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7.25 10:52최종 업데이트 26.07.25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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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은 대구10월항쟁 주역이고 자신은 남로당 간부였던 박정희의 집권기에 연좌제를 완화하는 조치가 있었다. 김대중과 박정희가 맞붙은 4·27 대선을 한달 앞둔 1971년 3월 22일, 박 정권은 박경원 내무부 장관을 통해 '연좌제 완전 폐지' 방침을 표명했다.

이날 <경향신문>에 따르면, 박경원은 "일부 신원조사 대상자들이 불순세력에 속아 본의 아닌 과오를 저질렀던 경우에도 사회활동에 제약을 받고 있음을 없애기 위한 조치"라고 밝혔다. 본인의 잘못이 없는데도 가족이나 친족 때문에 불이익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약속이었다.


이로 인해 연좌제 폐해는 종래에 비해 줄어들었다. 하지만 양적 차이일 뿐, 질적 차이는 아니었다. 그 폐해는 그 뒤로도 계속 나타났다. 1980년 헌법의 제12조 제3항은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라고 규정했다. 이 규정은 연좌제에 대한 불만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 1971년 이후에도 그 폐해가 계속됐기에 이런 규정이 나오게 됐다.

<탐라문화> 2025년 제80호에 실린 역사학자 정순임의 논문 '공식 기록물 속에 나타난 4·3 연좌제'는 "공식적으로 연좌제 폐지를 약속했지만 실제로 폐지된 것은 아니었다"라면서 1971년 이후로 연좌제의 적용 범위가 축소된 것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종래에는 '8촌 이내 부계혈족 및 4촌 이내 모계혈족, 부(父)의 8촌 이내 부계혈족 및 4촌 이내 모계혈족, 혈족의 배우자, 혈족의 배우자의 혈족, 배우자, 처의 부모, 배우자의 혈족, 배우자의 혈족의 배우자'에게 연좌제가 적용됐다. 그랬던 것이 위 조치를 계기로 부모·형제·자매·자녀·배우자로 한정됐다. 그렇지만 어차피 연좌제의 주된 적용 대상은 배우자와 부모·형제자매·자녀였다.

연좌제가 축소될 기미를 보였지만 그 폐해가 여전했던 1970년대 초반에 선거관리위원회 직원인 20대 청년 양성홍도 그 피해를 겪었다. 1947년에 제주시 연동리에서 출생한 그는 제주 4·3항쟁 참여자이자 피해자인 양두량의 아들이다. 할아버지인 양천종도 4·3 피해자였다. 이것이 그를 선관위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게 만든 이유였다.

<4·3과 역사> 2023년 제23호에 실린 양성홍의 증언 대담록 '한때 원망했지만 지금은 너무도 그리운 아버지'에 그 사연이 담겨 있다. 대담에서 그는 1970년에 선관위 직원이 됐다가 선거관리위원장이 "그만두라"고 해서 사직했노라고 진술했다. 채용 당시에 양성홍의 신원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던 선관위가 뒤늦게 가족관계를 파악하고 사직을 압박했던 것이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수난

2022년 8월 30일 제주MBC가 보도한 "4·3직권재심 201호 법정"
2022년 8월 30일 제주MBC가 보도한 "4·3직권재심 201호 법정"제주MBC

연좌제로 인한 그의 피해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선관위를 그만둔 뒤에 다른 사람과 다투다가 경찰서에 끌려간 일이 있었다. 위 대담록에 따르면, 경찰의 신원조회 뒤에 생긴 일을 양성홍은 이렇게 증언했다.

"끌려갔는데 그때 상대방은 풀어주고 나는 가두더라고요. '이 빨갱이 새끼'라고. 그때 처음 그 얘기를 들었습니다."

양성홍의 잘못이 더 크다고 경찰이 판단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렇지만 '이 가해자 새끼'가 아닌 '이 빨갱이 새끼'라고 말한 일은 경찰이 사건을 공정하게 다뤘을 가능성을 떨어트린다. 양성홍이 4·3 피해자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사건 처리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높이는 일이다.

공안사건이 아닌 일반 분쟁 때문에 경찰서에 끌려갔다가 그런 말을 들은 양성홍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그로부터 사흘간 유치장에 갇힌 그는 이때부터 사회생활에 소극적이 됐다고 지난날을 회고했다.

그의 아버지 양두량은 호적상으로는 1924년 생이지만 실제로는 1921년 생이다. 양두량은 20대 중반 나이로 맞이한 4·3항쟁에 적극 참여했다. 양성홍은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가 나중에 얘기하는 것을 보니까, 우선 5월 10일 총선거를 상당히 반대해서 아버지가 동네 사람들하고 같이 선거를 안 하기 위해 산으로 올라가기도 하셨다고 그러더라구요."

