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7.22 13:52ㅣ최종 업데이트 26.07.22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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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로 만든 이미지제미나이

지방의 한 소도시. 김수진씨(가명, 57세)가 위탁으로 돌보는 막내 아들을 만난 때는 2018년 1월이었다. 생후 한 달이 조금 넘은 갓난아이였다. 생모는 병원에서 아이를 낳고 사라졌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아이를 낳은 사실조차 가족들에게 숨겼다.

동사무소 직원들이 수차례 찾아가 문을 두드렸지만 생모는 끝내 모른 척했다. 그러는 사이 아이는 중환자실 침대 위에 홀로 남겨져 있었다. 뇌출혈, 심장 중격 결손, 선천성 폐 기형에 탈장까지.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네 가지 병을 안고 세상에 던져졌다.


아픈 아이를 입양하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그럴 사람이 없는데 입양기관이 나설 수도 없었다. 멀쩡히 생모가 살아 있는데 법적 처리까지는 시간이 걸렸고 병원에서는 퇴원을 종용했다. 동사무소 직원이 입양 부모들 단체 카톡방에 사연을 올렸다.

"한 달 만이라도 맡아줄 분이 필요합니다."

갓 태어난 아이의 딱한 사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생자와 입양한 둘째까지 있던 김씨가 처음 아이 방을 들어갔을 때의 광경을 이렇게 떠올렸다.

"(아이가) 개와 같은 방에서 지냈어요. 오물도 치워지지 않은 방에서 아이가 포대기도 없이 허공에 팔을 휘두르고 있었어요. 이대로 두면 큰일 나겠다 싶었죠."

임시보호서류 한 장. 그것이 그 아이와의 시작이었다.

네 가지 병을 안고 수진씨 집으로 찾아온 갓난아이

동사무소 직원이 약속한 한 달이 지났다. 아이는 보육원으로 옮겨졌다. 김씨는 안도했다. 그런데 보육원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아이에게 폐 수술이 필요한데 간병인을 구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신생아 간병은 다들 기피하고 있었다. 밤새 울고 보채는 아이를 24시간 돌봐야 하는 일이었다. 더구나 수술한 신생아는 쉼 없이 먹이고 안아줘야 했다. 이번에도 김씨가 손을 들었다. 수술이 끝나면 그걸로 아이와의 인연도 끝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보육원 사정이 또 바뀌었다. 더 위급한 아기가 새로 들어와 그 아이를 돌봐 줄 여력이 없다고 했다. 끊길 줄 알았던 인연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이를 위탁 받기로 했다. 교육을 받고 서류를 내고 심사를 통과했다. 아이가 보육원에서 보낸 7개월이 지나고 정식 위탁으로 아이를 데려왔다.

집에는 남편과 낳은 첫째, 입양한 둘째에 이어 위탁으로 들어온 막내까지 다섯 식구가 북적거렸다. 남편은 발전소 엔지니어로 일했고 김씨는 학교에서 파트타임 미술강사를 했다. 두 사람 모두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안 하려고 했는데 이게 계속 이렇게 아이랑 인연이 자꾸 되는 거잖아요. 이게 인연인가 보다, 신랑도 너무 아기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냥 또 인연이구나 이러면서 하게 된 거예요."

한달 위탁이 8년으로

초등학생이 되자 아이는 가끔 묻기 시작했다. '엄마, 나 어디서 데려왔어?'
▲초등학생이 되자 아이는 가끔 묻기 시작했다. '엄마, 나 어디서 데려왔어?'Unsplash

동사무소 직원이 약속했던 한 달이 8년이 됐다. 아이는 지금 초등학생이다. 심장 구멍은 자연적으로 봉합됐다. 폐 기형은 여전히 지켜보는 중이다. 기형 폐를 잘라내야 한다는 학계 의견과 문제 없으면 그대로 두어도 된다는 의견이 지금도 팽팽하다. 1년에 한 번씩 대학병원을 찾아 경과를 확인한다.

그 외 건강 상태는 양호하다. 아이는 잘 크고 있다. 그 사실 하나가 이 가정을 버티게 하는 힘이다. 아이를 처음 봤을 때 '개와 같은 방에서 포대기도 없이 팔을 휘두르던' 아기가 스스로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간다. 그 광경을 볼 때마다 김씨는 이 인연을 거부하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몇 년 전에는 아이에게 잠복고환 수술이 필요하다는 진단이 나왔다. 전신마취가 필요한 수술이었다. 의료법은 친권자의 동의를 요구했다. 생모는 행방불명이었다. 국가도 지자체도 답을 내놓지 못했다.

