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8일 고이즈미 신지로 일본 방위상이 28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연병장에서 열린 의장행사에 참석하며 경례하고 있다.
연합뉴스
고이즈미 신지로 일본 방위대신이 핵정책에 관한 중대 발언을 남겼다. 18일 자 <교도통신>에 따르면, 17일 인터넷 방송 '사쿠라이 요시코의 겐론(言論) 텔레비'에 출연한 그는 "일본으로서는 논의하기 곤란한 과제이지만, 다루지 않을 수 없는 한가지는 핵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프랑스가 핵 역량을 강화하고 핀란드가 핵무기 반입에 관한 제한을 완화한 사례들을 거론하면서, 일본도 모든 정책을 금기 없이 논의해야 한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대담에 참여한 언론인인 사쿠라이 요시코는 "자민당의 안전보장조사회가 논의하려고 하지 않는 핵에 대해 제언해야 한다"라는 고이즈미의 발언을 <겐론 텔레비> 홈페이지에 별도로 적었다. 자민당의 기존 입장에 구애됨 없이 핵문제에 관한 새로운 틀을 만들고자 하는 일본 방위성의 의욕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방위성 홈페이지에 실린 작년 12월 19일 자 방위대신 기자회견에 따르면, 그날 고이즈미는 '핵을 갖지도 만들지도 반입하지도 않겠다'라는 비핵 3원칙을 인정하면서도, 부득이한 경우에는 예외를 인정해야 할 필요성을 언급했다.
그날 발언의 요지는 '긴급사태가 발생해 핵의 일시적 반입을 인정하지 않고는 일본의 안전을 지킬 수 없는 경우에는 정권이 명운을 걸고 국민들에게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핵을 탑재한 미군 함정이 비상시에 일시적으로라도 일본에 들어오게 할 필요성이 있다는 이 발언은 비핵 3원칙을 흔드는 것이었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도 지속적으로 운을 띄우고 있다. 지난 6일 참의원 결산위원회에 출석한 그는 극우정당이자 공동여당인 일본유신회의 마쓰자와 시게후미 의원이 비핵 3원칙의 개정 필요성을 거론하자 "모든 과제에 대해 확실히 논의의 장에 올릴 것"이라고 답했다.
한미 NCG가 출범하자 바뀐 일본의 태도
2023년에 출범한 한미 핵협의그룹(NCG) 시스템하에서 한국은 핵문제와 관련해 미국과 공동기획을 할 수 있게 됐다. 2010년에 출범한 미일 확장억제대화(EDD) 시스템은 핵태세·핵정책 및 지역안보를 놓고 일본이 미국과 협의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미국의 핵정책에 관여하는 제도적 측면에서 보면 한국(공동기획)이 일본(협의)보다 앞서 있다고 볼 수 있다.
미일 EDD가 등장한 해에 한미는 확장억제정책위원회(EDPC)를 출범시켰다. EDPC하에서 한국은 대북관계에 초점을 맞춘 핵문제와 관련해 미국과 논의할 수 있게 됐다. 그렇지만 미일 EDD에 비하면 한국의 권한은 약한 편이었다. 2023년 NCG는 이것을 한국이 앞서 나가는 상황으로 바꾸었다.
그런데 일본 방위대신의 희망사항처럼 핵무기를 탑재한 미군 함정의 일시 기항이 허용되면 이야기가 또다시 달라질 수 있다. 핵정책을 놓고 일본과 미국의 연계가 한층 강화되는 현상이 출현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한국 쪽의 마음이 급해질 수도 있다.
