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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고 습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생각해 보면 수십 년째 늘 겪고 있는 일이긴 하다. 더울 때가 되어서 더운 것이고, 장마철의 습기가 생소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매년 겪는 이 고생이 해마다 새롭고 도대체 익숙해지지 않으니 놀라운 일이다. 그 뿐인가. 올여름은 그 어느 해보다도 덥고 혹독할 거라는 소식도 있고, 유럽 여러 나라들도 일찌감치 40도로 끓어올라 이제는 에어컨 없이 살 수 없게 되었다는 뉴스를 보면 두려운 기분마저 든다. 이번 여름, 괜찮을까. 아직 8월의 불볕더위는 시작도 안 했는데.
이런 날씨에는 집에서 음식을 만드는 것도 힘들다. 그렇다고 매일 외식을 할 수도 없으니 뭔가를 해 먹긴 해야 할 텐데, 고민이다. 옛 어른들은 말씀하셨지. 더울수록 더 뜨거운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이른바 이열치열은 참 좋은 말이긴 한데 음식을 만드는 사람에 대한 배려라고는 전혀 없는 얘기인 것도 분명하다. 삼복더위에 몸에 좋은 음식을 만들겠다고 가스불을 켜서 뭔가를 굽거나 끓여 대는 일이라니. 상상만 해도 힘이 빠지지 않나.
불을 사용하지 않거나, 아니면 매우 간단한 조리를 통해서 가볍게 한 끼를 때우는 동시에 맛과 영양도 포기하지 않는 방법이 뭐 없을까? 다음에 소개하는 두 음식이 그런 고민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다.
새콤 향긋 밀치 세비체

▲먹고 남은 밀치회로 만들어 본 세비체. 다져 올린 딜이 큰 역할을 한다. 그런데 정작 회가 잘 안 보인다. 채소를 밑에 깔았어야 했나.
여운규
밀치라는 생선이 있다. 숭어의 일종이다. 회로도 먹고 국을 끓여 먹기도 하는 숭어는 참숭어와 가숭어, 이렇게 두 종류가 있다. 참숭어는 몸집이 크고 좀 더 시커먼 색이다. 눈알도 검다. 가숭어는 그에 비해 좀 작은 사이즈고, 눈 색깔이 밝다. 꼬리 지느러미를 보면 확연히 차이가 나는데 제비 꼬리처럼 갈라진 모양을 한 게 참숭어고, 가숭어는 꼬리가 덜 갈라져 뭉툭하다.
참숭어는 봄에 보리가 팰 때가 제철이라서 보리숭어라 불리는 반면, 가숭어는 날이 추워지는 11월부터 초봄까지가 제철인 겨울 생선이다. 이 가숭어가 바로 밀치다. 가숭어를 많이 먹는 부산을 비롯한 동남 해안에서 부르는 별칭이다. 이게 맛이 기막히다. 기름이 바싹 오른 밀치 회는 다른 어떤 고급 어종 못지않게 고소하고, 특유의 사박 거리는 식감도 좋다. 가격도 저렴하다. 서울 사람들은 잘 모르는 맛이다.
부산의 대중적인 횟집에 가보면 일반적인 모둠회에 거의 양식 밀치가 기본으로 포함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예전에는 제철인 겨울이 지나면 구경하기 힘들었지만, 요즘은 광어처럼 양식이 대규모로 이루어져 사시사철 맛볼 수 있게 됐다. 부산에서 나고 자라 삼시 세끼 회를 먹어도 질리지 않고, 회 중에서도 밀치를 가장 좋아하는 나에게는 너무나 잘된 일이다. 비록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가끔 내려가 고향 바다를 보며 먹는 밀치 회 맛은 서울살이의 팍팍함을 한순간에 날려준다.

