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9일 ‘차이나 리(재명) 아웃’ 행진에 참여한 자유대학 등 윤석열 지지자들이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은 서울 중구 명동을 행진하며, “차이나 아웃” “닥쳐!” 등 혐중 구호를 영어로 외쳤다.
권우성
10대 극우화를 역사교육 부족이나 일부 학생의 일탈로만 바라봐서는 문제의 핵심에 닿기 어렵다. 극단주의 콘텐츠가 파고드는 곳은 지식의 빈틈만이 아니다. 관계의 결핍, 낮아진 자존감, 경쟁에서 밀려났다는 패배감도 그 통로가 된다.
학교는 공동체를 배우는 공간이지만 현실에서는 입시와 평가를 중심으로 작동한다. 친구는 함께 배우는 동료이면서 동시에 등급과 순위를 놓고 경쟁하는 상대가 된다. 학업에서도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고 관계에서도 소속감을 얻지 못한 학생에게 "너의 실패는 네 책임만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는 강력하다.
여기에 "특정 집단 때문에 네가 피해를 보고 있다", "기득권과 언론이 진실을 숨기고 있다"는 설명이 붙는다. 극단주의는 복잡한 현실 대신 단순한 답을 준다. 우리와 적을 나누고, 피해의 원인을 특정 집단에 돌리며, 사실은 우리가 더 우수하고 정의로운 존재라고 말한다. 패배감은 분노로, 무력감은 '진실을 깨달은 사람'이라는 우월감으로 바뀐다.
질병관리청의 '2025년 청소년건강행태조사'에 따르면 최근 1년 동안 2주 내내 일상생활을 중단할 정도의 슬픔이나 절망감을 경험한 청소년은 남학생 21.7%, 여학생 29.9%였다.
물론 우울하거나 학업 성취도가 낮은 학생이 극우화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고립감과 좌절감이 큰 청소년에게 자신을 인정해 주고 실패와 불안을 대신 설명해 주는 단순한 세계관은 매력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 학교와 가정이 학생의 상처를 이해하지 못할 때 극단주의가 먼저 다가와 그 상처에 이름을 붙여주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학생의 몸은 학교에, 마음은 스마트폰 속에 있다
지금 학생들은 교실에 앉아 있으면서 동시에 유튜브 쇼츠와 인스타그램 릴스, 온라인 커뮤니티와 게임 세계에 속해 있다.
학교는 민주주의와 인권, 미디어 리터러시를 가르친다. 그러나 플랫폼은 학생이 영상을 볼 때마다 더 강하고 자극적인 콘텐츠를 추천한다. 혐오와 음모론은 반복될수록 친숙해지고, 친숙한 주장은 어느 순간 사실처럼 느껴진다.
생성형 인공지능으로 만든 가짜 이미지와 음성, 맥락을 잘라낸 짧은 영상은 사실과 의견의 경계를 더 흐린다. 학생에게 그것은 선동물이 아니라 친구와 공유하는 재미있는 콘텐츠다. 이를 반박하는 교사의 긴 설명은 20초짜리 영상보다 느리고 재미없다.
올해 초 온라인 게임 로블록스 공간에서 청소년과 청년들이 극우 성향의 구호와 상징을 내세운 가상 행진을 벌인 사건도 단순한 놀이로만 넘길 수 없다. 극단적 정치문화가 게임과 밈, 아바타를 통해 공동체적 경험으로 전환될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더 이상 정치집회나 긴 정치 서적을 통해 극단주의를 처음 접하지 않는다. 침대에 누워 보는 짧은 영상과 친구가 보내준 밈에서 시작할 수 있다.
교사는 왜 더 깊이 개입하지 못하는가?
학생들의 혐오 표현이 늘어날수록 교사의 생활지도는 중요해진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교사의 개입은 위축돼 있다.
교육부의 '2024학년도 교육활동 침해 실태조사'에 따르면 지역교권보호위원회가 개최된 사안은 4234건이었고, 이 가운데 약 93%인 3925건이 교육활동 침해로 인정됐다.