제주평화연구원(JPI)이 발간하는 <JPI 피스넷> 2023년 7월호에 실린 이근욱 서강대 교수의 기고문 '확장억제 강화의 오랜 노력과 성과'에 따르면, 2010년에 한미 EDPC가 출범하자 일본의 고위 정책결정자들이 "미일 양국은 EDPC 같은 기구가 없어도 미국의 대일본 핵우산정책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오래 전부터 긴밀하게 협력해왔다"라며 자신감을 표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러나 2023년에 한미 NCG가 출범하자 일본의 태도가 바뀌었다. 그해 5월 22일 자 <연합뉴스> 영문판은 "일본은 NCG와 비슷한 기구를 만드는 일에 관심을 보였다"고 말한다. 이처럼 한일 양국은 대미관계에서 경쟁심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고이즈미의 희망이 실현되면 한국에서도 새로운 요구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
한일 간 긴장관계를 의식하는 미국으로서는 어느 한쪽이 큰 차이로 앞서지 않도록 하는 데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의 현상을 바꾸려는 다카이치 내각의 행보가 또 다른 고민을 미국에 안길 수 있다.
냉전시대에도 미국은 한일관계를 의식했지만, 핵문제와 관련해서는 지금 같은 고민을 할 필요성이 적었다. 한국과 오키나와에 핵무기를 배치했던 시절, 미국은 별 구애됨 없이 자국의 필요에 따라 동아시아를 하나의 작전구역처럼 활용했다. 지금처럼 한일의 발언권이 크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런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 미국 국무부가 운영하는 '역사국(Office of the Historian)' 사이트에 실린 1958년 5월 1일 자 '제364차 국가안전보장회의 토의록'이다. 이에 따르면,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은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남한에 대한 공산주의 침공의 재연을 막을 충분한 억지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억지력은 오키나와에 기반한 우리의 핵 능력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미국령 오키나와에 배치된 핵무기로 남한을 방어할 수 있다는 발언은 미국이 한국·일본·오키나와 등을 하나의 작전구역처럼 활용했던 시절을 반영한다. 미국의 결정권이 지금보다 훨씬 컸던 그 시절에는 한일 양국이 경쟁적 양상을 연출할 여지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최선의 방법은 한일 양국의 관점과 이익에 따라
그러나 그런 상황은 1972년에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되고 반핵운동으로 인해 오키나와에 핵무기를 둘 수 없게 되면서 뒤틀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탈냉전기인 1991년에 조지 H. W. 부시 행정부는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전술핵을 철수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냉전기에 구축된 미국의 핵무기 네트워크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 인해 조성된 새로운 환경 속에서 한일 양국은 미국과의 개별적 협의를 통해 핵문제에 대한 권리를 높여가고 있다. 이것이 한일 양국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지금의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다. 미국이 중심을 잃고 어느 한쪽에 힘을 크게 실어줘 다른 쪽이 불만을 갖게 되면 미국이 감당할 수 없는 국면이 전개될 수도 있는 것이 지금의 상황이다. 그만큼 이 상황은 불안정하다.
지금 상황은 미국이 강력한 힘을 갖고 있고 한·일 등이 그 힘을 신뢰할 때에나 유지될 수 있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와 이란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국면이 더욱 장기화되고 미국의 이미지가 '베푸는 나라'에서 '뜯어가는 나라'로 확실히 바뀌게 되면 언제라도 불안정한 국면이 등장할 수 있다.
한일 양국이 핵문제와 관련해 불필요한 경쟁을 벌이지 않으려면 두 나라 관계의 패러다임부터 바뀌어야 한다. 지금처럼 미국이 양국의 핵문제를 조정하는 구도가 오래 지속되기는 힘들다. 미국이 순수하게 두 나라를 위해 조정하는 게 아니라 상당 부분은 자국의 국익을 위해 조정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이 지금보다 약해지면 양국이 이 구도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점점 낮아진다.
최선의 방법은 한일 양국의 관점과 이익에 따라 한일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이다. 두 나라가 묵은 숙제를 푼 뒤 자신들의 필요에 맞게 한일관계를 올바로 정립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다. 미국 핵정책에 대한 참여의 범위를 놓고 은근한 경쟁을 벌이는 지금의 구도에서 벗어나, 동아시아 지역 특유의 관점과 이익에 따라 핵 경쟁을 억누를 방법을 양국이 고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