▲부산에서 밀치회를 포장해 왔다. 제철은 아니지만 충분히 맛있다. 서울에서는 보기 힘든 맛이다.
여운규
후배 결혼식을 보러 부산에 간 김에 가족이 먹을 회를 포장해 상경했다. 제철을 맞은 농어와 하모(갯장어)를 섞어 절반 정도 넣고, 나머지 절반은 저렴하지만 맛있는 밀치로 채웠다. 제철이 아닌 게 아쉽긴 했지만 결코 맛이 없진 않았다.
저녁에 오랜만에 제대로 회 파티를 벌였다. 어찌나 양이 많은지 온 가족이 실컷 먹고도 밀치가 조금 남았다. 이걸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다가 세비체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세비체(ceviche)는 주로 페루 등 남미 지역에서 생선이나 해산물을 각종 채소 및 향신료와 함께 식초에 절여 먹는 일종의 회무침 같은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레시피를 찾아보면 광어를 주로 사용하는데, 흰살 생선이면 다 된다.

▲고소한 밀치회가 새콤 향긋하게 변신하는 순간
여운규
만드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남은 회에 양파, 마늘 등을 다져 넣고 올리브 오일과 레몬즙을 넉넉히 뿌려서 냉장고에 넣어 잠시 숙성 시킨 뒤에 먹으면 된다. 본고장의 세비체는 레몬이나 라임의 산성이 생선의 단백질을 하얗게 변형 시켜 살짝 익은 느낌이 들 때까지 절여 둔다고 하던데, 그건 회를 즐겨 먹지 않는 동네의 조리법일 터다. 우리는 그냥 신선한 느낌을 즐겨도 될 듯하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마지막에 딜과 같은 허브를 반드시 다져 넣어야 한다는 거다. 산뜻하고 향긋한 딜의 향이 기가 막히게 어울리면서 이국적인 느낌을 더해 준다. 꼭 딜이 아니라도 파슬리나 고수 같은 것도 괜찮아 보인다. 그것마저 없으면? 깻잎은 어떨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여하튼 뭐라도 꼭 넣자. 적절한 향신료는 평범한 음식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다. 차갑고 새콤하면서 알싸한 세비체는 한여름 더위를 잠시 잊게 해 줄 것이다.
포만감과 영양공급까지, 단호박 에그슬럿
▲단호박이 제철을 맞았다.
여운규
마트에 가니 단호박이 제철이다. 달콤한 단호박은 영양도 풍부하고 담백해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다. 곱게 갈아 호박죽을 끓여도 좋고, 버터와 생크림을 넣은 수프도 좋지만 그냥 찜기에 넣고 찌기만 해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최소한의 조리를 통해 가장 좋은 맛을 낸다는 취지에서 볼 때 에그슬럿만큼 좋은 조리법도 흔치 않은 것 같다. 만드는 법은 아래와 같다.
- 잘 씻은 단호박은 칼이 들어가기 쉽게 전자렌지에서 약 1, 2분가량 돌려 꺼낸 뒤 칼로 꼭지를 잘라낸 다음 속을 파낸다.
- 파낸 속에 치즈를 잘게 잘라 깔고 그 위에 계란을 하나 깨어 넣는다. 필요하면 계란 노른자에 포크로 구멍을 살짝 내준다. 후추도 조금 뿌린다.
- 계란 위에 모차렐라 치즈를 듬뿍 뿌린 다음 아까 잘라낸 뚜껑을 덮어서 다시 전자렌지에 약 5~6분 가량 익히면 끝이다. 예쁘게 잘라내서 먹으면 된다.
▲에그슬럿은 단호박을 맛있게 먹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다.
여운규
요리라고 하기에도 좀 머쓱할 정도로 간단한 레시피다. 처음에 꼭지 딸 때 살짝 긴장되긴 하지만 그것만 넘기면 음식 다 한 거나 마찬가지다. 들인 노력에 비해 맛은 꽤 괜찮다. 단호박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건 잘 먹는다. 더운 여름 지친 몸에 포만감과 함께 적절한 영양을 공급해주는 음식이다.
불 안 피워도 되니 얼마나 좋은가. 힘들이지 말고, 너무 애쓰지 말고, 좋은 음식 먹어가며 그렇게 또 한 계절 버티다 보면 어느 순간 서늘한 바람이 지친 우리를 위로해 주는 날이 반드시 온다. 이 또한 우리가 수십 년간 겪어봐서 아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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