수술비는 김씨가 먼저 결제했다. 80만 원이 넘는 금액이었다. 나중에 서류를 갖춰 약 80%를 돌려 받았다. 그 서류를 떼는 것도 쉽지 않았다. 병원 창구에서는 친권자 위임장을 가져오라고 했다. 위탁부모는 법적으로 아이와 남이었다.

담당자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또 설명했다. 지방 소도시에서 대도시 대학병원을 오가는 교통비도 지원이 없었다. 병원 대기시간만 한두 시간이었다. 하루를 온전히 내주어야 가능했던 모든 비용은 고스란히 가정에서 감당했다.

통장 문제는 더 황당했다. 아이 앞으로 나오는 생계비는 이사 하기 전 지역에서 개설된 은행 계좌로만 지급됐다. 그 은행이 이 작은 소도시에는 없었다. 통장 명의를 바꾸려 해도 친권이 없어 불가능했다. 결국 친정 어머니가 매달 차로 한 시간 거리의 인근 도시로 나가 현금을 인출한 뒤 딸에게 송금하는 방식으로 수년을 버텼다.

"생계비를 (아이 양육비로) 우리가 쓰는데 우리가 편한 은행으로 바꿀 수 있는 권리가 없더라고요."

이 나라에서 위탁가정으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현실과 동 떨어진 법이 허락한 범위 안에서만 부모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수술 동의서 한 장에 막히고, 통장 하나를 바꾸지 못해 한 시간을 이동해야 하고, 진료 기록 한 장도 창구에서 거절 당한다. 그걸 해결하기 위해 위탁 부모는 법에 호소하고 발품을 팔고 쏟아지는 눈물로 토로한다.

이 나라에서 위탁가정으로 아이를 키운다는 것

김씨는 3년 전 법원 재판을 통해 미성년자 후견인 자격을 얻었다. 행방불명인 생모의 친권 상실 절차도 함께 진행했다. 두 가지를 동시에 해야 후견인 자격이 인정된다는 것도 그 때 알았다. 위탁가정 지원센터가 법률 연결을 도와 별도의 비용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 절차를 혼자 알아서 밟는 위탁부모는 많지 않다.

"이런 상황에 어떻게 재판까지 하겠어요. 보통 까다로운 일도 아니고 게다가 위탁의 원래 목표는 원가정 복귀잖아요. 그러니 친권을 없애는 것 자체가 어렵죠."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면서 또 다른 벽이 나타났다. 아이의 성이 가족과 달랐다. 전교생 20명 남짓의 작은 학교였다. 교장 선생님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출석부와 호칭만큼은 가족의 성으로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담임이 바뀔 때마다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같은 설명을 반복해야 한다. 그 설명을 하는 것 자체가 아이 신분을 노출하는 일이다.

아이 스스로도 알아채기 시작했다. 병원 대기실 전광판에 뜨는 자신의 이름이 형 누나와 다른 성이라는 것을 알았다. 초등학생이 되자 아이는 가끔 묻기 시작했다. '엄마, 나 어디서 데려왔어?'

"아무래도 그 안에 상처가 있겠죠. 근데 아직 애기라서 그게 뭐 어떤 반응이나 이런 걸로 나오지는 않는데...느껴요. 힘들어 속상해 하는구나 이런 거."

김씨는 아이가 상처 받지 않도록 꾸준히 심리상담을 병행해왔다. 위탁 아동을 위한 별도의 심리 지원 예산은 없었다. 입양 아동 지원 항목으로 신청했다. 그게 허용된다는 것도 직접 알아봐야만 알 수 있었다.

성본 변경 역시 후견인 자격을 얻은 뒤에도 또 한 번의 재판이 필요했다. 몇 달 전에야 비로소 아이와 가족의 성이 같아질 수 있었다.

김씨 가정에 지급되는 위탁지원금은 생계급여와 주거급여를 합쳐 현재 월 92만 원 남짓이다. 지난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주거 급여는 약 13만 원 생계급여는 약 10만 원이 올랐다. 물가 상승을 고려하면 실질 지원 수준은 오히려 낮아진 셈이다.

여기에 대도시 대학병원 교통비, 비급여 수술비, 심리 상담비는 포함되지 않는다. 장난감 하나에도 십수만 원이 드는 육아 비용은 말할 것도 없다. 부부가 맞벌이를 하지 않았다면 버티기 어려웠을 숫자다.