제도는 정당한 생활지도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지만 현장 교사들의 두려움은 여전하다. 학생의 잘못을 엄하게 지적하면 아동학대 신고를 당하지 않을까, 역사적·사회적 문제를 이야기하면 정치적으로 편향됐다는 민원이 들어오지 않을까 걱정한다.
학생의 가치관과 삶에 관여하고, 잘못을 꾸짖으며, 긴 대화를 통해 마음을 움직이는 교육은 갈수록 위험 부담이 큰 일이 되고 있다. 학생과 교사의 인간적인 관계가 줄어들수록 그 빈자리를 온라인 인플루언서와 극단적 정치 채널이 채울 가능성은 커진다.
학교와 가정이 "공부는 잘하고 있는가"를 묻는 동안 온라인 공동체는 "너는 왜 억울한가", "누가 너의 것을 빼앗아 갔는가"를 묻는다.
처벌보다 먼저 학교의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

▲지역 비하 성격을 가진 응원 구호를 외쳐 논란을 일으킨 서울 배재고등학교 야구부 대표 선수가 지난 6일 전남광주특별시 광주제일고등학교를 찾아 광주일고 야구부 대표 선수에게 사과문을 전달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혐오 표현을 사용한 학생에게 책임을 묻는 일은 필요하다. 역사적 비극을 조롱하거나 특정 집단을 모욕한 행동을 '아이들의 장난'으로 넘겨서도 안 된다.
그러나 학생을 처벌하고 사이트를 폐쇄하고 계기교육 한 시간을 추가하는 것만으로 10대 극우화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학생을 곧바로 '극우 학생'으로 낙인찍으면 오히려 자신을 피해자로 인식하고 극단적인 공동체에 더 의존하게 만들 수도 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분명하게 가르치되, 왜 그런 표현에서 재미와 소속감을 느꼈는지도 살펴야 한다.
학교가 해야 할 일은 논쟁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안전하게 논쟁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근현대사와 민주주의, 젠더와 이주, 불평등과 지역갈등 같은 민감한 문제를 교실 밖으로 밀어내서는 안 된다. 자료의 출처를 확인하고 주장과 사실을 구분하며, 상대를 반박하되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지 않는 토론을 경험하게 해야 한다.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도 "이 영상은 가짜인가"를 넘어 "왜 이 영상은 나를 화나게 하는가", "누가 나의 분노와 이용 시간을 통해 이익을 얻는가"를 질문하는 교육으로 나아가야 한다.
무엇보다 학생이 학교 안에서 실제 역할과 소속감을 경험해야 한다. 학생자치와 동아리, 예술·체육활동, 지역사회 프로젝트를 통해 모든 학생이 '나는 이 공동체에 필요한 사람'이라는 경험을 해야 한다.
10대 극우화의 반대말은 '관계'다
"스타벅스 가야지"를 외친 아이들을 지도한 뒤에도 마음이 무거웠다. 아이들은 자신의 말이 왜 잘못됐는지 어느 정도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 휴대전화를 켜면 또 다른 자극적인 영상과 밈을 만나게 될 것이다.
학교의 한 차례 설명이 알고리즘의 수백 번 추천을 이길 수 있을까?
그 질문 앞에서 학교 교육의 무력감을 느낀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학교가 포기해서는 안 된다.
학교의 본질은 지식을 빠르게 전달하는 데 있지 않다. 학교가 여전히 필요한 이유는 학생들이 서로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믿을 만한 어른을 만나며, 자신의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10대 극우화의 반대말이 진보나 또 다른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관계'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알아주는 교사, 실패해도 다시 참여할 수 있는 공동체, 다른 배경의 친구와 협력한 경험, 자신의 목소리가 실제 변화를 만들어내는 학생자치가 있을 때 극단주의의 단순한 해답은 힘을 잃는다. 아이들의 몸만 교실에 붙잡아 두는 교육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학교는 학생들의 마음이 머물고 싶은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10대 극우화를 막는 일은 잘못된 사상을 단속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아이들의 외로움과 패배감, 인정받고 싶은 마음을 학교와 사회가 다시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학교가 관계의 기능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스타벅스 가야지"라는 노랫소리가 사라진 뒤에도 또 다른 혐오의 언어가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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