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가 없을 뿐>에서 가구 인테리어 회사 영업직으로 일하는 '개 사원'의 회사 풍경.
이수연, 길벗어린이
늑대 사원은 개 사원이 버릇처럼 심장 쪽으로 주먹을 쥐는 모습에 회사에서 힘들었던 시절을 반추한다. 자신도 심장이 아파 병원에 갔지만 문제 없다는 말을 듣고 온 후, '시간이 느리게 가는 법'을 터득했다고 귀띔한다. 그날 본 나무, 전철 속 수다 등 오늘 스쳐 지나간 풍경과 말을 종이에 써보라는 것. 그럼 순식간에 흘러간 하루가 내 안에 단단히 자리 잡아 오늘을 더 소중히 여길 수 있다는 것.
망망대해 삶, '자기만의 돌'을 지고 살아온 아버지
출근 뒤 감정을 냉동고 속 얼음처럼 얼리며 살아온 개 사원은 비로소 해방감을 누리며 밤의 공원에서 웃는다. 공원 나무와 동상에 간지럼을 태우며 상쾌함을 느낀 순간도 찰나, 그는 신입과 영업을 간 거리에서 본의 아니게 실적을 가로챈다. 후배를 돕다 벌어진 일이지만, 둘 사이는 냉랭해진다.
개 사원은 고립된다. 늑대 사원은 그러다 "어느 순간은 진짜 혼자가 될 거예요." 걱정해주지만, 실적이 곧 자기 증명인 일터에서 주인공도 살아남을 재간이 없다. 잠 못 드는 나날 끝에 개 사원은 실적을 양보하겠다고 밝히지만 후배는 거절하고, 개 사원은 맥이 풀린다. 숫자와 그래프로 가득한 사무실에서 개 사원은 후배의 마음을 가만히 헤아려본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고 감정은 숫자가 아니니까."
- <용기가 없을 뿐>(이수연) 중에서
지친 개 사원은 아버지가 보고 싶다. 이 책을 관통하는 요주의 인물이자, 작가가 이 책을 낸 원동력이기도 한 '아버지'는 또래보다 작고, 중학교에 가기 힘들 만큼 가난한 시절을 거쳐온 캐릭터. 자신을 놀리는 친구들에게 보란듯이 자기 몸집만한 바위를 들고 깊은 강을 건넌 일화를 아들에게 들려주는데, 색채가 압도적이다. 망망대해 같은 우리 삶이 작가 손끝에서 무한한 가능성처럼 펼쳐진다.
개 사원은 돌을 나르는 어린 시절의 아버지를 문득 독자 앞에 소환시킨다. 강을 건너는 일이 "무섭지 않았어?" 묻자, 아버지는 "무서웠어" 답한다. 그로부터 아버지는 일을 하고, 사랑을 하고, 자식을 낳아 생의 곡절을 버텨온 것인데, 그 많은 걸 어떻게 해냈냐는 아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피하지 말라고, 너의 돌을 들고 네 걸음으로 걸으라고. 그럼 너의 강을 무사히 건너게 될 거라고.
스펙보다 천하무적은 외롭다고 말할 줄 아는 '용기'
인생의 숙제 앞에서 우리는 자주 얼음이 된다. 불안을 감추려 요지부동 자세로 하루를 버티기도 한다. 익숙히 그 고통을 앓아온 개 사원은 이제 자기 안의 불안을 직면하기로 한다. 아코디언을 연습하며 고된 노동에도 "시들지 않는 풀"처럼 살고자 했던 아버지의 꾸준함이 얼마나 큰 용기에서 비롯됐는지 절감한다. 인생에서 '호기심'만큼은 놓지 않으려 한 어른의 눈빛을 심장에 새긴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던 날, 성당에 갔던 필자처럼 스스로를 지키는 소소한 루틴이 누구에게나 있다. 개 사원과 늑대 사원이 회사를 벗어나 나무가 울창한 공원에서 산책하며 숨구멍을 나눈 것처럼. 그러나 이 책에 나오는 더 큰 해방구는 개 사원이 탄 전철 장면에 있다. 택배 일을 하는 한 청년이 수레를 끌고 지하철에 타는데, 혼잣말을 하다가 외치는 두 마디가 독자의 폐부를 찌른다.
"사람하고 말하는 게 진짜 좋아요. 너무 외로워요!"
- <용기가 없을 뿐>(이수연) 중에서
그날 개 사원은 처음 본다.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모든 사람 앞에서 크게 외치는 사람을. 그것은 진실함의 또 다른 얼굴이었기에, 파도처럼 밀려오는 공감에 개 사원은 울고 만다. 살아생전 큰 수술을 받고 집에 들렀던 아버지가 건네신 말씀이 어른거리며 포개진다. "내가 다시 이 집에 올 수 있을까?" "개야. 아버지, 외롭다. 무섭다."
▲<용기가 없을 뿐>에서 아버지가 개 사원에게 무섭고 외롭다며 용기내 말한 뒤 손을 맞잡는 장면
이수연, 길벗어린이
아버지는 용감했다. 자기 안의 나약함을 인정할 줄 알았으니까. 무거운 돌을 들고 삶을 헤쳐 온 것처럼, 병상에서의 불안 또한 아들에게 씩씩하게 펼쳐 보였으니까. 이윽고 우리는 퇴근길 위에서 본다. 그 꾸준한 삶과 용기를 놓지 않으려 천변에서 이따금 색소폰을 부르고, 기타를 치고, 하루를 단련하는 보통 어른들을. 에어로빅을 하며 태풍 같은 인생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세련됨을.
살다 보면, 어른들은 어떻게 그 힘든 시절을 몽땅 통과했을까 싶어질 때가 있다. <용기가 없을 뿐>은 그 비결이 열심히 사는 게 아니라, 누군가와 진심을 나누는 일에 있음을 일깨운다. 그리하여 이 책은 후반부에서 제목에서 '해방'된다. 더 이상 개 사원은 용기가 없지 않다. 부끄러움을 처음 인정하고 동료에게 털어놓는다. 타인에게 "허무맹랑한 희망"을 품기로 마음먹자 불면이 사라진다.
잠잠히 죄어오는 매일의 노동 속에서, 주인공은 이제 더 이상 무언가를 쉽게 싫어하지 않겠다. 진절머리 대신, 정신머리를 다독이며 그는 기다릴 것이다. 언제고 맞잡을 서로의 외로움을, 그렇게 생겨나는 희망을. 안 괜찮지만 괜찮아지고 싶어 숨을 고르는, 위태롭고 평범한 사람들 머리맡에 이 책을 두고 싶다. 우리의 아침이 어쩌면, 조금 더 숨 쉴 만할지도 모르니까.
용기가 없을 뿐
이수연 (지은이), 길벗어린이(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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