지금 우리에게는 남한만의 단독 총선이 지극히 자연스럽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이상한 것을 이상하다고 표현하고 이를 거부하는 양두량의 산중 투쟁은 1년 가까이 이어졌다.

그 사이에 양두량의 아내는 가족이라는 이유로 수난을 당했다. 몇 번이나 경찰서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경찰은 주리틀기 식으로 그의 다리 사이에 나무 장작을 집어넣고 "지독한 년"이라면서 마구 짓밟았다. 이 때문에 제대로 걷지 못하게 상태에서 경찰서 문을 나선 그는 밤늦은 시각이 돼서야 겨우겨우 집에 도착했다.

5·10 총선 1년 뒤인 1949년 5월경, 양두량이 하산했다. 그는 말을 타고 산 밑으로 내려왔다. "동상이 심하게 걸려가지고 걷지를 못해서 내려올 때도 말 타고 내려왔다는 그런 얘기를 들었어요"라고 양성홍은 진술했다.

하산한 양두량은 수용소에 갇히고,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됐다. 대전시가 편찬한 <옛 대전형무소 역사관광자원 조성사업 전시콘텐츠 발굴 및 고증 용역>에는 양두량이 그해 7월 4일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고 적혀 있다.

연좌제 적용 법적 처리가 잘못됐음을 재심 통해 인정

국가에 의해 신병이 확보되고, 사형이 아닌 징역형이 확정된 양두량은 가족과의 연락이 끊어졌다. 위 대담록 서두는 "아버지 양두량은 군사재판을 받고 육지 형무소로 이송된 뒤 행방불명됐다"고 말한다.

양두량에 대한 국가 폭력은 양두량 한 사람에게 그치지 않고 다음 세대로도 이어졌다. 그의 아들은 안정적인 직장에서 쫓겨나고, 경찰서에서 빨갱이 새끼라는 소리를 들은 뒤 유치장에 갇혔다. 양두량의 가족은 피해자 가족이 아니라 그 자체로 피해자가 됐다. 연좌제가 이 가족을 그렇게 만들었다.

아버지가 산으로 올라간 해에 태어난 양성홍은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할 수 없었다. 집에는 아버지 사진이 없었다. 소년 시절의 양성홍은 아버지가 어떻게 생겼느냐고 어머니에게 묻곤 했다. 어머니는 "너, 거울을 보라. 그 거울을 봐. 너하고 똑 닮았져"라고 대답하곤 했다. 양성홍은 거울에 비치는 자신과 똑같았다는 아버지로 인해 고난의 길을 걸었다. 그래서 그는 위 대담록 제목처럼 아버지를 원망하면서 성장했다.

양성홍이 진정으로 원망해야 할 대상은 당연히 따로 있었다. 그것을 국가는 뒤늦게 깨달았다. 2022년 8월 30일 제주MBC에 보도된 현장 영상에 따르면, 제주지방법원 형사4-2부는 이날 양두량을 비롯한 4·3 피해자 30명에 대한 재심 재판에서 이렇게 선고했다.

2022년 8월 30일 제주MBC가 보도한 "4·3직권재심 201호 법정"
2022년 8월 30일 제주MBC가 보도한 "4·3직권재심 201호 법정"제주MBC

"뒤늦게라도 이런 여러분들의 노력이나 염원이 합쳐져서 오늘 이 자리가 마련돼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선고하겠습니다. 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희 재판부는 다음과 같이 선고하겠습니다. 피고인들은 각 무죄."

대한민국은 죄를 저질렀다는 증거도 없이 양두량에게 징역 7년을 선고한 뒤 행방불명 상태로 만들고, 가족들마저 연좌제로 엮었다. 바로 그 연좌제 적용을 정당화시켰던, 양두량에 대한 법적 처리가 잘못됐음을 국가가 재심을 통해 인정했다. 양두량 가족에 대한 연좌제 적용 역시 불법이었음을 국가가 인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양두량 부자의 사례는 빙산의 일각이다. 상급 학교나 기업체 문턱에서 수많은 한국인을 괴롭혔던 연좌제 적용은 실상 불법인 경우가 허다했다. 연좌제 자체도 옳지 않지만, 연좌제를 정당화했던 애초의 판결 자체도 잘못된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양두량 재심은 잘못된 법적 처리와 이에 기인한 연좌제로 고통을 겪은 수많은 사람의 처지를 상기시키는 재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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