그런데 이 생계비조차 원래 위탁 부모에게 지급되는 돈이 아니다. 위탁 아동 명의로 나오는 수급비를 위탁 부모가 사용하도록 허용하는 구조다. 별도의 위탁비용은 지자체마다 다르다. 이 가정에 국가가 아이를 맡긴 대가는 월 92만 원이다.

"이렇게 하니까 위탁을 안 하는 거다. 딱 생각하죠. 누가 하겠어요? 아픈 아이들은 그러면 누가 위탁을 하냐고요."

이제 사나죽으나 내 새끼가 된 막내에 대한 입양절차를 밟으려 했다. 그런데 지자체 담당자가 말렸다. '지금은 (두 분이) 건강하시지만 아이가 대학 갈 나이쯤엔 부모님 상황을 모르지 않느냐. 지원 혜택이 없어질 수 있다.'

남편은 1960년대 후반생이다. 퇴직이 임박했다.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아이가 18세가 되면 받을 수 있는 자립지원금, 대학 진학 지원, LH 임대아파트 제공에 25세까지 받을 수 있는 월 50만 원 생활비 지원까지 그 모든 혜택들이 입양으로 소멸 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아이를 온전히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싶지만 그 선택이 오히려 아이에게 불이익이 될 수 있다는 역설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일부러 위탁 자격을 유지하고 있다.

"아이가 나중에 왜 동거인으로 돼 있는지, 내가 뭐라고 해야 될지 머리가 혼란스럽죠. 당연히 입양을 하고 싶죠. 만약에 입양을 해도 똑같이 지원이 된다면 말할 필요도 없이 입양을 선택하겠죠."

아이의 법적 지위를 위해 입양을 원하지만 아이의 생활 보장을 위해 입양을 못하는 구조. 이 가정이 서 있는 자리가 그렇다. 제도가 만들어낸 역설이다.

이렇게 하니까 위탁을 안 하는 거다

언덕 능선에 선 아이. 자료사진.
▲언덕 능선에 선 아이. 자료사진.연합=OGQ

2025년 기준 국내 가정위탁 보호 아동은 약 9300여 명이다. 그 중 대부분은 조부모나 친인척 위주의 혈연위탁가정이다. 현행 제도상 혈연관계가 없는 일반 위탁가정은 전체의 10% 수준인 800여 세대에 불과하고, 이 아이처럼 아픈 영아를 돌볼 전문 위탁가정은 전국에 300여 곳밖에 없는 척박한 현실이다. 그마저도 서울과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 김씨의 막내가 김씨를 만나지 못했다면 틀림없이 시설에 살았다.

한국의 위탁가정 보호율이 낮은 이유를 국가는 '위탁가정 부족'으로 설명한다. 이건 이유가 아니라 현상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이를 돌보고 있는 위탁 가정들이 어떤 현실을 버티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없다. 행정 절차의 벽 앞에서 위탁 부모가 좌절해야 하고 제도의 틈새를 위탁부모가 직접 찾아내야 한다.

위탁 아동에 대한 심리 지원 예산, 의료비 선결제 없는 처리 시스템, 통장 명의 변경 간소화, 위탁 부모의 법적 권한 강화가 왜 필요한지는 묻지 않는다. 묻지 않으니 바뀌는 것도 없다. 위탁이 필요한 아이들은 그 제도의 빈틈 안에 웅크리고 있다.

행정이 요구하는 서류를 갖추고, 법원을 오가며 재판을 받고, 매달 친정 어머니에게 통장 심부름을 부탁하는 한 편 병원 창구에서 설명을 반복하며 아이를 키웠다. 그렇게 8년을 버티는 사이 아이가 초등학생이 됐다.

아이가 성인이 되면 입양을 할 거라는 김수진씨는 오늘도 그 소도시에서 막내아들의 내일을 준비하고 있다. 아이는 요즘도 가끔 묻는다고 했다.

"엄마 나 어디서 왔어?"

아이가 했다는 질문에 김씨가 어떤 대답을 해주었는지 나는 묻지 않았다. 아이가 어디에서 왔는지가 왜 중요한지는 이제 국가가 해주어야 할 대답이었다.
덧붙이는 글 김수진(가명)씨와의 인터뷰는 2026년 4월 10일 오후 전화로 한 시간 정도 진행됐다. 본인 요청으로 이름과 지역명은 모두 가명 및 익명 처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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