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30일부터 발효되는 미국 국방부(DoD) NDAA 제1260H조 '중국 군사기업(CMCs)' 리스트. 알리바바, 바이두, BYD, 텐센트, 유니트리, 창신메모리, 양쯔메모리, DJI 등 AI, 피지컬AI 등 65개사가 신규 추가되어 국방부 조달 금지 및 투자 주의 등의 제재가 이루어진다.
미국방부자료
흥미로운 점은 미국 역시 거의 같은 시기에 중국 AI 모델을 향해 비슷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미국이 주목하는 대상은 보안 백도어가 아니라 증류(Distillation) 입니다. 증류는 성능이 뛰어난 대규모 AI 모델의 출력 결과를 활용해 상대적으로 작은 모델을 학습시키는 기술입니다. 연구 목적으로는 활용되는 기법이지만 원저작자의 허가 없이 상용 모델의 응답을 대량 수집해 새로운 모델을 학습시킬 경우 지식재산권 침해 논란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미국 AI 기업들은 바로 이 지점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문제를 제기한 곳은 OpenAI였습니다. 올해 초 OpenAI는 Microsoft와 함께 일부 계정이 ChatGPT API를 비정상적으로 대량 호출한 정황을 확인했다고 밝혔습니다. OpenAI는 특정 중국 조직이 ChatGPT의 출력 결과를 대규모로 수집해 모델 학습에 활용했을 가능성을 제기했고, 이 과정에서 일부 계정을 차단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당시 업계에서는 이러한 의혹의 주요 대상으로 DeepSeek가 거론됐습니다. 다만 OpenAI는 DeepSeek를 상대로 불법 행위를 공식적으로 입증했다고 발표한 것은 아닙니다. OpenAI가 사용한 표현 역시 "부적절한 사용(Inappropriate Use)"과 "증류 가능성(Possible Distillation)"이었습니다. 즉, 기술적 정황에 근거한 의혹 제기였으며, 법적 판단이 내려진 사안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올해 들어 논의는 한층 확대됐습니다. Anthropic은 미국 정부와 의회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DeepSeek뿐 아니라 Moonshot AI, MiniMax 등 일부 중국 AI 기업이 Claude의 출력 결과를 대규모로 수집해 모델 성능 개선에 활용했을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Anthropic은 수만 개의 가상 계정과 프록시 서버를 활용한 대량 API 호출 패턴, 비정상적인 요청 빈도, 접속 방식 등을 근거로 이러한 활동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주장했습니다.
지난 6월에는 Reuters가 입수한 Anthropic의 서한을 통해 알리바바까지 추가로 거론되면서 논란은 더욱 커졌습니다. Anthropic은 알리바바가 Claude의 능력을 추출하려는 대규모 시도를 했다고 주장했지만 알리바바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현재까지 미국 정부나 법원이 특정 중국 기업의 불법 증류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거나 확정한 사례는 없다는 것입니다. DeepSeek, Moonshot AI, MiniMax 등 관련 기업들은 이러한 의혹을 부인하거나 구체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으며 상당수 사안은 여전히 사실관계가 확인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최근 미국 정부가 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분명히 달라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기업 간 지식재산권 분쟁으로 여겨졌던 문제가 이제는 국가 경쟁력과 국가안보의 문제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미국 재무장관 스콧 베선트는 최근 공개 발언에서 "미국의 지식재산을 활용해 개발된 AI 모델이 확인될 경우 제재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는 증류 논란이 더 이상 개별 기업의 분쟁을 넘어 국가 정책의 영역으로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신호입니다.
AI 모델에도 국적이 생기기 시작했다
중국이 Claude Code를 국가안보 위험으로 규정한 것과 미국이 중국 오픈웨이트 모델을 경계하기 시작한 것은 서로 다른 사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거리를 두고 보면 두 나라 모두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상대국이 만든 AI를 신뢰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이야말로 오늘날 AI 지정학의 출발점입니다.
과거 인터넷 시대에는 운영체제나 통신장비가 안보의 대상이었습니다. 화웨이의 5G 장비를 둘러싼 논쟁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당시 미국은 네트워크 장비에 잠재적인 보안 위험이 존재할 수 있다는 이유로 동맹국들에게 화웨이 장비 사용을 재고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지금 그 논리는 AI 모델로 그대로 옮겨오고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이번에는 하드웨어가 아니라 AI 모델 자체가 국가안보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Kimi K3가 바꿔놓은 워싱턴의 분위기
이러한 변화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계기는 지난 7월 문샷AI가 공개한 Kimi K3였습니다. Kimi K3는 단순히 성능이 뛰어난 모델이 아니었습니다. 미국 AI 업계가 긴장한 이유는 성능과 가격, 그리고 개방성(Open-weight)을 동시에 갖췄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대중국 AI 규제는 단발성 조치가 아니라 단계적으로 강화되어 왔습니다. 2025년 1월 미국 상무부는 중국 AI 기업 즈푸AI(Zhipu AI)를 수출통제 대상인 엔터티 리스트(Entity List)에 포함시키며 접근을 제한했습니다.
