

조롱의 무기 대신 공감의 온기를 쥐여줄 때

서울의 한 고등학교 교실 모습.
서울의 한 고등학교 교실 모습. wiki commons

아이들의 조롱 섞인 밈에 침묵하는 것은 그들에게 '타인의 고통을 비웃어도 된다'는 도덕적 면죄부를 주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 면죄부를 쥔 아이들이 이끌어갈 미래의 끝에는, 타인의 아픔에 완벽히 무감각해진 차가운 방관자들의 사회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 교육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근본적인 해법을 찾기 위해서는 교육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한 문제 차이로 등급이 갈리고 인생의 출발선이 결정되는 숨 막히는 입시 구조 속에서, 공동체 의식과 민주시민 교육은 늘 공허한 메아리에 그쳤다. 일부 아이들은 시험에 나오지 않는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방식으로 각자도생의 언어를 배운다.

하지만 입시 구조가 바뀌기만을 마냥 기다리며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척박한 교실 안에서도 우리는 아이들에게 암기를 넘어 '사유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내 삶의 맥락으로 데려오는 서사 중심의 역사·인권 교육, 그리고 매일 쏟아지는 알고리즘의 유혹 속에서 혐오의 불순물을 스스로 걸러내는 비판적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공교육의 단단한 제도로 안착시켜야 한다.

10년 전, 거친 고함에 가로막혀 서둘러 덮어야 했던 <순이 삼촌>의 책장을 다시 펼쳐 든다. 그때 나는 침묵했지만, 이제는 아이들에게 분명히 말해야 한다.

"얘들아, 그건 밈이 아니라 누군가의 학살 기억이란다. 웃기 전에, 그 말이 누구의 아픔을 밟고 서 있는지 먼저 생각해 보자."

혐오를 멈추는 힘은 상대를 찌르는 더 날카로운 낙인에서 나오지 않는다. 피 흘리는 타인의 상처를 응시하는 성숙한 눈빛에서 나온다. 이제는 아이들에게 조롱의 무기 대신 공감의 온기를 쥐여줄 때다. 운동장의 철없는 비명 소리가 멈추고, 다시 우리 교실에서 당당하게 순이 삼촌의 아픔을 함께 펼쳐 읽으며 위로의 눈물을 배울 수 있는 그 봄날을 간절히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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