이어 2026년에는 DeepSeek와 일부 중국 AI 기업에 대한 추가 제재 방안이 검토됐으며, 미국 정부는 중국 오픈웨이트 모델이 미국의 지식재산을 무단 활용했을 가능성과 국가안보에 미칠 영향을 본격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최근에는 중국 AI 모델의 확산 자체를 전략적 위험으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워싱턴에서 점차 강화되고 있습니다.
그동안 미국 빅테크는 폐쇄형(Closed-weight) 모델을 중심으로 시장을 주도해 왔습니다. 그러나 중국 기업들은 오픈웨이트 전략을 선택했습니다. 모델 가중치를 공개하거나 기업이 자유롭게 배포할 수 있도록 하면서도 뛰어난 성능과 낮은 추론 비용을 제공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기술 경쟁이 아니라 생태계 경쟁이었습니다. 모델이 저렴해질수록 더 많은 스타트업과 기업이 해당 모델을 채택하게 되고, 개발자 커뮤니티 역시 자연스럽게 그 생태계 안으로 편입됩니다. AI 시대의 운영체제는 더 이상 Windows나 Android가 아니라 LLM 자체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이 미국에서도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미국 언론은 Cursor 개발사인 Anysphere, Coinbase, Airbnb 등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중국 오픈웨이트 모델을 일부 업무에 활용하기 시작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들 기업이 중국 모델만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비용 대비 성능을 이유로 중국 모델을 평가 대상으로 올려놓았다는 사실 자체가 미국 정책 당국에는 새로운 경고 신호였습니다.
미국 정부가 이들 기업에 중국 모델 사용을 공식적으로 금지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워싱턴에서 "중국 오픈웨이트 모델이 미국 산업 현장으로 빠르게 확산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키우는 계기가 됐습니다.
미국이 두려워하는 것은 확산의 속도
많은 사람들은 미국이 중국 AI 모델의 성능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보다 정확히 말하면 미국이 우려하는 것은 확산 속도입니다. 반도체는 수출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GPU는 국가별로 판매를 제한할 수 있고, 첨단 장비 역시 수출 허가를 통해 관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픈웨이트 모델은 다릅니다.
한 번 공개된 모델은 전 세계 개발자들이 내려받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스타트업은 별도의 막대한 개발비 없이도 이를 기반으로 서비스를 만들 수 있습니다. 비용이 낮고 성능이 우수하다면 시장은 국적보다 효율을 선택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것이 미국이 최근 오픈웨이트 모델을 국가안보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한 이유입니다.
미국 행정부와 의회가 검토하는 정책 역시 이러한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습니다. 중국 AI 기업에 대한 엔터티 리스트 확대, 미국 클라우드 기업의 책임 강화, 미국 기술의 불법 활용 여부 조사 등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러한 정책 논의는 단순히 특정 기업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AI 생태계의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중국 역시 미국과 거의 동일한 논리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미국은 중국 AI 모델이 미국의 지식재산과 연구 성과를 무단 활용했을 가능성을 문제 삼습니다. 반면 중국은 미국 AI 개발도구가 중국의 데이터와 개발 환경을 외부로 유출할 위험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한쪽은 지식재산(IP)을 이야기하고, 다른 한쪽은 데이터 주권(Data Sovereignty)을 이야기합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논리 구조는 동일합니다. 상대국 AI를 국가안보 위험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앞으로 더욱 확대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향후에는 AI 모델에 대한 국가별 보안 인증이 등장할 수도 있고, 공공기관에서는 특정 국가 모델만 사용하도록 권고하는 정책이 나올 가능성도 있습니다. 글로벌 기업 역시 단순히 성능이 아니라 모델의 출신 국가와 규제 환경을 함께 고려해야 하는 시대를 맞이할 것입니다.
AI는 기술이 아니라 외교 안보의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반도체 공급망이 지정학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것처럼, 이제는 AI 모델과 AI 개발도구, 데이터, 학습 방식까지 국가 전략의 일부가 되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 Claude Code 논란과 증류 논쟁은 단순한 기업 간 분쟁이 아니라 AI 주권(AI Sovereignty)이라는 새로운 국제 질서가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AI 경쟁을 반도체 경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물론 반도체는 앞으로도 핵심 경쟁력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앞으로의 경쟁은 모델, 데이터, 오픈소스 생태계, AI 보안, AI 신뢰성을 모두 포함하는 종합 경쟁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 역시 단순히 어느 국가의 AI를 사용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수준을 넘어, 어떤 AI 생태계를 구축하고 어떤 신뢰 체계를 만들 것인지에 대한 전략적 논의가 필요합니다.
반도체는 AI 시대의 엔진입니다. 그러나 엔진만으로 자동차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제 세계는 엔진 위에서 작동하는 거대언어모델과 AI 생태계를 둘러싼 새로운 경쟁에 들어섰습니다. 그 경쟁의 본질은 단순한 벤치마크 비교나 누가 더 가성비 있는 AI를 만들었는가가 아닙니다. 누구의 AI를 신뢰할 것인가. 세계 AI 패권 경쟁은 이제 그 새로운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